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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에서 시작된 하이퍼로컬이 국경을 넘는다면
이옥수 원더러스트 대표 2026년 03월호
동네는 언제 사라지는가. 사람이 떠나서가 아니라 기억되지 않을 때 사라진다. 지도에는 남아 있지만, 더는 이야기되지 않는 장소는 장소로서의 기능을 잃는다.

나는 오랫동안 고향인 청주를 떠나 국내 다른 지역과 해외에서 생활했다. 라오스와 태국에서의 생활을 마무리하고 다시 해외로 나갈 준비를 하던 30대 초반의 어느 시기, 잠시 머무를 생각으로 청주에 돌아왔다. 머물기로 예정된 기간이 길지 않았는데, 그 사이 계속 마음에 걸리는 것이 하나 있었다. 이 도시를 기억하게 할 만한 게 없다는 것. 

이상하다고 느꼈다. 내가 기억하는 고향은 분명 빛나는 장소였기 때문이다. 말레이시아 말라카, 태국 치앙마이, 라오스 팍세 등 해외에서 지내며 경험한 여러 소도시와 동네들이 자연스럽게 떠올랐다. 그곳에는 동네의 이름을 딴 잡지와 지도, 골목의 이야기를 담은 엽서와 포스터, 그리고 그 장소에서만 가능한 여행 프로그램들이 존재했다. 그것은 관광객을 끌어들이기 위한 장치라기보다 그곳의 삶과 기억을 조용히 공유하는 ‘언어’에 가까웠다. 이런 동네에서 여행자는 소비자가 아니라 잠시 머무는 관찰자이자 기록자 그리고 창작자가 됐다. 

기억하지 않으면 동네는 사라진다… 
동네 굿즈 제작에서 시작해 지역 기반 문화 콘텐츠 전문 기업으로

그렇다면 왜 우리 동네에는 이런 언어가 없을까. 사람들은 지역이 별 볼 일 없고 매력이 없다고들 했다. 동의하기 어려웠다. 지역의 문제는 매력이 아니라 지역에 관한 기억을 다루는 방식에 있다. 기억은 흩어져 있었고, 기록은 축적되지 않았으며, 그것을 감각적인 콘텐츠와 산업의 언어로 번역하려는 시도 역시 드물었다. 그렇게 오래된 동네와 낡은 골목을 기억하는 사람이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이 지점에서 ‘지역’이라는 단어보다 ‘동네’라는 말이 더 정확하게 다가왔다. 행정구역이나 정책 단위가 아니라 내가 실제로 걸어 다녔고 생활했고 시간을 보냈던 구체적인 장소들. 동네는 개인의 기억이 가장 밀도 높게 쌓이는 공간인 동시에 가장 쉽게 사라지는 공간이기도 하다. 기록하지 않으면 남지 않는다. 나는 이 동네의 기억을 붙잡아 보기로 했다. 그 선택이 이후 내가 해온 모든 시도의 출발점이 됐다.

어릴 적부터 기록하고 수집하는 일을 좋아했다. 여행지에서 흔히 버려질 법한 인쇄물, 동네의 오래된 간판, 사라질 듯한 골목의 풍경, 사람들의 사소한 말과 기억들. 이런 것들은 보통 콘텐츠의 재료로 인식되지 않지만, 시간이 쌓이면 장소의 정체성을 가장 정확하게 드러내는 단서가 된다. 뉴욕의 길거리에서 수집한 쓰레기를 투명한 아크릴 상자에 담아 판매하는 디자이너 저스틴 지냑의 ‘NYC Garbage’처럼 누군가에게는 볼품없어 보이는 것이 누군가에게는 그곳을 기억하는 매개로 작동하기도 한다.

창업 초기부터 여행 프로그램을 기획하고 운영했던 것은 아니다. 처음에는 그저 우리 동네가 좋아서 동네를 모티프로 한 굿즈를 수없이 기획하고 만들었다. 청주를 가로지르는 무심천에는 크고 작은 다리가 있고 그 다리마다 유속, 유량, 수온이 달라 사는 물고기가 다른데, 그것이 너무 흥미로워서 다리마다 사는 물고기를 조사하고 굿즈를 만들었다. 물론 팔리지 않았다. 청주시와 충주시를 구분하지 못하는 사람이 태반인데 청주, 그것도 무심천에 사는 물고기에 관심 있는 사람이 세상에 나 말고 또 있을까 싶었다.

