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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갱의 반격이 시작된다
함승민 이코노미스트 기자 2018년 10월호



그래도 됐다. 옥시레킷벤키저(옥시·현 RB코리아)는 ‘옥시싹싹 뉴가습기당번’ 제품의 흡입독성 가능성을 인지하고도 이를 은폐하고, 유해물질이 첨가된 가습기 살균제를 판매했다. 문제가 불거진 다음에도 책임을 회피하고 사건 은폐에만 급급했다. 생산자의 책임소재는 불분명했고, 소비자 목소리는 작았다. ‘그래도 되는’ 채로 무려 16년을 보냈다. 2016년에야 검찰 수사가 본격화되자 뒤늦게 사과와 보상에 나섰다. 그동안 발생한 피해자는 정부의 공식 인정으로는 607명, 민간 전문가들이 파악하기로는 최대 56만명에 달한다.
여기선 다들 그랬다. 2015년 폭스바겐은 디젤게이트(배출가스 저감장치 조작)로 미국과 유럽 등에서는 대규모 리콜(판매중단 및 회수)을 시행하고 배상과 무상 수리 등을 결정했다. 한국에서는 배상책임을 외면했다. 2016년 스웨덴 가구업체 이케아는 북미지역에서 최소 6명의 어린이 사망사고를 초래한 서랍장에 대해 리콜 조치를 단행했다. 국내에서는 같은 상품을 버젓이 팔았다. 올해 들어서는 BMW 차량에서 연이어 불이 났다. 정부와 소비자는 BMW가 결함을 미리 알고도 숨겨오다 늑장 대처를 한 것은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그러기 쉬웠다. 디젤게이트 당시 미국의 차량 소유자들은 각각 590만∼1,100만원의 배상금을 받았다. 국내 소비자에게는 100만원짜리 쿠폰만 주면 됐다. 국내에서 3년을 끈 BMW의 리콜 조치는 미국에선 화재 발생 단 4건 만에 시행됐다. 옥시는 성인 피해자에게 3억5천만원 정도의 위자료를 지급한다고 결정했다. 미국이라면 배상액은 10배까지 높아졌을 것이란 분석이 나왔다. 소비자 목소리의 크기와 책임기준이 다른 탓이다. 이런 상황에서 기업들은 ‘손해 보지 않는 대처’에만 충실했다.
그러자 이제 달라지려 하고 있다. 국내 소비자들은 지금까지 이런 일이 벌어질 때마다 스스로를 ‘호갱’이라 부르며 자조하거나, 일부 소비자가 잠깐 불매운동을 부르짖는 것에 그쳤다. 그러나 이제는 많은 소비자들이 소비자피해 사안에 함께 분노하고, 분쟁해결에 큰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일련의 사건들이 끼치는 여파나 규모가 커진 데다가 해외에서 유사 사건이나 같은 사건을 어떻게 대응하는지에 대한 소식이 빠르게 전달되면서다. 인터넷 공간을 통해 소비자 사이의 의사소통이 활발해지면서 한목소리를 내기도 수월해졌다.
한발 더 나아가 권익을 보호할 강력한 제도를 도입하자는 주장도 힘을 얻고 있다. 공급자 위주의 시장과 허술한 법적 장치, 소극적 대처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언급되는 것이 ‘집단소송제’와 ‘징벌적 손해배상제’다. 피해자들이 합당한 보상을 받도록 하고, 기업이 큰 배상금을 물지 않기 위해 사전에 소비자보호에 적극적으로 나설 동기를 마련한다는 것이다. 이런 제도가 이미 도입돼 있는 해외사례가 전해지면서 국내에서도 관련 논의가 활발해지고 있다.
정부의 기조도 바뀌는 분위기다. 지난해 10월 정부는 ‘법무행정 쇄신방향’에서 집단소송제 범위를 증권에서 소비자 분야로 확대한다는 계획을 내놨다. 징벌적 손해배상제도 강화될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개편돼 올해 4월부터 시행된 지 반년도 되지 않아 적용범위와 배상액 상한수준을 재차 확대하는 방안을 검토하고 있다. 그간 산업계 반대에 부딪혔던 제도 개편에 정부가 긍정적 신호를 보내면서 국내 소비자 주권에도 새로운 전기가 마련될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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