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를 꼭 가고 싶으세요?” 미국 출장길에 오른 기업인들이 실리콘밸리에 잠깐 들른다. 목적지까지 가는 직항이 없어서 국내선으로 갈아타야 하는 그들이 선택한 중간 기착지는 샌프란시스코 국제공항이다. 실리콘밸리에서 주어진 시간은 대여섯 시간 남짓. 여기서 급한 업무를 처리할 시간과 공항 수속 시간을 빼면 우리에게는 서너 시간밖에 여유가 없다. 마중을 나간 나의 질문에 그들의 대답은 명확하다. “애플 한번 갈 수 있어요?”
주차장에서 차를 찾아 공항을 빠져나오면서 나는 일부러 101번 국도가 아닌 280번 주간고속도로(interstate highway)를 선택한다. 애플의 창업자 스티브 잡스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마다 드라이브를 즐겼다는 도로다. 1986년 그가 애플에서 쫓겨났을 때 머물렀던 우드사이드 지역도 280번 도로가 지난다. 조금 더 내려가면 2005년 세계인의 마음을 사로잡은 잡스의 졸업식 연설이 탄생한 스탠퍼드대도 마주할 수 있다.
목가적인 풍경에 취해 한 시간쯤 지나자 쿠퍼티노 지역의 애플파크에 도착했다. 우리는 애플파크 방문자센터에서 커피 한 잔을 시켜놓고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한다. 나는 한국에 잘 알려지지 않은 스티브 잡스의 면면을 소개하기로 마음먹는다. 방법은 그가 남긴 언어의 흔적을 찾아가면서 의미를 재해석하는 것이다. 나는 이를 혁신가의 ‘말자취’로 이름 붙이겠다. 우리가 떠나는 여정에 여러분을 초대한다.
“기질은 호시절에 형성되지 않는다”
시공간을 옮겨 보자. 때는 1991년, 장소는 오리건주 포틀랜드에 있는 리드대다. 잡스가 리드대 학위수여식에 참석해 축사를 한다. 잡스의 리드대 축사는 2005년 스탠퍼드대 연설만큼 잘 알려지지는 않았다. 유튜브 영상 조회수만 봐도 스탠퍼드대 연설은 5천만 회가 넘지만 리드대 축사는 500회도 채 되지 않는다. 하지만 1991년 리드대 축사에서 잡스는 기업가로서 자신의 인생 전체를 관통하는 철학을 공개한다. 축사의 제목은 ‘늘 배고플 것(Staying Hungry)’이다. 2005년도 스탠퍼드대 연설의 마지막 문장이 “늘 갈망하라. 늘 우직하게 나아가라.(Stay hungry, stay foolish.)”였다는 점을 상기하면 잡스가 이미 14년 전부터 안주하지 않는 혁신가의 자세를 추구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잡스는 축사를 마무리하면서 “기질은 호시절에 형성되지 않는다. 기질은 결핍에서 만들어진다.(Character is not built in good times, but in a time of adversity.)”라고 말한다. 리드대에서 철학을 전공하던 잡스는 한 학기가 지나고 학교를 중퇴한다. 부모님의 후원에 기대서 비싼 수업료를 감당하고 싶지 않았던 그는 친구들의 기숙사 방을 전전하며 필요한 과목만 청강한다. 이때 들었던 캘리그라피 수업이 훗날 매킨토시가 심미적 폰트를 갖추는 데 도움이 됐다고 담담히 고백했다. 또한 돈이 부족해 한 가지 음식만 먹는 식단을 고수하고 공짜 밥을 얻기 위해 대학 근처에 있는 힌두교 사원을 방문하는 일도 부지기수였다.
잡스는 억만장자가 되고도 새로운 세계를 갈구하는 히피(hippie)로서의 자신의 영적 자아를 잃지 않으려 애썼다. 대학 시절 사과농장 공동체 생활을 했던 그는 컴퓨터회사 이름을 ‘애플(Apple)’로 지으면서 시작부터 초심자의 정체성을 드러낸다. 젊었을 때의 결핍은 잡스가 기업가로서 기질을 형성하는 데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리드대 축사를 한 1991년, 잡스는 어려운 시기를 지나고 있었다. 자신이 창업한 회사에서 쫓겨나 몇 년째 야인 생활을 하는 중이었다. 넥스트(NeXT)라는 기업을 만들어 재기를 노렸지만 애플에 버금갈 수준은 아니었다. 오히려 자신이 보유한 컴퓨터 애니메이션 스튜디오 픽사(Pixar)가 성장하면서 애플 복귀의 발판을 마련한다.
