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재 우리가 마주한 커다란 도전과제는 세계적인 규모로 새로운 상상 속의 질서를 만들되 국민국가나 자본주의 시장에 기초하지 않는 것이다.”
이 문장은 세계적인 베스트셀러 『사피엔스』 10주년 특별판 서문의 일부다. 이 문장은 저자 유발 하라리가 아니라 인공지능(AI) ‘GPT-3’가 썼다. 이 GPT-3를 한국어로 학습시킨 글쓰기 프로그램 ‘KoGPT’에 김훈의 소설 『하얼빈』 첫 세 문장을 입력하자, 그다음 이어지는 문장을 꼭 작가가 쓴 것처럼 척척 써냈다. AI 카피라이터 ‘퍼사도’는 내로라하는 광고대행사를 제치고 인지적 콘텐츠 플랫폼 알고리즘으로 글로벌 금융기업 JP모건 등을 클라이언트로 확보했다. 이쯤 되면 보고서든 SNS든 필요한 글을 AI가 다 써줄 수 있을 것 같다. 그렇다면 이제 글쓰기 능력을 개발하느라 시간과 돈을 쓸 필요가 없지 않을까?
미국의 공교육 혁신을 주도하는 휴렛재단은 학생들이 비판적 사고와 효율적 의사소통 능력을 기르려면 객관식 시험이 아니라 높은 수준의 사고와 글쓰기 능력이 요구되는 에세이 시험을 쳐야 한다고 주장했다. 문제는 채점에 비용과 시간이 엄청나게 든다는 것. 이 재단은 교사가 직접 하는 것 이상으로 정확하게 채점할 수 있는 알고리즘을 갖춘 AI 채점관을 개발하고자 작문 평가 시스템 대회를 주최했다.
그런데 뜻밖의 문제가 발견됐다. AI는 신선하고 창의적이며 획기적인 내용을 담은 글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것. 즉 AI는 ‘평균’만 인식해 그 기준에 맞는 에세이만 채택한다. 따라서 AI가 채택한 에세이는 AI의 평가 기준대로 ‘평균적인’ 사고와 표현이 담겨 있을 것이라는 우려가 제기됐다. 또한 학생들이 AI가 우수하다고 평가한 에세이를 분석해 ‘그 방식대로’ 글쓰기를 연습할 가능성도 다분하다. 결과적으로 AI가 에세이를 평가하는 시스템은 뻔한 글쓰기로 뻔한 생각만 하게 만드는 셈이다.
일본의 AI 과학자 아라이 노리코는 AI 로봇 ‘토다이’가 수능시험을 쳐 도쿄대에 입학하는 프로젝트를 진행했다. 이 AI 로봇은 수학·과학 등에서 상위 1%에 들었고, 600자 논술에서도 대다수 학생보다 뛰어난 점수를 받았다. 그러나 토다이는 결정적으로 사람처럼 ‘창의적으로 생각하고 질문하는 범위를 넘어 의미를 찾는 기술’이 없어 도쿄대에 갈 수 있는 성적은 얻지 못했다. 아라이 노리코는 이 프로젝트 결과가 비판적 사고와 창의성, 의사소통 면에서 인간이 AI보다 뛰어나다는 것을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이러한 능력은 어떻게 개발할 수 있을까.
조던 피터슨 토론토대 교수는 “글쓰기를 배우면 된다”고 말한다. 글쓰기는 생각하는 법 그 자체이기 때문에 글을 쓰면서 ?우리는 이것이 제대로 된 생각인지 점검하고,? 그 과정에서 생각을 정리할 기회를 얻는다. 생각을 정리하면서 우리는 자기 생각의 중심과 본질이 무엇인지 탐색하고 ?알게 되는데, 이걸 말로 정리해서 표현하면 나의 ‘주장’이 된다. 이 주장을 사람들 앞에서 말하면 발표가 되고, 내 생각을 관철하는 도구가 된다.
앞으로 AI 기술은 빠른 속도로 대중화돼 업무와 생활 전반에 투입될 것이다. 이 경우 우리에게 주어지는 선택지는 두 가지다. 시키는 일을 알고리즘에 따라 빠르고 틀림없이 수행하는 AI에 대체되거나, AI와의 협업을 통해 지적활동의 생산성을 높이고 의도한 성과를 내거나.
글쓰기를 AI에 맡긴다는 것은 ‘생각하기’를 AI에 맡긴다는 것이다. 내 머리로 생각하고 내 언어로 표현할 줄 모르는 사람은 - 글을 쓸 줄 모르는 사람은 - AI에 대체되기 딱 좋다. 그래서 글쓰기는 어느 시대든 전공 불문 직종 불문 직무 불문, 대체 불가능한 능력이다. 적어도 일생에 한 번은 제대로 된 글쓰기 수업에 매달려야 가능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