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로 인한 세계경제의 충격이 확대되면서 주요국 중앙은행들이 강력한 통화완화 및 유동성 공급 조치들을 잇달아 발표하고 있다. 코로나19처럼 빠르고 광범위하게 확산되면서 경제적 셧다운(shutdown)까지 유발하는 질병으로 인한 경제적 위기를 전 세계가 지난 100년 동안 경험해보지 못했음을 감안하면, 전례 없는 통화완화 조치들이 일견 당연해 보인다. 그러나 그 정도와 속도의 적절성, 특히 많은 돈이 풀리면서 향후 발생할 수 있는 인플레이션, 자산가격 버블, 한계기업 연명 등 부작용에 대한 우려도 높다. 이와 관련해 향후 통화정책 방향에 관해 몇 가지 제언을 하고자 한다.
전통적 방식의 통화정책 여력 크지 않아…새로운 수단도 적극적 검토·시행을
첫째, 통화완화의 목표를 명확히 할 필요가 있다. 현 상황에서 통화완화의 최우선 목표는 ‘실물위기의 금융위기 전이를 막는 것’이 돼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코로나19로 인한 경제적 충격은 감염에 대한 공포 때문에 사람들이 외출, 외식, 여행 등 경제적 활동을 스스로 자제하거나, 정부가 방역을 위해 자가격리, 조업중단 등 조치들을 시행하면서 기업과 자영업자의 매출이 끊기고 가계의 소득이 급감하면서 발생하는 실물위기다.
문제는 이로 인해 취약한 기업과 계층을 시작으로 도산, 폐업, 실업이 늘어 대출이 부실화되거나 관련 금융자산 가격이 급락하면 금융기관, 펀드 등이 타격을 입는 금융위기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이다. 유동성이 부족해지거나 자본건전성이 악화된 금융기관들이 부실화되지 않은 부문에까지 돈을 빌려주지 않거나 이미 빌려준 돈을 회수하려 할 경우 ‘금융위기가 실물경제 충격을 더욱 증폭시키는 복합위기’로 발전할 위험성이 있다. 최근 주요국들이 과감해 보이기까지 하는 강력한 통화완화 정책을 펴고 있는 것은 이러한 복합위기는 막아야겠다는 다급함이 반영된 결과로 해석된다.
둘째, 그동안 시행해보지 않았던 통화정책 수단이더라도 적극적으로 검토하고 시행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많은 주요국이 글로벌 금융위기 이후 이어진 저금리-통화완화 기조에서 벗어나지 못한 상황에서 코로나19로 경제충격에 직면했다. 그 결과 경제위기가 심화되더라도 정책금리 인하와 같은 전통적 방식의 통화정책 여력이 크지 않은 상황이다. 미 연준이 정책금리 인하와 양적완화뿐만 아니라 회사채, 기업어음(CP), 신용카드대출, 자동차담보대출(오토론) 관련 대책까지 내놓고 일본은행(BOJ)이 상장지수펀드(ETF) 매입 방식으로 돈을 푸는 이유를 생각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우리나라의 경우 3월의 금리인하로 정책금리 수준이 사상 처음으로 0%대에 진입했다. 우리 주가, 환율, 신용부도스와프(CDS) 프리미엄 등 국내 금융시장 변수들은 국제 금융시장이 불안해지면 여전히 신흥국들과 유사한 움직임을 보인다. 우리 원화는 외환시장에서 유로화, 엔화와 같은 국제통화 지위를 확보하지 못한 상황이다. 결국 향후 국내경기가 악화되더라도 우리 정책금리 수준을 유로존과 일본처럼 제로 또는 마이너스 수준까지 낮추기는 어려워 추가적인 정책금리 인하 여지는 많지 않아 보인다. 만약 추가적으로 돈을 더 풀어야 한다면 그동안 시행해보지 않은 방식을 새롭게 시도해야 할 가능성이 높다.
셋째, 정책금리 조정보다는 돈이 필요한 곳에 직접적으로 유동성을 주입하는 방식이 더 효과적일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이번 코로나19 위기와 같은 상황에서는 금리 같은 가격변수 조정의 효과가 정상적인 경제 상황과 비교해 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정책금리 인하로 대출금리가 낮아진다고 하더라도 향후 경기 전망이 극도로 불확실한 상황에서 기업이 돈을 빌려 투자할 가능성이 낮다. 설령 유동성 부족 등 다른 이유로 기업과 자영업자들이 돈을 빌리려 하더라도 대출 부실화 리스크가 커지는 상황에서 은행 등 금융기관들이 돈을 빌려주지 않을 가능성도 높다. 특히 경제의 특정 영역, 특정 금융 부문이 어려움에 처했을 경우 그 부문에 신속하고 직접적으로 자금을 공급하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지난 3월 발생했던 국내 증권사들의 자금 부족 현상 및 이에 대응한 한국은행의 유동성 공급 조치가 좋은 예가 될 수 있다. 당시 증권사들은 글로벌 투자자산의 가격이 급락하자 투자했던 파생금융상품에 대한 추가증거금납입요구(margin call) 때문에 대규모로 달러화가 필요해졌다. 이들이 급하게 자금을 조달하는 과정에서 보유하고 있던 채권을 내다팔면서 시중금리가 급등했고 기업들의 채권 발행을 통한 자금조달이 어려워졌으며, 외환시장에서는 달러화 가치가 급등했다. 그러나 한국은행이 환매조건부채권(RP) 매매거래 대상기관에 증권사들을 추가해주고 이들이 필요한 유동성을 전액 공급해주기로 하면서 자금시장과 외환시장의 혼란이 진정되는 모습을 보였다.
중앙은행, 정부, 금융감독 당국의 긴밀한 협업 필요
넷째, 향후 통화정책의 유효성을 높이기 위해서는 정부 및 금융감독 당국과의 긴밀한 협업이 매우 중요할 것으로 예상된다. 통화완화 정책의 효과가 과거에 비해 크게 약화되다 보니 주요국 중앙은행 수장들이 재정정책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그러나 경기 급락으로 세수가 줄어드는 가운데 경제 셧다운 상황에 대응해 정부가 대규모로 돈을 써야 함에 따라 정부가 부족한 돈을 국채 등을 발행해 빌려 써야 하는 상황이 예상된다.
채권 매입 수요가 한정된 상황에서 정부의 국채 발행이 급증한다면 채권금리가 급등하고 기업 등 민간경제 주체들은 채권시장에서 필요한 돈을 빌리기 어렵게 되는 ‘구축효과’가 발생할 위험성이 높아지고 있다. 이러한 상황은 중앙은행이 국채를 매입해 정부가 쓸 돈을 공급해줘야 한다는 주장을 불러일으킬 가능성이 높다.
또한 중앙은행이 금융기관에 돈을 푼다고 하더라도 대출 부실화 및 자본건전성 악화에 대한 우려로 그 돈이 금융기관에만 머물고 기업 및 가계 등에 풀리지 않을 가능성이 높다. 앞서 유럽중앙은행(ECB)이 금융기관들에 대한 자본건전성 규제 완화 및 부실대출에 대한 회계처리상 유연성 확대 등의 조치로 양적완화 규모 확대 없이 유럽 은행들의 대출 여력을 1조8천억유로만큼 늘린 사례를 우리도 적극적으로 참고할 필요가 있어 보인다. 중앙은행의 통화완화뿐만 아니라 금융감독 당국의 미시적인 제도 변화가 수반돼야 실제로 시중에 돈이 풀릴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