전 세계의 반도체 부족 현상이 심각한 가운데, 미래산업의 핵심이 되는 반도체 확보를 위한 주도권 싸움이 치열하다.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한국에서 삼성전자 반도체 공장을 가장 먼저 찾은 것을 보면 한미 경제안보 동맹에서 반도체가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지 알 수 있다.
그런데 삼성전자와 SK하이닉스의 힘만으로는 글로벌 반도체 전쟁에서 우위를 가져가기 어렵다. 특히 한국은 차세대 먹거리로 떠오르고 있는 시스템 반도체 분야에서 미국, 대만, 일본 등에 비해 경쟁력이 떨어진다. 비메모리 분야에서 많은 스타트업이 나와야 하는 이유다. 다행히 활발한 창업 분위기 속에서 파두, 퓨리오사AI, 세미파이브 등 팹리스 반도체 스타트업들이 잘 성장하고 있다. 그중 최근 620억 원의 시리즈A 투자를 이끌어내며 국내 인공지능(AI) 반도체의 선두주자로 떠오른 스타트업이 있다. 리벨리온이다.
2020년 11월 설립돼 채 두 돌도 안 된 이 회사는 그동안 정부지원금을 포함해 거의 1천억 원을 투자받아 이제 3,500억 원의 기업가치를 가진 로켓 성장 스타트업이 됐다. 미국에서 11년의 화려한 커리어를 미련 없이 버리고 한국에 돌아와 이런 성과를 낸 38세의 박성현 대표를 만나봤다.
인텔, 삼성, 스페이스X, 모건스탠리 등 거치며 창업 기회 봐와
“저희는 AI 반도체와 그 반도체에 최적화된 소프트웨어를 함께 설계하는 팀입니다. 금융 등 각 영역에서 사용하는 데 최적화돼 빠르면서 에너지 사용량이 적은 혁신적인 AI 반도체를 만듭니다.”
운동선수처럼 다부진 체격을 지닌 박 대표는 반도체 이야기가 나오면 인텔 반도체의 역사부터 애플이 반도체를 직접 만든 이유까지 어떤 주제에 대해서도 청산유수다. 그의 이야기를 들으면 요즘 한국 창업계에 대단한 인재들이 뛰어들고 있다는 것을 저절로 느낄 수 있다.
“울산 출신으로 중학교 3학년 때 유도를 했습니다. 울산 대표선수로 전국대회에 나갈 기회가 생겼는데 같은 날 수학 경시대회가 있었습니다.”
공부를 잘했던 박 대표는 유도도 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권유로 수학 경시대회에 참가했다. 이후 유도선수의 꿈은 접었다(한국 반도체산업을 위해서는 다행이었다). 경남과학고에 진학한 뒤 2년 만인 2002년 카이스트 전자공학과에 입학했다. “청개구리처럼 특이한 커리어를 갖길 원했습니다. 그래서 군 복무 기간 중 자진해서 아프가니스탄 파병을 다녀왔습니다.” 그리고 전자공학과를 수석 졸업한 그는 2009년 미국 유학에 나섰다. MIT 전기컴퓨터공학부 석박사 과정에 들어간 것이다.
“미국에 가서 처음으로 스타트업에 관심을 갖게 됐습니다. MIT 대학원 선배들이 어디로 진출하나 봤더니 스타트업으로 가는 겁니다. 스타트업 초기 단계에 들어가면 스톡옵션을 얼마 받는다는 등의 이야기를 일상적으로 들으며 문화충격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스타트업에 가고 싶었지만 잘 되지 않았다. 오히려 인텔, 오라클 등 대기업에 합격했다. 우선은 컴퓨터의 두뇌 역할을 하는 CPU에 대해 배우고 싶어 2014년 반도체의 산실인 인텔에 들어갔다. 인텔에서
2년간 반도체 디자인에 대해 배우고, 2016년 텍사스의 삼성전자 모바일 부문으로 이직했다.
“삼성전자에서 일하며 한국 사람들이 얼마나 실행력 있고 일을 잘하는지 알게 됐습니다. 이 경험이 창업하는 데 큰 도움이 됐습니다.” 삼성전자에 근무하며 영주권도 얻은 박 대표는 또 새로운 분야에 도전하기 위해 이직에 나섰다. 처음에 가고 싶었던 곳은 넷플릭스, 아마존 프라임 비디오 같은 콘텐츠 스트리밍 플랫폼이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엉뚱하게도 선배의 추천으로 스페이스X에 들어가게 된다.