1997년 연봉을 1달러만 받는 상징적 계약을 체결하고 최고경영자로 애플에 복귀한 잡스는 쿠퍼티노에 위치한 애플 캠퍼스 ‘인피니트 루프(Infinite Loop)’에서 직원들을 모아놓고 마케팅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설파한다. 그는 “마케팅은 가치에 관한 것이다(To me, marketing is about values)”라고 단언한다. 잡스가 없는 10여 년 동안 애플이 상징하는 가치는 무너져 내리고 있었다. 꺼져가는 불씨를 살리기 위해 투입된 구원투수답게 그는 애플의 본질부터 명확히 하자고 호소한다.
잡스는 당시 마케팅을 가장 잘하는 회사로 나이키를 든다. 나이키는 신발을 파는 회사지만 자사 제품이 기능적으로 얼마나 훌륭한지 강조하지 않는다. 대신 위대한 스포츠맨에 대한 존경심을 계속 표출한다. 훌륭한 선수가 나이키를 신고 경기하는 모습을 넌지시 보여 주는 것이다. 잡스는 애플이 나아갈 방향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생각했다.
그가 정의한 애플의 본질은 기술과 제품으로 ‘세상을 바꾸는’ 기업이다. 애플의 제품과 서비스를 쓰면서 무언가를 창조하는 행위가 인류를 한 걸음 나아가게 만들 것이라는 그만의 철학이었다. 이때 내세운 애플의 슬로건이 ‘다르게 생각하라(Think Different)’다. 잡스가 복귀하자마자 공들여 제작한 광고에서 애플은 세상을 바꾼 위대한 인물의 모습을 하나씩 열거한다. 아인슈타인, 밥 딜런, 마틴 루터 킹, 존 레논, 마리아 칼라스, 간디를 비롯한 17명이 차례로 등장한다. 통념에 맞선 사람들에게 경의를 표하면서 애플이 지향하는 가치도 이와 마찬가지라는 메시지를 슬며시 던진다. 눈에 보이지 않는 가치를 정립하는 일이 결국 마케팅의 정수라는 혁신가의 사고를 엿볼 수 있다.
“나의 만트라(mantra)는 집중과 단순함이다”
56년의 길지 않은 삶을 살았던 잡스는 일생을 선불교 수행자로 지냈다. 잡스가 사망한 2011년 10월,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은 그를 추모하는 특별판을 낸다. 『타임』은 1984년에 갓 출시한 매킨토시를 안고 바닥에 앉아 있는 젊은 기업가의 모습을 표지로 선택했다. 표지를 유심히 살펴보면 잡스가 이때부터도 완벽한 결가부좌 자세를 취할 수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물론 지독한 명상과 수행의 산물이다. 잡스의 전기를 쓴 월터 아이작슨은 그를 ‘평생 구도자로 산 사람’으로 정의했다.
잡스가 애플로 복귀하고 1년이 지난 1998년 5월, 그는 『비즈니스 위크(Business Week)』와 인터뷰하며 자신이 지속한 명상활동의 일부를 공개한다. “내 오랜 만트라(mantra)는 집중과 단순함이다(That’s been one of my mantras: focus and simplicity)”라고 말이다. 만트라는 명상할 때 반복적으로 되뇌는 단어나 문장을 말한다. 기술로 세상을 움직인 혁신가의 진리는 ‘단순함’이다. 차고 창업 시절인 1977년부터 애플의 기치가 “단순함은 궁극의 정교함이다”라는 레오나르도 다빈치의 금언(金言)이었다는 사실에서도 이를 확인할 수 있다.
혁신가의 말자취를 찾아 떠난 우리의 여정을 마무리할 시점이다. 가장 중요한 것은 탁월한 인물이 남긴 교훈을 내 삶과 일에서 어떻게 체화하느냐로 귀결된다. 가정과 일터에서 본질에 해당하지 않는 부분은 가지를 쳐나가자고 다짐하지만 매일 좌절하는 게 나의 현실이다. 기질은 호시절에 형성되지 않는다고 했던가. 직업인으로서 가치를 만들기 위해 지금, 여기에 집중하고 나의 시공간부터 단순화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