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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르켈, EU를 위기에서 구했으나 환경·디지털 정책 등에 한계도
안병억 대구대 국제관계학과 교수 2022년 01월호


‘독일 최초의 여성 총리.’ 
‘최초의 동독 출신 독일 총리.’ 
앙겔라 메르켈에게 따라다니는 수식어다. 2005년 11월 중순부터 독일을 이끌어왔던 그가 지난 12월 7일 퇴임했다. 제2 공영방송 ZDF 조사에 따르면 퇴임 때 지지도는 70% 정도였다. 그의 임기 동안 EU는 경제와 난민 등 위기의 연속이었다. 메르켈은 위기의 총책임자가 돼 위기 극복에 앞장섰고 유럽통합을 몇 걸음 더 나아가게 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너무 늦은 미미한 조치’에서 과감한 경제회생 정책으로 
2010년 상반기 그리스는 1,100억 유로의 구제금융을 유로존 회원국 및 IMF로부터 지원받았다. 그리스에서 시작된 위기는 이후 포르투갈, 아일랜드, 스페인, 즉 피그스(PIGS) 국가로 전이됐다. 유로존 회원국들은 자국 화폐를 폐기하고 단일화폐를 쓰기 때문에 평가절하를 통해 수출경쟁력을 회복할 수 없다. 유로존 차원의 구제금융 제공은 이를 금지한 마스트리히트 조약 때문에 거의 6개월이 걸렸다. 이 때문에 유로존은 국제 정치경제에서 위기의 진원지가 됐다. ‘너무 늦게 겨우 위기에 대처할 만한 미미한 조치’라는 비판을 받았다. 
2010년 6월에 설립된 유럽금융안정기금(EFSF; European Financial Stability Faci-lity)은 구제금융을 제공받은 국가를 제외한 유로존 회원국들이 경제력에 비례해 지급보증을 해주는 임시 기구였다. 2년이 지나 EU 회원국들은 유럽판 IMF 역할을 하는 유럽안정메커니즘(ESM; European Stability Mechanism)을 만들었다. ESM은 항구적 구제금융기구로서 총 5천억 유로의 대출 여력을 지녔다. 여기에 더해 금융기관의 감독과 청산 권한도 EU 차원으로 이양됐다. EU는 최악의 위기 앞에서 이런 조치를 실행해 통합을 진전시켰다. 2020년 기준 유로존 경제력의 27.8%를 차지한 독일의 경우 ‘베짱이’ 피그스 국가 지원에 대한 반대가 거셌지만 메르켈 총리는 리더십을 발휘해 이런 반대를 극복했다. 
코로나19가 한창이던 2020년 7월 말 합의한 유럽경제회생기금(ERF; European Recovery Fund)은 7,500억 유로의 규모일 뿐 아니라 재정 이전의 성격을 지녔다. 메르켈 총리가 주도해 프랑스와의 양국 정상회담에서 사전 조율을 했고 EU 수반들이 모인 유럽이사회에서 이를 관철시켰다. 행정부 역할을 수행하는 EU 집행위원회가 국제자금시장에서 유로화 채권을 발행해 자금을 충당한다. 2010년 경제위기 당시 독일이 ‘레드라인’으로 간주했던 재정 이전이 팬데믹 위기 대응책에서는 사실상 무너졌다.

난민정책은 아직도 진행 중···극우정당의 세력 대두로도 이어져  
2015년 7월부터 시리아와 아프가니스탄 등 주로 중동지역의 난민 신청자들이 헝가리를 경유해 독일로 물밀듯이 몰려들었다. EU 난민정책을 규정한 더블린 규약에 따르면 첫 도착국에서 난민 신청자의 수용과 난민 지위 인정 결정 등 모든 절차가 마무리돼야 한다. 하지만 몰려든 수십만 명의 난민 앞에서 EU가 무기력한 모습을 보이자 메르켈은 결단을 내려 1백만 명 정도를 수용했다. 
반면 EU 회원국 내에서 난민의 배분이 거의 이뤄지지 않자 메르켈은 터키와 난민협약을 성사시켰다. 이 협약을 통해 EU는 역내로 들어오는 불법 난민을 터키로 송환하는 대신 합법적인 난민을 수용하고 터키에는 60억 유로의 경제지원을 제공했다. 인권선진국을 자부하던 EU는 점차 반민주적인 정치 행태를 보여온 터키의 에르도안 대통령을 강력하게 비난했었다. 그러나 난민협약 체결로 EU는 사실상 터키의 반민주적 정치에 대한 정책적 지렛대를 상실했다. 
또 독일에서는 쇄도한 난민에 대한 반감으로 반이민(반이슬람)과 반EU를 내세운 극우정당인 독일을 위한 대안당(AfD)이 대두했다. 2017년 9월 총선에서 AfD는 12.6%의 지지를 얻어 연방하원에 첫 진출했다. 2021년 9월 총선에서도 이 정당은 10.3%를 얻어 여전히 하원에서 활약 중이다. 2차 세계대전 후 처음으로 독일에서 극우정당이 하원에 진출해 우려가 컸지만, 기존 정당들이 AfD를 배제하는 정책을 실행해 왔다. 반면에 EU 차원의 난민정책 개정은 아직 성사되지 않았다. 
미국의 정치학자 제임스 맥그리거 번스는 리더십을 거래적 리더십과 변혁적 리더십으로 분류했다. 변혁적 리더십은 상황이나 구조 자체를 본질적으로 변경한다. 유럽 정책에서 메르켈은 초창기에는 위기에 소극적으로 대응하는 거래적 리더십을 보였으나 팬데믹과 같은 더 큰 위기에 대처하는 데서는 변혁적 리더십을 발휘했다. 
반면 국내 정책에서는 원전 폐기 정책을 번복하고 디지털 전환에 더디게 대응해 비판을 받았다. 원래 2008년 중도좌파 사회민주당과의 대연정 당시 메르켈은 2022년까지 원자력 발전소 운영 중단을 공약했다. 그러나 2009년 친기업적인 자유민주당과 연정을 구성한 메르켈은 이를 번복하고 2030년대 초까지 원자력발전소 운영을 허용했다. 2011년 3월 일본 후쿠시마 원전 사고 직후 폐기 여론이 압도적이자 그는 다시 2022년까지 폐기를 앞당겼다. 선거를 앞둔 갑작스런 정책 변경이라는 비판이 지속됐다.
2017년 보호무역과 미국 우선 정책을 내세운 미국 트럼프 행정부 출범 후 EU는 자유주의 국제질서의 유지자로 고군분투했다. 당시 메르켈은 서방세계의 자유무역 옹호자로 적극적으로 활동했다. 포용과 신뢰의 리더십을 보여준 메르켈을 이제 원로 정치인으로 국제무대에서 볼 수 있길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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