그래서 반대로 생각했다. 청주로 여행 오는 사람을 위한 여행  콘텐츠가 아니라 청주를 선택할 수밖에 없는 매력적인 여행 콘텐츠를 만들자고. 우리가 제공하는 여행은 체험하고 끝나는 프로그램이 아니다. 동네를 걷고, 바라보고, 쓰면서 여행의 결과물을 하나의 콘텐츠로 엮어내는 과정이다. 여행의 결과는 반드시 기록으로 남아야 했고, 그 기록은 시나 소설, 사진집과 전시회가 되기도 했으며, 때로는 향수와 그림, 보드게임, 굿즈가 됐다. 참가자는 단순한 여행자가 아니라 창작자가, 여행은 소비가 아니라 창작의 출발점이 됐다. 중요한 것은 ‘무엇을 만들었는가’가 아니라 ‘왜 그런 형태였는가’였다.

                             

보드게임은 지역의 이야기를 가장 자연스럽게 공유하는 방식이었고, 굿즈는 여행 이후에도 기억을 일상으로 가져오는 매개였으며, 책은 기록이 일회성으로 소모되지 않고 축적되도록 하는 장치였다. 서로 다른 콘텐츠들은 모두 같은 질문에서 출발했다. 동네에 대한 기억을 어떻게 남기고 오랜 시간이 흐른 뒤에도 어떻게 지속적인 힘을 갖게 할 것인가.

이 과정에서 지역 기반 문화 콘텐츠 기획 전문 기업으로서의 정체성이 형성됐다. 그러나 그 과정은 순탄하지 않았다. 지역 콘텐츠는 공공사업이나 일회성 프로젝트로 소비되기 쉬웠고, 실험적인 시도를 취미나 단순한 활동에 가깝게 평가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그럼에도 방향을 바꾸지는 않았다. 대신 질문을 더 분명히 했다. 지역 콘텐츠는 왜 항상 단기 성과를 요구받는가, 왜 기록과 축적의 가치는 쉽게 무시되는가. 이에 대한 답으로 우리는 콘텐츠를 일반적인 상품이 아니라 구조로 설계하려 했다. ‘여행’이 ‘기록’이 되고 그 ‘기록’이 ‘작품’으로 이어지는 흐름 안에서, 하나의 프로젝트가 끝이 아니라 다음 시도의 토대가 되도록 했다.

키르기즈공화국 작가들 초청해 동네 여행을 창작으로 연결… 
하이퍼로컬은 장소를 이해하는 일이자 규모 아닌 밀도의 문제

하이퍼로컬을 종종 작은 사업이나 소규모 창업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하이퍼로컬은 규모의 문제가 아니라 밀도의 문제다. 관계의 밀도, 기억의 축적, 그리고 역할의 재정의. 이것들이 겹칠수록 장소는 배경이 아니라 창작의 원천이 된다.

과연 이 방식이 동네와 골목을 넘어 다른 맥락에서도 작동할 수 있을까. 그에 대한 답으로 우리는 해외 창작자를 대상으로 한 레지던시 프로그램을 내놓았다. 이 프로그램은 단순한 초청이나 교류 사업이 아니다. 키르기즈공화국의 작가들을 한국으로 초청해 100여 일간 여행하고 배우며 창작하게 했다. 작가들은 청주뿐 아니라 서울, 전주, 제주, 부산 등 한국 곳곳을 다니며 동네와 일상, 문화와 예술을 밀도 있게 탐구했다.

                               

이 여행은 한국의 단면을 보여주는 투어가 아니라 창작을 위한 여정이었다. 우리가 여행에서 참가자들에게 요구한 것은 단순했다. 천천히 보고, 기록하고, 나름의 방식으로 해석해 창작하는 것. 작가들은 시장을 걷고, 골목을 기록하고, 사람들의 생활을 관찰하며 한국에서 받은 영감과 자신들이 지닌 고유한 문화적 언어를 결합해 새로운 작품을 만들었다. 우리의 바람은 그대로 이뤄졌다. 여행과 창작은 계속됐고 그 결과는 전시로 이어졌다. 단순한 문화 교류가 아니라 문화가 이동하고 축적되며 다시 창작으로 환원되는 과정이었다. 다시 말해 동네에서 시작된 하이퍼로컬 방식이 국경을 넘어 작동한 사례였다. 

이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온다. 동네는 언제 사라지는가. 사람이 떠나서가 아니라 기억되지 않을 때 동네는 사라진다. 기억은 저절로 남지 않는다. 누군가 기록하고, 엮고, 다시 쓸 때 비로소 축적된다. 하이퍼로컬은 특정 장소에 머무는 전략이라기보다는 장소를 이해하고 창작으로 전환하는 하나의 사고방식이다. 동네에서 시작된 이 질문은 이제, 어디까지 확장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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