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에 또 다녀왔다. 일이었다. 제주는 지난 십여 년간 한 해에 한 번은 가는 곳이라 이쯤 되면 지난번 제주 출장 때 먹은 음식은 ‘대충 금방 되는 콩나물해장국밥이었습니다’ 라는 식이 된다. 익숙한 것으로부터 감흥을 느끼는 것은 무척 새삼스러운 일이니까. 잠시 배경을 설명하자면 나는 제주 여행의 브라키오사우루스쯤 된다. 이효리도 백종원도 없던 시절부터 제주 여행정보를 다뤘다. 패션잡지 기자로 일할 적에 제주 붐이 시작돼 가장 빠른 타이밍에 제주 여행정보를 담은 별책부록 한 권을 기획하고 취재해 만들었다.
저가 항공편이 생기고 1세대 이주민들이 차린 게스트하우스며 카페가 생겨나던 때였다. 당시 유통되던 여행정보는 대부분 부모님 세대의 신혼여행지 시절을 답습하는 것이었다. 그 별책부록은 그것을 홍대나 경리단 감성으로 완전히 치환하는 일이었다. 쉽지는 않았다. 맨땅에 헤딩하듯 이주민들과 토박이들을 탐문해야 했다. 별책부록은 히트였다. 몇 해 동안은 제주 어딜 가나 그 별책부록이 귀중한 정보서처럼 비치돼 있었다. 제주 여행의 새로운 표준이 돼 먹고 마시고 자고 보고 쉬는 곳을 그린 새 지도의 기틀로 남았다.
맨땅 흙먼지를 털고 구경하는 입장이 돼 제주 여행 판의 뼈대에 살이 붙는 과정을 지켜보니 꽤 흥미진진했다. 향토음식 중 ‘삼춘’(제주에서 시니어를 일컫는 범존칭)들이 알려준 꿩메밀국수니 아강발탕이니 하는 것들은 의외로 빛을 오래 못 봤다. 대신 제주의 독특한 재료를 이용한 음식들이 튀어 올랐다. ‘돈사돈’을 통해 제주 흑돼지를 ‘멜젓’에 찍어 먹는 포맷이 전국구 히트가 됐고, 대기업에서 ‘멜젓’ 소스도 출시했다. 딱새우 파스타 등 제주 특유의 재료를 활용한 젊은 요리사들의 감성 충만한 식당들도 하나의 여행음식 문법이 됐다. 갈치조림이나 옥돔국, 보말국, 성게미역국, 몸국이나 고기국수, 돔베고기, 두루치기 등 캐주얼한 한 끼 음식들도 대체 불가능한 여행식단을 구성하고 있다. 별책부록에 실었던 식당들의 명성은 여전히 유지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시들해지는 때가 왔다. ‘먹잘알’이라고 하는 사람들이 등장하면서부터다. 새로운 곳을 알게 돼 달가운 한편 괜히 구설에 소환되기도 해서 불쾌한 기분이 쌓였다. ‘내가 찾아낸 이곳이 더 맛있어’라는 비교에 굳이 딴지를 놓고 싶은 마음이었던 것 같다. ‘다 거기서 거기구먼!’ 하다 보니 정말로 모든 것이 탈색돼 버렸다. 뭘 먹어도 거기서 거기일 것 같고, 그러니 굳이 멀리 찾아가고 오래 기다리고 돈 써가며 먹을 일도 아니란 생각이 굳어버린 것이다. 알아채지 못한 사이 제주에 괜히 메말라 버렸다.
그래서 나는 현지인 편에 섰다. 현지인과 관광객 사이엔 묘한 인터스텔라가 있다. 완전히 다른 동선으로 제주를 다닌다. 현지인은 콩나물해장국밥 빨리 먹고 귤밭에 귤 따러 가야 하지만, 관광객은 귤 따기 체험에 앞서 전복도 구워 먹어야 하고 갱이죽이랑 성게미역국도 먹어야 하고 아무튼 바쁘다. 관광객 중 하나가 되고 싶지 않은 마음마저 어지럽게 뒤섞여 콩나물해장국밥 먹는 사람이 돼버린 것이었다.
내가 주로 제주에 가서 일하는 곳은 남쪽이다. 빨리 가서 귤을 봐야 하니 제주시에서 적당히 산 서울 맛 나는 빵이나 우물거리며 한라산 516도로의 숲터널 고개를 굽이굽이 넘는다. 그렇게 바쁘지 않아도 되는데 급하게 빨리빨리. 매번 그랬다. 이번에 우연한 계기로 다른 길로 남쪽을 향하게 됐다. 한라산 동쪽에서 번영로, 남조로를 타는 코스는 완만한 경사 비탈을 따라 오름과 평원이 번갈아 나타난다. 한라산 서쪽으로 1110도로와 제2산록도로를 타면 또 새로운 모습의 한라산을 내내 바라보게 된다. 관광객들이 주유(周遊)하고 다니는 한가한 길을 가보고서야 깨달았다. 나는 제주를 숱하게 낭비하며 살고 있었다. 결코 세상을 흑백으로 구분할 수 없지만, 그동안 놓쳤던 것이 무엇이었는지 정하자면 나는 명백히 행복 쪽을 놓치며 제주에 오갔다.
‘관광객 전복 먹는 공장’이라 놀리던 식당에서 전복을 오래 기다려 먹어봤다. 거리와 시간과 비용을 감당하며 먹을 만한 만족도였다. 다음엔 해녀의집도 가볼 참이다. 아침부터 채 꺼지지 않은 배에 또 갱이죽을 욱여넣으면서도 입에 짝짝 달라붙는 그 감칠맛을 가득 채우고 관광명소들도 작정하고 돌아보려 한다. 흔한 행복일수록 제일 먼저 잘 챙겨 둘 일이다. 남들 다 하는 것만 하는 것도 쉽게 행복해질 수 있는 지름길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