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서른 살이 되던 해 창업을 하기로 결심했다. 마침 코로나19 팬데믹으로 갑작스럽게 퇴사한 상황이었고, 또 마침 여행하며 글을 쓰던 여행 잡지 에디터라는 직업에 변화를 주고 싶었다. 구직 준비 중에 남동생이 무심코 던진 말이 훌륭한 기폭제가 됐다. “누나는 일을 좋아하고 열심히 하니까, 자기 일을 해봐.” 그 말을 듣는 순간 머릿속에서 종이 울렸다.
사실 하고 싶은 아이템은 딱 정해져 있었다. 고향인 강원도 원주에서 부모님이 하시는 방앗간의 대를 잇는 것. 깨를 가져오면 짜주고, 떡도 하고 고춧가루도 빻는 흔한 시골 방앗간. 조금 특별한 점이 있다면 방앗간에 진심인 엄마 ‘옥희’가 있었다.
엄마의 깨 볶는 기술 살려 기름 전문 방앗간 시작…
들깨 분양 프로젝트, 들깨밭 투어 등 로컬에서 문화를 만들다 한 번은 엄마가 방앗간에서 일하는 모습을 종일 관찰한 적이 있다. 무거운 깨 대야를 수십 번 들었다 놓기를 반복하고, 머리부터 발끝까지 기름에 절어야 퇴근하는 고된 일. 그럼에도 엄마는 직업 만족도가 최상이라고 말했다. “방앗간 일은 거친 일이지만 자부심을 느껴. 할머니들이 고생스럽게 농사지은 깨로 정성껏 기름을 짜면 1년 내내 얼마나 기쁘게 드시겠니. 나는 그게 행복해.” 선택의 기로에 선 그때, 엄마의 한마디로 방앗간을 창업할 결심을 굳혔다. 아직은 알쏭달쏭한 그 감정, 방앗간이 주는 행복이 무엇인지 궁금해졌다.
방앗간 창업은 처음부터 쉽지 않았다. 뜬금없이 방앗간을 하러 고향으로 내려온다고 하니 부모님은 크게 반대하셨다. 무엇보다 익숙한 방식을 내려놓고 자식과 함께 일해야 하는 상황에 큰 부담을 느끼신 듯했다. 하지만 앞으로 좀 더 오래 방앗간 일을 하기 위해서는 변화가 필요했고, 긴 설득 끝에 부모님은 기존 방앗간을 접고 새로운 도전에 합류하게 됐다. 방앗간을 새로 갖추며 가장 중요하게 고려한 부분은 바로 선택과 집중. 방앗간 일 중에 여러 가지를 덜어내고 우리가 가장 잘할 수 있는 일에 집중했다. 엄마의 방앗간은 원주에서 손꼽힐 만큼 깻묵이 많이 나왔는데, 이는 깨 볶는 경험이 그만큼 풍부하다는 방증이었다. 그럴게 엄마가 가장 자신 있는 깨 볶는 기술을 살려 자연스럽게 기름을 전문으로 하는 ‘깨 로스터리 옥희방앗간’을 시작하게 됐다.
누구나 위대한 야망을 품고 로컬창업을 시작하진 않는다. 특히나 처음 창업을 했다면 자신이 왜 이 일을 하고 있는지조차 잘 모를 때가 많다. 그저 마음 가는 대로 실행해 보는 것뿐. 옥희방앗간을 운영하던 1~2년 차가 그랬던 것 같다. 나름 기획 일을 하던 사람이니 평범한 방앗간처럼 운영하고 싶진 않았다. 그래서 방앗간을 통해 하고 싶은 기획은 모두 해본 것 같다. 1가정 1들깨 분양 파티를 여는 들깨 분양 프로젝트, 지역 아티스트와 함께 들깨 추수를 주제로 한 미디어 아트 전시, 참깨꽃을 탐구하는 워크숍, 들깨밭 투어 등등. 기름을 팔지만 엉뚱한 일을 더 많이 벌이는 방앗간. 사실상 지역으로 돌아와 선택한 일에서 의미를 찾고자 하는 여정이었다. 다행히 로컬에서는 이를 문화를 만드는 일로 받아들여 줬고, 다정한 이웃들은 이러한 초보 창업자의 엉뚱한 시도들에 기꺼이 동참해 줬다. 그때 배운 것이 있다. 선택한 일을 어떤 태도로 해내느냐에 따라 결과가 달라진다는 것. 진정한 의미는 일의 크기가 아니라 태도에서 자라났다.
