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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과학기술 강국의 길, 자유로운 연구환경에 달렸다
윤석진 한국과학기술연구원장 2023년 06월호

올해 초 기획재정부는 한국과학기술원(KAIST)을 포함한 4개 과학기술원을 공공기관에서 지정해제한다고 발표했다. 한국을 대표하는 연구기관이자 교육기관임에도 그동안 이들은 「공공기관의 운영에 관한 법률」에 따라 ‘기타공공기관’으로 분류돼 인력과 예산 측면에서 다양한 규제를 받았다. 앞으로 기관운영의 자율성과 독립성이 크게 확대되며 글로벌 경쟁력을 갖추게 되리라는 기대감에 과학기술계는 즉각 환영의 목소리를 냈다.

이러한 변화는 나날이 치열해지는 글로벌 기술패권 시대에 시사하는 바가 크다. 국가안보의 패러다임이 군사, 경제 분야를 넘어 기술 중심으로 빠르게 확장되는 기정학(技政學)의 시대, 각국은 국익과 직결되는 전략기술 확보를 위해 치열한 레이스를 펼치고 있다. 이에 발맞춰 국회는 지난 2월 「국가전략기술 육성에 관한 특별법」을 통과시켰고 정부는 첨단반도체, 양자기술 등 전략기술의 최전선에 있는 연구기관들에 아낌없는 지원을 약속했다.

레이스의 선두에는 미국과 중국 등 강대국이 있다. 두 나라 대비 한국의 R&D 투자는 6분의 1 수준에 그치며 규모 측면에서 절대적인 열세에 놓여 있다. 현명한 생존 전략은 미래의 산업 지형에서 우리가 주도권과 협상력을 쥘 수 있는 ‘대체불가형’ 핵심기술에 역량을 집중하는 것이다. 이를 위해서는 기업의 자금력, 대학의 인재풀, 연구기관의 인프라 등 산학연이 가진 자원과 역량을 총결집해 핵심기술 분야에서 규모의 한계를 극복해야만 한다.

개방과 협력을 통해 산학연이 힘을 모아야 할 지금, 이들을 가로막는 규제의 벽은 여전히 높기만 하다. 특히 국가 혁신생태계의 일익을 담당하고 있는 정부출연연구기관은 아직 ‘공공기관’의 지위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예를 들어 총액 인건비 제도, 임금피크제 등 경직된 인력운영 체계는 세계 최고 수준의 인재를 육성·유치하는 데 걸림돌이 되고 있다. 지난 몇 년간 연구기관에도 일괄 적용됐던 블라인드 채용 제도는 인재 검증·영입에 한계를 가져왔지만, 다행히 이번 정부에서 연구현장의 요구가 수용돼 개선되기도 했다.

연구기관의 경쟁력은 하루가 다르게 급변하는 기술환경에 얼마나 신속히 대응할 수 있는가에 달려 있다. 따라서 기관운영의 독립성과 자율성 확보 문제는 기정학의 시대에 특별한 의미를 갖는다. 비교적 자유로운 연구환경이 보장된 해외 선도기관들은 최고의 연구팀을 구축하고 새로운 연구 분야를 개척하는 데 거침이 없다. 앞으로 정부출연연구기관이 이와 비슷한 수준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발휘하지 못한다면, 우리의 레이스 전략에 반드시 필요한 산학연 개방과 협력에 제동이 걸릴 것이다.

공공기관은 국민의 세금으로 운영되는 기관이기에 경영 효율성과 투명성을 담보하는 관리·감독 장치가 필요하다는 의견은 일견 타당하다. 그러나 연구기관의 본질적인 속성과 임무를 고려해 본다면, 대국민 서비스를 제공하는 일반적인 공공기관과 동일한 잣대로 비교되는 것은 곤란하다. 단순히 비용을 줄이고 효율을 높인다는 관점에서 벗어나, 미래의 연구기관은 치열한 기술경쟁을 헤쳐나갈 위험감수 역량, 도전지향성이 필요하다는 측면에서 완전히 다른 접근 방식이 필요하다.

독일 막스플랑크연구회의 전신인 카이저빌헬름연구회 초대 회장을 맡았던 하르나크 박사는 “정부는 지원하되 간섭하지 않는다”라며 연구기관의 자율성과 독립성을 강조했다. 이는 지난 한 세기 넘게 과학기술 선진국들의 문화와 정신을 지탱하는 대원칙으로 남아 있다. 얼마 전 우리 정부는 ‘2030년 과학기술 5대 강국’이라는 비전을 선언했다. 이제 연구기관을 관리·감독의 대상으로 보는 과거의 패러다임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다. 원대한 꿈을 눈앞에 둔 지금, 그에 걸맞은 새로운 시대정신이 무엇인지 고민이 필요한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