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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아름다움에 의미를 부여하는 힘
정여울 『데미안 프로젝트』 저자, KBS <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2025년 06월호


문득 아침에 일어나 ‘삶이 권태롭다’는 생각이 들 때면 어김없이 어디로든 떠나기 위해 여행 사이트를 뒤적거리는 나를 발견한다. 아무리 가까운 곳이라도, 일단 1박 2일이라도 급히 숙박 예약을 해놓으면 왠지 가슴이 설레기 시작한다. 권태란 설렘을 잃어버리는 일이기에, 호기심을 상실하는 것이기에, 새로운 곳으로 떠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무뎌진 가슴은 싱그러운 설렘을 되찾기 시작한다. 

얼마 전에 김소연 시인의 『한 글자 사전』을 읽다가 무릎을 탁 치며 깨달음을 얻었다. 여행자는 모든 곳에서 아찔한 아름다움을 찾아내는 사람이라고. 그 아찔한 현기증은 몸소 그 장소에 찾아간 고생 끝에 오는 쾌락이라고. 이런 아름다운 현기증이라면 얼마든지 더 앓고 싶다. 

그냥 유튜브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영화나 책으로만 설렘을 느끼는 것이 아니라, 직접 내 발로 힘겹게 찾아가야만 느낄 수 있는 그 장소, 그 사람, 그 경험에 대한 아찔한 현기증이야말로 우리가 여행을 통해 꿈꾸는 감각의 지진이 아닐까. 감각이 온통 뒤흔들릴 정도로 아찔한 아름다움, 그것을 경험한 뒤에는 비로소 지금까지 느꼈던 감각이 얼마나 규칙적이고 일상적이고 익숙한 것이었는지를 깨닫게 된다. 



아찔한 현기증을 찾아 떠나는 여행

나에게 교토 여행도 바로 그런 ‘아름다운 현기증’을 향한 갈망이었다. 세상의 아름다움을 한껏 들이마시고 싶은데, 그때 내 마음은 걱정으로 가득 차서 ‘감정이라는 파일의 저장 용량’이 다 떨어져 버린 것 같았다. 눈앞의 미려한 풍경들을 보면서도 처음에는 어리둥절했다. 왜 이런 아름다운 것들이 여기에 있는 걸까, 이렇게 아름답고 고운 것들을 눈앞에서 목격하면서도 나는 왜 제대로 감동을 느끼지 못하는 걸까. 이런 질문을 하며 크게 당황했다. 하지만 이틀 정도 지나자 비로소 감각이 깨어났다. 여행의 가장 큰 장점이다.

아무리 걱정스러운 일이 많아도, 어차피 이렇게 먼 거리에서는 해결할 수 있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다. 나의 모든 걱정을 집에, 한국에 두고 왔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국경을 벗어나면 ‘어쩔 수 없이, 노 터치’ 상태가 된다. 걱정거리를 멀리 떨어뜨려 두고 잠시 마음을 쉴 수 있는 여유가 생기는 것이다. 교토의 구석구석은 너무 아름다워 현기증이 났다. 힘들긴 한데 미치도록 재미있었다. 너무 많은 자극이 한꺼번에 몰려와서 두뇌활동에 ‘과부하’가 걸리는 듯한 그 느낌이 참으로 좋았다. 



일단 교토 니조성의 화려한 겹벚꽃을 바라보며 무장해제 상태가 됐다. 벚꽃도 충분히 아름다운데 겹벚꽃의 대향연이라니. 여느 해 같으면 벚꽃이 다 떨어졌을 시기라 아무런 기대 없이 간 터였다. 이른바 벚꽃 시즌에는 워낙 사람이 많고 숙박비가 비싸 그 시즌을 살짝 피해 갔던 것이다. 그런데 고맙게도 예상을 뛰어넘어 벚꽃은 늦게까지 피어 있었다. 벚꽃이 만개하는 시기는 아니었지만, 벚꽃이 떨어지는 모습을 보는 것도 활짝 핀 꽃의 아름다움을 보는 것만큼이나 뭉클했다. 봄은 국경을, 그 모든 시공간의 제약을 뛰어넘어 전 세계에서 몰려온 교토의 여행자들에게 기적 같은 아름다움을 선물했다. 봄은 매년 익숙하게 찾아오는 것 같지만 늘 뭔가 새롭고 싱그러운 기쁨을 가져오는 것이었다. 봄은 아무리 반복돼도 결코 지치지 않는 기적 같은 것이다. 



