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월 14일 세계 4대 패션쇼인 미국 뉴욕 패션위크가 한창 진행 중인 현장에 다소 독특한 모습의 예술가가 모습을 드러냈다. 발광다이오드(LED) 화면에 나타난 흰 티에 청바지 차림의 그가 “금성에 핀 꽃을 그리고 싶다”고 말하자 형형색색의 이미지 패턴이 화면을 가득 채웠다. 잠시 뒤 화면에 나타난 패턴이 들어간 의상을 입은 모델들이 워킹을 시작했다. 인공지능(AI) 휴먼 ‘틸다(Tilda)’가 데뷔한 순간이다.
틸다는 박윤희 디자이너를 도와 뉴욕 패션위크에서 200여 개의 의상을 선보였다. 틸다가 ‘금성에 핀 꽃’을 주제로 만든 3천여 장의 이미지 패턴을 바탕으로 인간 디자이너가 영감을 얻어 의상을 만들었다. 일부는 틸다의 패턴을 그대로 사용하기도 했다. 틸다와의 협업은 과거 디자이너들이 영감을 얻기 위해 수개월 이상 인고해야 했던 시간을 한 달 남짓으로 대폭 단축시켰다. 틸다는 제시어를 받으면 바로 수천수만 장의 이미지를 창조할 수 있고, 시간만 주어진다면 그 이상도 얼마든지 만들어낼 수 있기 때문이다.
틸다를 보고 20세기 말 데뷔했던 사이버가수 ‘아담’을 떠올린 이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AI 휴먼 틸다는 스스로 생각하고, 감정을 갖고, 생각과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다는 점에서 과거의 가상인간과 질적인 차이가 있다. 기존 가상인간들은 인간 모델의 동작이나 노래 등에 기반을 두고 있어 틸다 같은 자율성을 부여할 수 없다.
이 같은 틸다의 능력은 말뭉치 6천억 개, 텍스트와 결합된 고해상도 이미지 2억5천만 장을 학습한 초거대 AI ‘엑사원(EXAONE)’을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가능했다. 인간의 뇌 수준에 다다르는 것을 목표로 하는 엑사원은 3천억 개에 달하는 파라미터(매개변수)를 바탕으로 언어(한국어·영어)와 이미지를 동시에 이해할 수 있다. 이는 틸다도 마찬가지다.
본격적인 틸다의 개발은 2020년 LG사이언스파크 AI추진단(현 LG AI연구원의 전신)이 AI로 구동하는 가상인간을 만들기로 하면서 시작됐다. AI추진단은 ‘어떤 AI를 만들지’ 목표를 설정하는 첫 단계를 젊은 직원들에게 전부 맡겼다. 6개월이 흐른 뒤 직원들이 가져온 10분가량의 영상에는 인간과 AI 휴먼이 공존하는 미래가 담겨 있었다. 그림이 서툰 인간을 도와 스케치와 채색을 하고, 결혼식 영상을 AI 자신만의 기준에 따라 재편집하는 모습 등을 본 연구원들은 자극을 받았고 개발에는 속도가 붙었다.
두 번째 단계에선 타깃 고객층(Z세대)에 맞는 AI 휴먼의 설정을 구체화하는 과정이 이어졌다. 애니메이션 같지 않고, ‘불쾌한 골짜기’ 같은 느낌이 들지 않도록 하는 외형이 정해졌다. 녹색 단발, 환경과 동물을 좋아하는 16세 소녀, ‘젠더리스’ 성별 같은 설정도 이때 결정됐다.
마지막은 엑사원을 탑재하면서 동시에 기술을 선보일 방식을 결정하는 단계였다. LG AI연구원은 ‘세상에 울림을 한번 줘보자’라는 목표로 다양한 방식을 검토한 끝에 박윤희 디자이너가 대표로 있는 그리디어스와 함께 뉴욕 패션위크에 틸다를 데뷔시키기로 결정했다.
틸다는 계속 성장하고 있다. 조만간 메타버스 공간 속에 어울리는 ‘그라피티’를 그려 선보일 예정이다. 자신의 생각을 한국어와 영어로 자유자재로 표현하기 위한 트레이닝도 진행 중이다. 장기적으로는 텍스트 자체만이 아니라 그 맥락을 관통하는 정말 예술가만이 가능한 새로운 창조도 목표로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