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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 안에 ‘애니’가 들어갈 수 있을까?
오성윤 <마당을 나온 암탉>, <길 위의 뭉치> 감독 2025년 11월호
지난 30여 년간 해마다 방학 성수기면 미국, 일본 애니메이션 영화가 우리 극장가를 점령해 관객들의 눈과 마음을 사로잡으며 그들만의 리그를 벌이고 있다. 한국 애니메이션 제작사들은 꾸준히 그 틈바구니를 비집고 들어가려 하지만 버거워 보인다. 

해마다 몇 편의 한국 애니메이션 영화가 나타났다가 큰 의미 없이 사라지고 그 침체기가 길어질 때쯤이면 깜짝 흥행작이 나와 다시 희망의 끈을 부여잡게 한다. 10여 년 전 <마당을 나온 암탉>이 그랬고 최근에는 <킹 오브 킹스>와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거론되고 있다. 과연 이들이 새삼 한국 애니메이션을 부활시키고 새로운 지평으로 이끌 수 있을까? 

그간의 경험에 비춰볼 때 이는 보편과 상호관계를 이루는 특수라기보다는 특수 자체에 머무르는 현상으로 보인다. 세 작품 모두 한국 창작애니메이션의 지평에서부터 올라와 ‘원 오브 뎀(one of them)’이 되는 문화적 현상의 산물이라기보다, 몇몇 개인의 신념과 불굴의 의지 그리고 다른 몇몇의 선한 의지가 만나 이뤄낸 ‘온니 원(only one)’의 결과로 보이기 때문이다. 혁신적인 결과물 하나가 모멘텀이 돼 문화적 현상으로 확산하려면 그만큼 다양한 인적 인프라, 문화적 성숙과 숙련, 그리고 회의론을 극복할 수 있을 정도로 다양한 유형의 증거가 형성하는 기반 위에서 결과물이 나와야 하는데, 세 작품의 기획과 제작 과정, 시스템을 보면 이런 조건에 부합하지는 못하는 것 같다. 

하청업으로 이룬 잉여가치가 창작에 재투자되지 않아 산업 정체,
영유아 애니 흥행하며 발전했지만 장르 다양성 저해 부작용도


한국 창작애니메이션 영화의 깜짝 성공과 반복되는 실패 문제는 지난 세월 그래온 것처럼 성공한 한두 작품을 표피적으로 학습해 단기 목표를 설정하고 그에 걸맞은 개선책을 몇 개 내놓는다고 해서 단박에 극복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거리를 두고 우리 현실을 객관적으로 조망해 본질적인 문제에서부터 총체적인 문제까지 진단하며 근본적인 체질 개선을 해야 하는, 긴 호흡이 필요한 일이다. 

한국 애니메이션 발전은 오랜 하청업의 기반 위에서 제작의 물적·인적 토대가 마련됐지만, 하청업으로 이룬 잉여가치가 창작애니메이션으로 재투자되지 않아 창작과 제작의 선순환구조를 이룰 기회를 놓치면서 정체되고 말았다. 지금도 별로 나아지진 않았지만 당시는 창작에도 연구개발(R&D) 투자가 필요하다는 걸 모르던 창작 문맹의 시기이기도 했다. 

2000년대엔 한국 창작애니메이션의 비약적인 발전을 이끈 영유아 애니메이션들이 산업의 토대를 만들었지만, 대다수 작품이 영유아용으로 제작되며 시장 주류 콘텐츠로 자리 잡아 도리어 다양한 장르의 확산을 저해하는 역효과를 낳았다. 수용자의 인구구조는 항아리의 아랫 부분인 영유아 부문이 비대하게 퍼져 있고 위로 올라가면서 급격히 길다랗고 가녀린 목을 가진 기형적 병목구조를 보였고, 그렇게 한국 애니메이션 업계가 구조화됐다. 그 결과 영유아 애니메이션을 졸업한 초등학생부터 청소년, 청년, 장년층에 이르는 애니메이션 소구층 절대다수는 동화적 판타지를 넘어 끝없이 변화·발전하고 진보하는 미국, 일본 애니메이션을 탐닉하게 됐다. 한국 소비자와 애니메이션의 수준 차는 점점 커지고 있다.

미국과 일본 애니메이션은 그들의 오랜 전통을 바탕에 두고 끝없이 새로운 트렌드를 만들어낼 뿐만 아니라, 쉼 없이 변화하는 세상의 패러다임에 맞춰 관객이 사는 세상을 사이에 두고 소통의 핵심 내용과 본질을 다양하게 탐구했고 새로운 이야기와 기술혁신으로 성공해 왔다. 반면 우리는 빨리 성취하려는 조급함에 당장의 성공작을 만드는 데 목맸고, 트렌드를 후행하는 작품들이 양산되며 눈높이가 높아진 우리 관객들에게 외면당했다. 



정부 지원으로 창작 애니 명맥 이어왔으나 
경제성 지향하는 문화산업정책은 창의성·다양성 약화시켜 


이런 문제를 야기한 근간 중 하나는 문화산업이라는 미명 아래 창작애니메이션을 지나치게 산업의 영역에 밀어넣고 성공의 가늠자를 경제적 부가가치를 창출하는 소비 종속적인 상품화에 두거나 수익·일자리 창출 같은 산업구조적 성과를 목표로 삼은 정부 정책 기조다. 문화산업 정책과 제도가 창작의 원천인 자율성과 창의성, 문화 다양성을 약화시키는 부작용을 낳았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많이 좋아지고 있지만 이제 확 좋아져야 한다.)