산조거리의 북적거림, 교토그라피(매년 교토에서 열리는 세계적인 사진전)의 풍성한 볼거리, 유학생 정지용이 자주 산책했다는 고즈넉한 가모가와 강변, 높은 건물이 거의 없어(교토에는 유네스코 세계유산이 많아 대부분 지역에 고도 제한이 있다) 아무리 혼잡한 거리라도 하늘이 탁 트인 풍경이 무척이나 정겹게 다가왔다.



아름다움 속에 깃든 역사의 무거움
모든 곳이 아름다웠지만 교토에서 가장 좋아하는 장소는 료안지다. 그곳에서 잊을 수 없는 풍경을 보았기 때문이다. 료안지에 들어가면 누구나 자신도 모르게 침묵하며 고요히 풍경을 바라보게 된다. 그렇게 료안지에 들어서서 정원을 바라보는 마루에 올랐는데 거기서 앳된 한국 소녀를 만났다. 소녀는 윤동주의 시집을 읽고 있었다. 나는 화들짝 놀랐다. 때마침 나도 윤동주의 시집 『하늘과 바람과 별과 시』에서 <쉽게 쓰여진 시>를 펼쳐보며 윤동주의 교토 유학 시절을 떠올리고 있었기 때문이다. 같은 시집을 읽고 있는 사람을 신기하게도 이곳에서 만난 것이다. 마치 내 마음속 생각이 외부 현실에서 그대로 재현되는 듯한 행복한 환각을 느꼈다. 타임머신을 타고 다시 어려져서 교토의 료안지에 불시착한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얼마나 반가웠는지, 그리고 얼마나 애틋했는지. 

일본 여행을 하며 ‘아름답다’고 느낄 때마다 가슴에 뼈아픈 죄책감 같은 것이 서려 마음이 무거워지곤 했다. 그런 내게 윤동주의 시집은 ‘성찰의 부적’ 같은 것이었다. 아름다움을 발견하면서도 그 속에 깃들어 있는 ‘역사의 발자취’를 결코 잊어서는 안 된다는 자각이었던 것이다. 

윤동주의 시집을 읽고 있는 소녀가 너무도 천진무구하게 집중하고 있어 사진을 찍지 못했다. 그녀의 완벽한 몰입을 차마 깰 수가 없었던 것이다. 나는 흐뭇하게 윤동주의 시를 읽는 소녀를 바라보며 낯선 이에게 깊은 동질감을 느꼈다. 교토를 여행한다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 미래가 어우러진 시간의 네트워크 속으로 깊숙이 들어가는 체험이다. 과거의 역사적 상처를 딛고, 현재의 다채로움을 경험하며, 미래에 우리가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고민하게 되는 이 아름다운 도시 교토에서, 나는 다시 힘차게 살아갈 응원의 에너지를 얻었다. 



자연의 아름다움과 인공의 아름다움이 조화로운 축제를 벌이고 있는 듯한 교토에서 내가 느낀 현기증. 그것은 더 아름다운 삶, 아름다움 속에서도 성찰의 안테나를 드리우는 일을 결코 멈추지 않는 삶을 향한 갈망에서 비롯된 것임을 비로소 깨달았다. 
 
글·정여울 『데미안 프로젝트』 저자, KBS <정여울의 도서관> 진행자
사진·이승원 『공방예찬』, 『학교의 탄생』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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