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0년대 초 공산권이 붕괴되면서 글로벌 경제통합의 세계적인 지각변동이 일어났다. 한국에서도 개발연대 경제구조가 해체되는 전기를 맞게 됐다. 우선, 개발연대의 고도성장을 가져왔던 가장 근원적 요인은 농촌에서 도시로 유입되던 저임금 노동력이었는데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고갈되기 시작했다. 1980년대까지 급속히 그리고 지속적으로 증가하던 도시화율이 1990년대부터 낮아지는 추세로 돌아선 것이다.
1990년대 들어 저임금 노동력, 냉전 시대 수혜 등
그간의 고도성장 요인 동시다발적으로 무너져
둘째, 냉전체제 종식도 한국경제에 시련을 안겼다. 개발연대에는 경제력이 취약한 한국이 자유 진영의 최일선에서 공산 진영과 맞서 싸우고 있었으므로 서방 선진국들의 각별한 배려를 받을 수 있었다. 한국산 제품에 우호적으로 시장을 개방해 준 것은 물론 산업정책의 명목으로 시행되던 우리 정부의 각종 보호와 지원 조치들도 상당 부분 눈감아 줬다. 산업화에 필요한 기술이전에도 관대했다. 심지어 1980년대 초 외채를 갚기 어려워지자 미국과 일본 정부가 나서서 구제금융을 주선해 줄 정도였다. 그러나 1990년대 초 냉전 종식과 함께 한국에 대한 배려도 사라졌다.
마지막으로, 선진국의 기술 및 핵심부품에 의존하는 기업들의 외부화 전략이 작동하지 않는 가운데 과도한 투자가 부담으로 작용했다. 1990년대 이전까지 고도성장을 이끈 또 다른 숨은 주역은 미래를 지향하며 선제적 투자를 한 기업들이었다. 산업구조를 하루속히 선진국 수준으로 끌어올리려던 한국에서는 현재의 저부가 산업에 안주하지 않고 부가가치가 보다 높은 산업으로 전환하고자 의도적이고 공격적인 투자를 감행하곤 했다. 당시의 낮은 기술 수준으로는 필요한 기술과 핵심부품을 자체 조달하기 어려워 선진국에 의존하는 외부화 전략을 택했다. 다만 저부가 제품의 수출로 벌어들인 재원을 선제적 투자에 모두 쏟아부어도 고액의 기술과 부품 수입 비용을 충당하기엔 부족했다. 그 결과 만성적인 경상수지 적자와 해외 차입이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 선진국 기업으로서는 쓸모가 없어진 구식 기술과 부품을 한국 기업이 사겠다는데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에 한국의 외부조달 전략에 일조했다. 이러한 전략과 선제적 투자로 한국의 산업구조는 신속히 고도화될 수 있었다.
그러나 1990년대에 이르러 사정이 달라졌다. 한국 산업이 선진국 못지않게 발전했기 때문이다. 한국 기업들이 원하는 기술과 부품·설비는 선진국 기업들도 장차 시장에 출시하려는 첨단 제품들이었다. 그에 따라 해외 기업들은 기술이전을 거부하거나 부품·설비 등에서 앞으로 거두게 될 수익까지 얹은 높은 가격을 요구했다.
만일 순수하게 경제 논리만을 따른다면 이러한 경우 기업들은투자 부담이 커져 투자 속도를 늦추려 할 것이고 그 결과 경제성장률이 낮아지게 될 것이다. 그러나 고도성장을 당연시하던 당시 사회 분위기에서는 이를 용납하지 않았다. 약간의 성장둔화 조짐만보여도 경제운용에 큰 잘못이 있는 것처럼 정부와 기업을 몰아붙였다. 따라서 기업들은 투자 부담을 감내하면서까지 무리하게 투자함으로써 높은 성장을 유지할 수밖에 없었다. 그 결과 기업들의 투자 비용은 감당하기 어려운 수준으로 치솟았다.
