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닝머신 위에서 30분을 버티겠는가, 아니면 360도 가상공간 속에서 15분간 온몸으로 뛰며 게임을 즐기겠는가? 눈앞의 벽을 향해 손을 뻗고, 바닥을 딛는 순간 공간이 반응한다. 이 짧은 15분이 러닝머신 위의 30분보다 더 많은 칼로리를 소모한다고 한다. 메타버스 열풍이 잦아든 이후에도 가상현실(VR) 기술의 가능성에 주목해 온 사람이 있다. 2016년 미디어아트로 시작해 가상현실과 게임, 스포츠산업으로까지 사업 영역을 확장해 온 정해현 뉴작 대표를 만났다.
뉴작은 어떤 회사인가?
프로젝션 맵핑(사물이나 공간 표면에 영상을 투사해 입체 효과를 구현하는 기술)과 AI 비전기술을 결합해 사용자가 별도의 장비 없이 실제 공간에서 몸을 움직이며 즐길 수 있는 체험형 확장현실(XR; eXtended Reality) 콘텐츠를 개발하는 기업이다. 눈으로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벽을 터치하고 바닥을 밟고 뛰는 등 신체 움직임에 실시간으로 반응하는 인터랙티브 콘텐츠를 만들고 있다.
창업 계기가 궁금하다.
미디어아트 분야 교수가 되는 게 꿈이어서 석·박사 과정을 마치고 대학에서 강의를 시작했다. 그런데 내 수업을 듣고 창업을 한 학생이 “교수님 덕분에 돈을 벌게 됐다”며 감사 인사를 전해왔다. 나 역시 도전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처음에는 아르떼뮤지엄(Arte Museum) 같은 몰입형 미디어아트 전시 분야로 시작했는데, 많은 기업이 이미 높은 수준에 올라와 있다는 걸 체감했다. 차별화 요소를 고민하던 중 한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한 번 보고 마는 전시가 아니라 반복적으로 찾아오게 만들 수 있는 건 뭘까?” 답은 ‘재미’였다. 그래서 가상현실에 게임 요소를 접목하기 시작했다.
스포츠산업으로는 어떻게 발을 들이게 됐나?
CES 2025에서 혁신상을 받은 후 예기치 못하게 스포츠산업과 접점을 갖게 됐다. 스포엑스(SPOEX)라는 전시회에서 우리 콘텐츠가 스포츠 콘텐츠로 보인다며 초청을 해왔다. 이용자들이 가상공간에서 직접 몸을 움직이며 땀 흘리는 활동이다 보니 이를 하나의 스포츠로 본 게 아닌가 싶다. 전시회에 참여해 보니 왜 우리 기술이 스포츠인지 알겠더라. 이를 계기로 XR 기술이 스포츠산업에서 충분히 경쟁력을 가질 수 있다는 확신이 들었고, 문화체육관광부 주관 스포츠산업 액셀러레이팅 프로그램에도 참여하게 됐다.
AR과 VR은 자주 들어봤는데, ‘XR’은 생소하다.
증강현실(AR)은 현실 위에 정보를 덧씌우는 기술, VR은 현실과 분리된 가상의 환경을 만드는 기술, 혼합현실(MR)은 현실과 가상이 상호작용하는 형태라 할 수 있다. XR은 이들 모두를 포괄하는 개념으로, 공간 기반의 경험을 확장하는 기술이라 보면 된다. VR 기술은 주로 헬멧 장착형 디스플레이(HMD)를 착용하거나 CAVE(Cave Automatic Virtual Environment)라는 공간형 시스템을 통해 구현된다. 우리는 이 두 방식을 결합해 개인이 장비 없이도 높은 몰입감을 구현할 수 있는 ‘비착용형 XR’ 기술을 독자적으로 개발해 왔고, 11건 이상의 국내외 특허를 보유하고 있다.
이 기술로 어떤 서비스를 구현했는지 소개한다면.
