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부터 내 꿈은 옷 잘 입는 사람이었다. 옷 투정을 하면 엄마는 이렇게 말씀하셨다. “어른 되면 네 마음대로 입어.” 어른이 된 내게 ‘마음대로 입기’란 내 돈을 누군가의 허락 없이 옷에 쓰는 거였다. 그렇게 10년이 지났고 꽉 찬 옷장 앞에선 한숨이 나왔다.
내 옷장은 망한 옷장이었다. 우선, 내가 옷을 보는 관점은 왜곡돼 있었다. 굶주림에 시달린 사람이 폭식하듯 나도 마음의 굶주림을 채우기 위해 쇼핑중독에 빠졌다. 폭식을 그만둬야 할 사람에게 필요한 게 ‘건강한 식생활’이듯 쇼핑중독에 빠진 나에겐 ‘건강한 의생활’이 필요했다.
내 옷장이 망한 두 번째 이유는 옷 입기를 이성의 영역이라 여기지 않았기 때문이다. 내게 패션은 당연히 감각의 영역이었다. 사실 옷을 마음대로 입기란 치밀한 계산 끝에 가능한 건데, 내 이성은 마비됐었다. 내가 선망한 스타일은 누군가가 권한 트렌드였고 왠지 좋은 일이 일어날 것 같은 느낌의 옷을 골랐다.
건강한 의생활을 결심하고, 실수를 거울삼아 이성적인 다섯 단계를 밟아갔다. 1단계는 ‘용감한 성찰자’가 되는 것이다. ‘어떤 옷을 새로 들여야 하나?’ 고민하던 중 이런 질문을 던져봤다. ‘인생이란 여행에서 나는 어떤 여행자일까?’ 그럼 내 옷장은 여행 가방이 되고 가방에 넣을 옷을 쉽게 정할 수 있게 될 테니까. ‘내향적이지만 삐딱한 자유로운 영혼, 조용한 말괄량이’, 내 별명이자 정체성이다. ‘나를 누구로 표현할 것인가?’에 답하기 위해서 ‘나는 누구인가?’에 먼저 답해야 했다.
2단계는 ‘냉정한 감상자’ 단계로 안목을 높이는 것이다. 나는 어떤 옷을 사야 할지, 사면 안 되는지 몰랐다. 우선 패션 잡지나 방송에서 접했던 스타일링 팁을 ‘반대의 법칙’, ‘빼기더하기의 법칙’, ‘여백미의 법칙’, ‘색상조화의 법칙’, 이렇게 4가지로 정리해봤다. 그렇게 안목을 높이자 사야 할 옷과 사면 안 되는 옷이 드디어 보였다. 신세계였다. 내가 쇼핑에서 실패를 거듭했던 건 바로 앞선 1~2단계를 건너뛰었기 때문이다.
3단계는 ‘명민한 컬렉터’로서 똑똑하게 사는 단계다. 쇼핑 전 쇼핑 리스트를 작성하고 나를 잘 표현하면서도 서로 조화를 이룰 수 있는 옷을 찾으려 했다.
4단계는 옷으로 나를 표현하는 ‘창의적 작가’가 되는 것이다. 예술가가 자신의 세계를 작품으로 표현하고 소통하듯 내 옷을 조합해 나를 표현하고 사람들을 만난다. 흥미롭게도 내가 외양에 치중할수록 ‘멋 냈다’는 냉소를 받았고, 내면을 표현할수록 ‘멋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5단계는 ‘진정한 나’라고 부르는데, 내 삶의 주인이 되는 단계다. 어떤 옷을 입어야 할지 안다면, 어떻게 살아야 할지도 알게 되는 법이다.
쉽지 않았지만, 옷 잘 입는 행복한 사람이 되고 싶었기에 즐길 수 있었다. 이제 옷은 사는 즐거움보단 입는 즐거움의 대상이다. 있는 그대로의 나여도 괜찮다는 건강한 자존감, 정체성을 담담히 표현하고 타인과 즐거이 소통하겠다는 마음. 내 ‘건강한 의생활’의 시작이다.
누군가는 트렌드를 강요하지만, 진정으로 건강한 의생활은 내 마음대로 입는 거다. 제대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