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세기 동안 가족은 커다란 변화를 겪었다. 그중 잘 알려져 있는 것은 단연 핵가족화일 것이다. 핵가족화는 단지 가족의 형태적 변화, 즉 함께 사는 친족의 범위가 부부와 미혼자녀로 단순화된 것을 의미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생활단위가 부부와 자녀로 단순화된 것은 20세기 동안의 사회변화를 가족이 수용하고 이에 적응했다는 것을 보여준다.
남녀 할 것 없이 일자리와 교육을 위해 부모 집을 떠나 생계기반이 있는 도시로 이동한 것이 그 시작이었다. 이 과정에서 연애결혼이 부상했고, 부부관계 및 부모·자녀 관계가 핵심적 가족관계가 됐다. 부부 사이의 성적, 정서적 만족이 강조됐으며, 아동의 정서적 가치도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20세기 후반까지도 남아선호가 지속되기는 했지만, 자녀의 가치를 추상적인 가계계승(대 잇기)을 위한 수단으로 보는 사람은 이제 거의 남아 있지 않다.
핵가족화는 존재하지 않는 과거와의 계보적 연결 대신에 현재를 함께 살아가는 구성원이 가족생활의 중심을 차지하게 된 것을 의미한다. 오늘날의 가족은 ‘단순화’되고 ‘현재화’됐다.
이러한 핵가족화는 남성 연장자와 여성 및 연소자 사이의 위계, 이른바 가부장제가 위축되는 요인이 됐다. 가족 내에서나 사회적으로나 여성에 대한 남성의 우위라는 관념은 도전받고 있다.
그러나 핵가족화는 현대적인 성 역할 분리를 가져왔다. 산업화에 따라 일터와 가정이 분리됨으로써, 가정은 생산활동으로부터 차단된 가사와 돌봄의 장소가 됐다. 노동시장에 참여해 생계부양을 담당하는 역할과 가정 내에서 가사와 돌봄을 전담하는 역할은 각각 남성과 여성의 역할로 할당됐다.
비혼 급증과 결혼 후 무자녀 가구 증가로 저출산 추세 더 심화될 것
가부장제의 약화 과정에서 현대적인 성 역할 분리가 만들어진 것은 핵가족에 긴장을 초래했다. 여성들은 교육, 노동시장 참여, 경제적 소유 등 여러 가지 기회와 권리로부터 배제되기 쉬웠는데, 여성이라는 성에 적합한 역할이 가족 내 가사와 돌봄이라는 핵가족 규범 때문이었다.
21세기 첫 20년 동안 한국 가족이 겪은 변화는 20세기 동안의 핵가족화를 진척시킨 측면과 그것의 한계를 넘어서는 측면을 모두 보여주고 있다. 한국인들은 신체적·경제적 부양만이 가족이 제공해야 할 기능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정서적인 만족을 중요시하게 됨에 따라 부부 사이, 부모·자녀 사이의 관계는 수평적인 의사소통에 의존하는 관계로 변화하고 있다. 핵가족이 점차 부모를 비롯한 친족의 간섭과 통제로부터 자율성을 얻어왔듯이, 이제 개인들은 가족 내에서 자율성을 확보하고자 한다.
이와 더불어 이상적인 부부상도 변화하고 있다. 최근 청년 세대 대상의 사회조사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것은 성별에 따른 역할분리형 부부가 아닌, ‘함께 일하고 함께 기르는’ 협력적 부부상에 대한 지지다. 미래 가족의 주인공이 될 청년 세대는 개인의 다층적인 필요를 충족하고 잠재력을 실현하는 데 도움이 되는 관계로서 가족을 상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이상적인 가족상은 최근 20년간 인구학적 변화가 보여주는 것과 상당한 거리가 있다. 통계청의 2020년 ‘인구주택총조사’ 결과, 30대 남성 50.8%, 여성 33.6%가 결혼하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그림 참고). 비혼의 급격한 확산은 결혼해도 출산하지 않는 커플의 증가와 함께 저출산 추세가 더 심화될 것임을 보여주고 있다.
아울러 비혼, 이혼, 인구고령화 등에 따라 모든 생애단계에서 1인가구의 비중이 크게 늘어났다. 결혼하지 않는 비혼자가 증가할 것이며, 생애의 한 시점에 결혼을 하고 자녀를 갖는다고 하더라도 부부와 미혼자녀로 이뤄진 핵가족으로 사는 기간은 생애의 일부분만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한편으로 이러한 인구학적 변화는 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현실적인 조건이 마련돼 있지 못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래 생애를 기획할 수 있는 안정된 소득과 소속을 제공하는 일자리는 축소돼 왔다. 이로써 결혼 진입이 늦어지거나 포기되고 경제적 사유에 따른 이혼과 별거 등이 늘면서 1인가구의 비중이 커진 측면도 있다.
또한 여성의 취업과 소득에 대한 사회적 요구는 커졌지만, 남녀 모두 일과 자녀 양육을 병행할 수 있도록 지원하는 제도의 발전은 더딘 상황이다. 개인이 처한 현실적인 상황이 가족생활을 위축시키고 혼자 사는 인구의 확산을 초래하고 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가족 형태 기반의 낡은 법·제도 개선 서둘러야
그러나 가족에 대한 가치관의 변화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 가족 형성과 유지에 유의하지 않는 사회적·경제적 현실이 개선된다고 해서 과거의 가족으로 되돌아갈 수 있을 것으로 보이지 않기 때문이다. 남성 단독부양에서 공동부양으로의 전환은 더 이상 가족의 존재가치를 경제적 부양에서 찾기 어렵게 되고 있음을 의미한다. 장기적인 애정적 관계로서의 가족, 시장이 완전히 대체할 수 없는 돌봄관계로서의 가족이 기대되고 있는 가족의 모습이라면, 이러한 기대를 지원하는 제도를 마련해야 한다.
혈연과 법률혼으로 이뤄진 관계만을 가족으로 간주하고 지원하는 정책을 탈피해야 한다는 주장이 오랫동안 제기돼 왔다. 다양한 가족의 상황을 무시한 채, 개인의 기본적인 욕구와 권리를 가족단위로 보장하는 정책의 한계도 드러나고 있다.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가족 형태의 모형을 기반으로 만들어진 낡은 법·제도의 개선을 서둘러야 할 것이다. 이에 한 발 더 나아가 아직 오지 않은 가족의 출현에 개방적인 정책이 요구되는 상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