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한 비트의 음악과 화려한 조명 아래에서 달리는 사람들이 있다. 밖은 영하권의 쌀쌀한 날씨지만 실내 트랙은 뛰는 사람들의 열기로 가득하다. 마치 공연장을 떠올리게 하는 이곳은 다름 아닌 실내 마라톤 대회 ‘2026 인사이더런 W’ 현장이다. 유명 마라톤 대회의 형식을 따르기보다 러닝과 엔터테인먼트를 결합해 새로운 소비와 문화를 만들어가고 있는 류영호 러너블 대표를 만났다. 흥미롭게도 그는 러너블 설립 전까지 러닝을 즐기던 사람은 아니었다고 한다.
어떻게 러너블을 시작하게 됐나.
중앙그룹에서 오랫동안 공연·엔터테인먼트, 전시, 스포츠 등 다양한 분야의 사업을 맡아왔다. 코로나19 시기 사업부의 디지털 전환을 고민하던 때 러닝의 확장 가능성에 주목하게 됐고, 2021년 법인을 설립했다. 사실 그전까지 러닝을 해본 적도 없었지만 내가 러너냐 아니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이전에 중앙마라톤을 운영하면서 러닝시장을 가까이서 볼 기회가 있었는데, 이 시장이 확장성·성장성·사업성을 모두 갖추고 있다는 판단이 들었다. 시장성에 비해 뚜렷한 경쟁자가 보이지 않았고, 그래서 본격적으로 뛰어들었다.
많은 러닝 플랫폼들 중 러너블은 어떤 회사인가.
러너블은 마라톤 대회를 단순한 스포츠 이벤트가 아닌, 특별한 코스와 경험을 제공하는 하나의 브랜드 자산(IP; Intellectual Property)으로 기획·운영하는 회사다. 기존 대회가 일부 마니아 중심의 일회성 행사에 머물렀다면, 러너블은 대회를 지속적인 경험으로 넓혀 가치를 축적하는 구조를 만들고자 했다. 현재 ‘JTBC 서울마라톤’, ‘잠수교 10K 나이트런’ 등 15개 이상의 대회를 개최하며 35만 명 규모의 회원을 확보하고 있다. 콘텐츠(Contents)·커뮤니티(Community)·커머스(Commerce)를 결합한 3C 러닝 플랫폼으로 확장 중이다.
설립 후 5년 차에 접어들었다. 설립 당시 예상했던 것과 지금의 시장은 어떤 차이가 있나?
시장의 방향성은 예상했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지만, 성장 속도와 규모는 예상을 훨씬 뛰어넘고 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이 정도로 러닝 붐이 있을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다. 5년 전과 지금의 차이라면 당시만 해도 중장년 마니아들의 운동이었던 마라톤이 이젠MZ세대가 주도하는 ‘힙한’ 문화이자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았다는 것이다. 이에 따라 시장의 요구도 단순한 기록 측정에서 경험의 가치와 브랜딩으로 이동하고 있다.
기획했던 대회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대회는 무엇인가?
가장 최근에 개최한 ‘2026 인사이더런 W’다. 러닝 비즈니스의 가장 큰 한계인 계절성을 극복하기 위해 실내 공간에 주목했다. 컨벤션 센터를 활용해 러닝과 전시·박람회를 결합한 ‘공간 비즈니스’로 확장했다. 하루 한 번 달리는 마라톤과 달리 시간대별로 달릴 수 있고, 외부 경관을 즐길 수는 없지만 음악과 조명을 더해 마라톤의 형식을 새롭게 풀어냈다. 10K 달리기 외에 부스 전시도 둘러보고 각종 프로그램에 참여할 수 있게 했다. 그렇게 세계 최초의 실내 정규 마라톤이 탄생한 거다.
최근 새로운 러닝 대회가 빠르게 늘고 있는데, 실제로 대회를 기획하고 운영하는 과정 자체가 쉽지 않아 보인다. 현장에서 느끼는 어려움은 무엇인가.
마라톤 대회는 특히 안전 문제 때문에 사전 준비부터 현장 운영, 사후 관리까지 모든 과정이 정교하게 준비돼야 하는, 난도가 매우 높은 행사다. 지난해도 그렇고 폭발적인 러닝 수요로 마라톤 대회가 많이 생겨났지만 경험과 준비 부족 등으로 물품 보관이나 동선 통제같은 기본적인 운영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는 경우도 있더라. 다행히 우리는 다양한 대회 개최 경험을 통해 운영 노하우는 축적했지만, 그럼에도 새로운 대회를 기획하는 경우에는 어려움이 많다. 참가자들의 인지도가 부족해 초기 흥행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다. 실패를 비롯한 여러 경험과 노하우를 바탕으로 러너들에게 좋은 경험을 제공하려 노력해 온 결과 시장의 긍정적 반응을 얻을 수 있었다고 본다.
최근 러닝시장의 소비 트렌드는 어떤가?