생명력 강한 들깨처럼 지속 가능한 방앗간을 만드는 것이 목표…
들기름 드레싱 등 우리 깨를 새롭게 즐길 수 있는 신제품 개발 중 3년 차가 되니 드디어 하는 일을 정의할 수 있게 됐다. “우리는 로컬 크리에이터 또는 로컬 창업가구나.” 로컬에서 뭔가 하는데, 소상공인으로 함축하기엔 모호했던 것이 명료한 단어로 세상 속에 튀어나왔다. 성장과 동시에 고민도 늘어났다. 우리는 로컬에서 어떤 역할을 해야 할까? 어떤 방앗간이 돼야 할까? 3년 차에는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질문하며 다시 방향키를 잡았다.
“들깨 모는 석 달 열흘 가뭄에도 침 세 번만 뱉고 심어도 산다”라는 말이 있다. 이처럼 들깨는 생명력이 강해 아무 데서나 잘 자라고, 구태여 가꾸지 않아도 여름 한 철 깻잎을 무한히 제공한다. 예부터 강원 지역은 들깨를 많이 먹었는데, 산지에서는 아열대 작물인 참깨보다 들깨 농사가 적합했기 때문이다. 들깨는 6월 중순쯤에 심어 감자나 옥수수 다음으로 이모작이 가능하고, 또한 밭 가장자리에 둘러 심으면 특유의 향취로 산짐승을 쫓는 역할도 한다. 허기를 채워줄 양식거리는 아니지만 잎부터 씨앗까지 버릴 것 하나 없는 유용한 작물이다. 그러고 보니 생명력이 강한 들깨는 척박한 땅을 일구며 살아온 강원도 사람들과도 닮은 구석이 있다.
생명력 강한 들깨처럼 지속 가능한 방앗간을 만들겠다는 목표가 생겼다. 작은 마을마다 자리했던 방앗간은 매년 폐업이 속출하는 하락세에 있는 업종이다. 매년 역대급 폭우가 쏟아지는 이상기후로 깨 농사는 더더욱 힘들 것으로 전망된다. 언젠가 식탁 위에 우리 들기름, 참기름이 사라지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그렇기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에 집중하기로 했다. 방앗간을 통해 들깨에 대한 다양한 경험을 공유하고, 우리 깨에 대한 관심을 끌 수 있는 재미난 일을 벌이는 우리만의 방식으로 말이다. 깨 로스팅을 세분화해 취향과 요리에 따라 골라 사용하는 로스터리 들기름과 참기름을 선보이고 들깨 쿠키, 들기름 드레싱 등 우리 깨를 새롭게 즐길 수 있는 신제품을 꾸준히 개발 중이다. 지난해에는 테이블 3개만 놓고 운영하던 카페를 2층까지 확장함으로써 들깨를 활용한 다채로운 미식과 경험을 선사했다. 나아가 한국의 식문화에 관심이 많은 관광객들이 우리 기름과 깨를 경험하기 위해 원주 옥희방앗간을 찾을 수 있도록 로컬 앵커스토어(anchor store)로 거듭나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2026년 최대의 화두는 역시 생존이다. 코로나19 팬데믹을 거치며 라이프스타일은 송두리째 바뀌었다. 고물가 장기화는 소비자의 지갑을 굳게 닫았고, 로컬 또한 생존 위기 속에서 속절없이 흔들리고 있다. 어쩌면 ‘로컬’이라는 말이 유행처럼 소비되던 시절이 지나가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창업 5년 차가 된 지금, 나는 여전히 로컬에 뿌리를 깊숙이 내리고 더 멀리 뻗어나갈 준비를 하고 있다. 지역에서 배운 느리지만 단단한 성장 방식으로. 로컬이란 울타리를 넘어 고객이 있는 곳이면 어디든 찾아가고, 시야를 넓혀 세계로 향하고자 한다.
이제 새로운 방식의 로컬을 다시 써야 할 때다. 강한 생명력으로 자라는 들깨처럼 작은 로컬 브랜드 옥희방앗간의 이야기가 세계인의 식탁에 오르기를 꿈꿔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