“‘같이 화성으로 가자!’는 일론 머스크의 합격 통지 전화를 받았습니다. 항상 창업 기회를 보고 있던 저는 한국에서 우주산업을 해도 멋지겠다는 생각에 스페이스X에 입사해 위성에 들어가는 주문형 반도체를 설계하는 일을 했습니다.”
박 대표는 왜 이렇게 한곳에 안주하지 않고 새로운 분야로 옮겨 다녔을까. “너무나 창업을 하고 싶었습니다. 스마트 빨래집게 같은 것이라도 만들어 시작할까 할 정도로 창업 아이템에 굶주려 있었죠. 창업할 가치가 있는 도전적인 문제를 찾아 이직을 한 겁니다.” 다음은 월스트리트였다. 2018년 12월 뉴욕 맨해튼에 있는 모건스탠리 부사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금융 경력이 전혀 없는 반도체 엔지니어가 금융업계에 들어간 것이다. “높은 연봉을 받는 만큼 빨리 성과를 내 제 능력을 증명해야 했습니다. 6개월은 적응하기 위해 미친 듯이 일했습니다.”
그가 맡은 일은 퀀트 트레이딩이었다. 컴퓨터로 적합한 프로그램을 구축해 초고빈도거래(high frequency trade)를 통해서 수익을 내는 것이다. 박 대표는 단시간에 월스트리트 금융업계의 니즈를 파악했다. 속도전이었다. 1천 분의 1초인 밀리세컨드만큼 빨리 예측해야 더 높은 수익을 올릴 수 있다.
“경쟁자보다 밀리세컨드, 마이크로세컨드 만큼 빠른 거래를 위해서는 범용 칩보다 주문형 전용 ASIC칩을 쓰는 것이 낫습니다. 초단타 트레이딩을 하는 금융업에는 이게 필수입니다. 금융업을 위한 주문형 칩을 만들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어벤져스급 인재들과 범용성 있고 성능 좋은 AI 반도체 개발
이런 길이 보이는데 창업을 안 할 수가 없었다. 뉴욕에서 만난 동갑내기 IBM리서치센터 오진욱 박사와 의기투합했다. 오 박사는 IBM왓슨연구소에서 7년간 AI 반도체의 핵심설계를 담당한 인재였다. 창업은 미국이 아닌 한국에 돌아가 하기로 했고, 그 과정에서 의료 AI 스타트업 루닛에서 딥러닝 기술개발을 담당했던 김효은 박사도 합류하기로 했다. 왜 실리콘밸리가 아닌 한국이었을까.
“반도체는 한국이 제일 잘합니다. 인재도 풍부하고, 벤처투자도 활발하죠. 오히려 미국은 반도체 인재가 없습니다. 그래서 한국에서 창업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 이렇게 해서 2020년 11월 한국에서 리벨리온이 설립됐다. 어벤져스급 인재들이 모여 시작하다 보니 출발부터 55억 원의 벤처투자를 확보했다. 현재 리벨리온이 준비하는 제품은 세 가지, ‘아이온’, ‘아톰’, ‘리벨’이다.
“아이온은 금융업계를 위한 반도체로, 초단타 트레이딩에서 성능이 세계 최고 수준입니다. 두 번째 제품인 아톰은 맥가이버칼 같은 제품입니다. 어떤 AI 알고리즘도 돌릴 수 있는 클라우드용 AI칩입니다. 범용성이 있으면서도 전력소모량이 적은 제품입니다.” 박 대표는 이 제품들이 나오면 ‘한국 스타트업이 이 정도로 범용성 있고 에너지 효율이 높은 제품을 만들어냈냐’며 세계가 놀랄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리고 이 두 제품의 성과를 기반으로 만든 세 번째 제품 리벨로 세계시장에 본격적으로 도전할 예정이다.
“한국에서 시작해서 결국 미국으로 갈 겁니다. 나스닥 상장이 목표입니다.”
카이스트·MIT에서 배운 칩 설계 능력, 인텔·삼성전자·스페이스X·모건스탠리에서 읽은 시장 수요 등의 강점을 가진 초특급 인재들이 창업에 뛰어드는 한 한국 반도체산업의 미래는 밝다는 생각이 들었다. 로켓 스타트업 리벨리온에 주목할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