초기 러닝 붐이 일던 시기에는 러닝화 품귀나 오픈런 현상처럼 제품 중심의 소비가 두드러졌지만, 최근에는 경험이 축적되고 정보가 확산되면서 무조건 비싸고 유명한 제품보다는 자신에게 맞는 가성비 중심의 소비로 변화하고 있다. 동시에 러너들은 단순한 ‘상품’보다 대회나 커뮤니티, 콘텐츠 등 ‘경험’에 더 적극적으로 지갑을 여는 것으로 보인다. 건강관리나 회복(리커버리)과 같은 웰니스 영역까지 소비가 확장되는 모습도 나타난다. 이제 더 이상 러닝은 운동이 아니라 라이프스타일로 자리 잡고 있다.
러닝 소비가 경험 중심으로 변화하고 있다는 점이 인상적이다. 이런 흐름에서 다양한 협업을 시도하고 있는데.
러닝시장 확장을 위해서는 금융과의 결합이 중요하다고 보고 꾸준히 협업을 추진해 왔다. 그 결과 지난해 카카오와 함께 결제 기능 없이 순수 혜택에 집중한 ‘카카오 러너스카드’를 출시했고, 올해는 상업자 표시 신용카드(PLCC; Private Label Credit Card) 형태의 ‘KB마라톤카드’도 선보였다. 카카오의 러너스카드는 현재 5만 명 이상이 가입했고 매주 수백 명씩 신규 가입자가 유입되고 있다. KB마라톤카드 역시 출시 일주일 만에 1천 명 이상이 발급받았다. 이는 이제 러닝이 단순한 취미를 넘어 금융서비스와 결합될 만큼 하나의 소비 생태계로 확장되고 있음을 보여준다.
러너블 앱을 보니 관련 용품을 살 수 있는 스토어 메뉴도 있더라.
지금까지는 상품 판매 기능이 좀 약했는데 올해는 러닝 중심의 버티컬 플랫폼(vertical platform) 전략으로 접근하려 한다. 특히 러너들의 소비가 장비에만 국한되지 않고 건강·웰니스·메디컬·회복·부상관리 등으로 넓게 이어지고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있다. 대회 운영과 고객조사를 통해 이런 소비 패턴을 지속적으로 확인해 왔고, 러너들의 실제 수요를 반영한 커머스를 구축해 나갈 계획이다. 최근에는 협업을 원하는 브랜드와 입점 문의도 늘고 있고, 카드 혜택과 결합해 가격 경쟁력을 확보하는 등 차별화 요소를 만들어갈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최근 스포츠와 여행을 결합한 ‘스포츠케이션’ 트렌드가 확산하고 있고, 러닝 역시 하나의 관광 콘텐츠로 부상하는 것 같다. 현장에서 체감하시나.
그렇다. 일찌감치 하나투어, 모두투어, 노랑풍선 등 국내 여행사들과 업무협약을 체결하고 다양한 ‘런트립’ 공동상품을 기획해 선보이고 있다. 해외 기관·기업과의 협업도 늘려나가는 중이다. 지난해엔 두바이관광청의 요청으로 ‘두바이 피트니스 챌린지’의 글로벌 프로모션을 위한 ‘두바이원정대’ 프로젝트를 진행했고, 마리아나관광청의 지원을 받아 ‘사이판 마라톤’ 런트립을 지난해부터 운영하고 있다. 올해 2월에는 일본의 러닝컴퍼니인 알비즈와 상품 및 문화교류, 공동 IP 기획을 위한 업무협약을 체결하는 등 다방면으로 런트립 수요에 대응하고 있다.
향후 러닝시장을 전망해 본다면?
러닝시장은 이미 큰 규모로 성장했지만, 성장세가 꺾인 것으로 보이진 않는다. 앞으로도 시장은 지속적으로 확대되는 동시에 성숙 단계로 진입할 것이라 본다. 단순히 인기 대회나 고가 제품을 좇기보다 자신의 수준과 취향에 맞는 선택을 하는 러너들이 늘 것이다. 관심사 역시 기록 향상에서 회복과 컨디션 관리로 이동하는 흐름을 보일 것으로 예상된다. 우리보다 앞서 러닝이 라이프스타일로 정착한 유럽이나 일본에서도 이 같은 패턴이 나타났다.
러너블의 비전과 향후 계획이 궁금하다.
러너블의 목표는 러닝과 엔터테인먼트를 결합한 새로운 방식의 러닝 경험을 제공하고 이를 통해 시장의 성장을 이끄는 것이다. 해외의 유명 대회를 추종하기보다 공간과 IP를 결합한 차별화된 러닝 콘텐츠를 통해 한국형 러닝(K-러닝) 모델을 만들고 싶다. ‘2026 인사이더런 W’를 시작으로 테마형 러닝, 공간 기반 러닝, 영화·캐릭터 IP와 결합한 콘텐츠형 러닝 등 다양한 시도를 이어갈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