실제로 1990년대 GDP 대비 투자 비중을 보면 투자가 과도했다고 평가를 받는 1970년대 중화학 공업화 시기보다 더 높았다(<그림> 참고). 외형적으로는 원하던 수준의 높은 성장을 이뤘지만 기업들의 채산성은 악화돼 부채비율이 급증했고 해외지급이 증가하면서 외환보유고도 바닥을 보였다. 역설적으로 기아와 대우 등 투자에 열성적이었던 기업들부터 차례로 부도를 맞게 됐다. 한국경제의 움직임이 비정상적임을 눈치챈 외국자본은 기왕의 투자를 회수했고 추가 대출을 거부했다. 이로써 자금경색이 일어나며 1997년 외환위기가 발생했다.
외환위기 이후 저부가형 생산을 중국 등 해외로 이전하고
내부 R&D 강화해 혁신형 기업구조로 변화
IMF를 비롯한 외국 금융기관들은 과거와 같은 ‘각별한’ 지원 없이 철저한 국제금융 처리 절차에 따라 한국의 외환위기에 대처했다. 돌이켜 보면 그 당시에 세계경제의 지각변동을 정확히 읽으면서 과욕을 버리고 변화된 현실을 겸허히 받아들여 우리 경제의 연착륙을 위한 대처방안을 마련했더라면 외환위기라는 엄청난 희생을 겪지 않을 수도 있었을 것이다.
외환위기를 계기로 한국경제는 개발연대의 성장 방식을 버리고 시장경제에 충실한 안정적 성장 방식을 받아들이며 재탄생했다. 위기 수습 후 정부와 기업이 가장 먼저 착수한 조치는 과도한 부채비율을 대폭 축소하는 것이었다. 부채비율을 낮추려면 과거와 같은 과도한 투자는 줄여야 했다. 이를 산업 부문 입장에서 해석한다면 차세대 산업으로의 구조 전환을 무리하게 앞당기려는 선제적 투자를 지양하고 기업 역량이 허용하는 범위에서 투자하는 것이다. 위기 이후 사회적 분위기도 성장보다 안정이 불가피하다는 입장에 동조하는 방향으로 흘러갔다. 1990년대 초에 추진됐어야 했던 경제운용 기조가 외환위기라는 커다란 고통을 겪고 나서야 비로소 정착된 것이었다.
외환위기 이후 기업들에서 가장 크게 달라진 것은 투자 형태의 변화였다. 과거와 같은 생산력 확장과 기술지식의 외부조달 전략에서 벗어나 신제품 개발을 위한 내부 기술개발(R&D) 강화로 바뀐 것이다. 어찌 보면 이는 선진국 수준으로 올라선 한국 기업에 지극히 당연한 변화였다. 기업들의 자체 R&D는 해외기술을 도입하는 것보다 비용이 적게 들 뿐만 아니라 개발 성과가 기업 내부에 축적돼 차기 개발로 이어질 수 있는 기반이 되기도 한다. 이에 따라 외환위기 이후 GDP대비 R&D투자 비중은 1997년 2.2%에서 2023년 약 5%에 이르는 등 지속적으로 증가했다. 이른바 혁신형 기업구조로 바뀐 것이다.
한편 1990년대 초 시작된 저임금 인력의 고갈 문제는 해외생산으로 대처했다. 노동집약적인 저부가가치 생산은 해외로 이전하고 그 대신 국내에서는 R&D와 지식서비스에 집중했다. 때맞춰 진행된 중국의 산업화는 한국의 해외생산에 큰 힘이 됐다. 이에 따라 2010년대부터 한국도 선진국들과 마찬가지로 국내에서 산출된 총생산(GDP)보다 해외 소득을 포함해 자국민이 벌어들인 총소득인 국민총소득(GNI)이 더 높아진 구조로 바뀌었다. 기업들의 기술지식 창출 활동이 내부화됨에 따라 그에 종사하는 인력의 지적 역량에 대한 요구도 높아졌다. 그 과정에서 한국 교육의 부실함이 드러나 한때 조기유학 열풍이라는 사회적 기현상이 일어나기도 했다.
외환위기는 우리 사회가 달라진 경제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희망 사항을 고집하며 빚어진 참사였다. 그리고 비록 뒤늦었지만, 우리의 문제를 제대로 파악함으로써 경제를 다시 성장과 안정의 반석 위에 올려놓을 수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