고맙고도 안타깝게도 악화되는 영화시장 투자구조 속에서 힘겹게 싸워나가는 한국 창작애니메이션의 명맥을 잇게 해주고 업계가 의지하고 기대온 것 역시 정부의 기획·제작 지원제도다. 그래서 한국 애니메이션 창작력 약화는 일부분 가스라이팅이라도 당한 듯 스스로 그에 발맞춰 따라간 우리 업계의 업보이기도 하다. 

이 문제를 진단하고 극복하기 위해 한국 영화의 성공사례를 정면교사(正面敎師)로 삼을 필요가 있다. 지원은 하되 간섭하지 않았던 시기부터 영화진흥위원회와 한국영화아카데미는 한국 영화가 성장하고 발전하는 과정에 주요한 역할을 했다. 젊은 영화인들과 ‘독립영화’의 가치, 가능성을 열어젖히고 제도권 영역으로 넘어가는 데 가교역할을 하며 한국 영화를 대표하는 감독들을 배출해 변화의 흐름을 성공적으로 이끌어냈다.

독립영화란 상업자본에 구애받지 않고 작가와 감독이 자유롭게 그들이 바라본 세상의 모습을 다양한 방식으로 보여주는 이야기다. 제도권 상업영화가 놓치거나 외면한 세상의 단면을 들여다보고, 더 나은 세상을 위해 외치는 크고 작은 제언들이다. 그런 예술가들은 기본적으로 남들과 다른 새로운 시선과 내용, 독창적이며 독특한 방식을 추구한 결과물을 내놓아 경쟁하게 된다. 이를 통해 관객은 미처 몰랐던 새로운 본질에 다가서는 신선한 충격과 통찰의 쾌감을 얻는다. 기존에 형성된 윤리적·논리적 트렌드에 지쳤던 관객은 이 새로움을 차곡차곡 가슴에 쌓아 집단본능으로 상호 공유하게 된다. 그렇게 독립영화의 새로운 가치는 문화 지평의 중심부로 이동해 주류로 확산되고 한 단계 지평을 끌어올린 후 자기 생명을 다하거나 거듭나기를 반복한다. 이런 방식으로 한국 영화는 자기정체성을 확보하고 발전해 현재에 이르렀다. (반복되는 혼란기를 겪고 있지만 결국 매체 역할의 본질을 되찾을 것이다.) 

한국 애니메이션 창작의 지평을 여는 길 역시 융복합, 글로벌시장 등에 있는 것이 아니다. 자유롭게 바라보고 상상하고 표현하며 문화 다양성의 가치를 태생적으로 추구하는 독립애니메이션의 활성화에 해답이 있다. 과거 애니메이션은 실사영화에 비해 기본적으로 제작비가 많이 들어 독립제작은 엄두도 내지 못했다. 그러나 이제 컴퓨터 애니메이션과 오픈소스 프로그램들, AI 애니메이션 제작기술의 발전으로 저예산 독립애니메이션 제작을 시도할 수 있는 상황이 코앞으로 성큼 다가왔다. 기술의 진보가 내용을 혁신할 수 있는 좋은 기회가 찾아온 것이다. 그럴 만한 창작 역량은 확보돼 있는가? 충분히 있다! 과거에도 있었고 현재에도 있으나 주목받지 못했고 양성화되지 못했을 뿐이다. 

한국만큼 애니메이션 전공이 흔한 나라도 많지 않을 것이다. 고등학교, 대학교, 아카데미 졸업작품들은 해가 갈수록 좋아지는 우상향 기세가 꺾이지 않는 걸 매년 확인할 수 있다. 창작자를 받아내고 성장시킬 화분이 없는 게 문제다. 이제 이들 모두를 향해 문을 활짝 열고 창작의 땅으로 초대해야 한다. 창의의 땅에서 자유롭게 교류하고 경쟁하고 지속해서 무언가를 만들어나간다면, 머지않아 그 속에서 우리의 특수가 만들어지고 보편과 상호관계를 맺으며 우리의 지평이 한 단계 더 올라가는 문화적 현상을 만들어낼 수 있을 것이다.

<케이팝 데몬 헌터스>가 연일 언론의 주목을 받는 사이 전 세계 크고 작은 애니메이션 영화제를 휩쓸고 다니는 한국 창작애니메이션이 있다. 김보솔 감독이 독립 단편 애니메이션 제작을 거쳐 한국영화아카데미 지원으로 만든 첫 독립 장편 애니메이션 <광장>이다. <광장>은 제도권 영화에서는 보기 힘든 모험적인 시선으로 세상과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작품으로, 애틋하게 바라보는 이의 쫄깃해진 심장 곁으로 다가와 희망적인 행복감마저 주는 특별히 아름다운 영화다. 내년에 개봉하는 작품이어서 아직 AI가 한국 애니메이션의 미래와 희망으로 분석하지는 못하는 데이터다. 

독립을 소원하신 김구 선생님이 주창한 문화강국론의 핵심은 행복론에 있다. 문화로 부력(富力)을 만들고 문화로 강력(.力)을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 아니고, 문화를 나와 남을 행복하게 해 세계 평화를 실현하는 핵심 도구로 본 것이다. 우리 문화가, 애니메이션이 부력과 강력의 도구로 치부되지 않길 바란다. 부력과 강력은 그 뒤에 제 발로 따라오게 해야 지속 발전할 수 있다. 흑백영화를 거쳐 오랜 기간 축적돼 K영화가 성취되지 않았는가! 조용필에 이어 서태지, 박진영을 거쳐 BTS가 탄생하며 K팝이 성취되지 않았는가? 현재의 ‘K○○’ 안에 ‘애니’를 욱여넣으려 애쓰지 말아야 한다. 창작의 기본 토대부터 다시 탄탄히 다져 미래 문화강국 애니가 되길 바란다. 그건 5년으로는 이룰 수 없는 꿈이다. “오직 한없이 갖고 싶은 것은 높은 창의의 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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