가장 기억에 남는 사례는 육군훈련소의 정신전력체험관 XR 훈련 콘텐츠다. 과거 강당에 모여 일방적으로 강의를 들어야 했던 교육을 가상현실 기반의 콘텐츠로 전환했다. 직접 체험하며 느끼는 교육으로 바뀌니 훈련병들의 반응도 확연히 달랐다. 하남정신건강복지센터와 협업해 힐링과 마음건강 콘텐츠를 공급하는 사업도 진행했다. 고양시 지효초엔 방과후 체험프로그램으로 AI 상상놀이터를 만들었다. 자체 서비스인 ‘퓨처그라운드’도 빼놓을 수 없다. 김포공항 롯데몰, 설악워터피아 등에서 운영 중인데, 이용자가 입장료를 내고 가상 줄넘기, 블록 옮기기 등 몸을 움직이며 XR 콘텐츠를 체험할 수 있는 공간이다. 국방과 사회복지, 교육 중심의 B2G 사업에 이어 B2C 영역으로도 진출한 거다.
스포츠 분야에서는 어떤 콘텐츠를 만들고 있나?
아마 누구든 러닝머신에서 한 번쯤 뛰어본 경험이 있을 텐데, 솔직히 지루했을 것이다. 우리 콘텐츠는 게임을 하듯 즐기는 사이에 러닝머신보다 훨씬 더 강도 높은 운동이 자연스럽게 이뤄진다. 이런 특성을 살려 기초체력 훈련을 위한 콘텐츠나 초·중·고 교육과정에 기반한 프로그램을 개발해 학교에 시범 도입하기도 했다. 이 외에도 축구나 야구처럼 특정 스포츠를 가상현실에서 체험하는 콘텐츠도 개발했다. 국내외 축구경기장에서 관심을 보여 협업 제안을 받기도 했다. 특히 경기가 없는 날 관람객을 끌어들일 수 있는 상시 운영형 콘텐츠에 대한 수요가 큰 것 같다.
XR 기술의 현재 위치는 어떤가?
예전 메타버스가 한창 주목받았을 때 과도한 기대감에 투자가 몰렸지만, 뚜렷한 수익모델이 보이지 않아 관심이 급격히 식었다. 그러다 보니 ‘가상현실’이라는 키워드에 보수적인 시선이 생긴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최근 분위기가 달라지고 있다. ‘기술 자체’가 아니라 ‘기술로 무엇을 할 수 있느냐’, 즉 실제 사업성과 연결할 수 있는 방향에 관심이 높아지고 있는 것 같다. 예상치 못한 분야에서 협업 제안이 들어오고 있다. 예를 들면 의료 분야에서는 재활 치료용 콘텐츠 개발에 대한 논의를 진행하고 있고, 해외 기관으로부터 항공·우주 시뮬레이션과 관련된 협업 문의도 받았다. 이 외에도 산업안전이나 K문화 수출 등 다양한 영역에서 활용 가능성에 대한 문의가 이어지고 있어 XR 기술의 수익화가 현실로 다가오고 있음을 체감한다.
향후 전망이 밝아 보인다.
그렇다. 특히 디지털 환경에 익숙한 세대가 주 소비층으로 자리 잡게 되면 XR 기술 확산세도 더욱 빨라질 것이다. 현재 성인 세대는 가상현실 기기를 사용할 때 멀미나 이질감을 느끼는 경우가 많지만, 어릴 때부터 디지털 환경에 노출된 세대는 이러한 장벽이 상대적으로 낮기 때문이다. 또한 앞으로는 국방이나 방산과 같은 새로운 영역으로의 확장 가능성도 충분해 보인다. 최근 전장에서 드론과 같은 기술의 중요성이 커지면서 이를 효과적으로 운용하기 위한 시뮬레이션 수요도 함께 증가하고 있다. 3D 게임 환경에 익숙한 젊은 세대는 유사한 인터페이스를 빠르게 습득하고 활용할 수 있는 강점이 있어 이 분야에서도 XR 기술과 콘텐츠에 대한 투자가 기대된다.
XR 기술 시장의 경쟁이 점차 심해질 것 같다.
아직은 시장을 완전히 선점한 플레이어가 뚜렷하지 않아 경쟁이 치열한 단계는 아니지만, 앞으로는 그럴 것 같다. 특허와 저작권을 통해 기술적 기반을 확보하는 한편, 무작정 콘텐츠 수를 늘리기보다는 교육과정에 충실하면서도 재미있고 완성도 높은 콘텐츠 개발에 집중하고 있다. 동시에 시장 확대를 위해 제품과 서비스 형태도 다양화하려 한다. 기존 비착용형 XR뿐 아니라 HMD 기반 콘텐츠까지 연계해 접근성을 높이고, 다양한 가격대로 서비스할 것이다. 장기적으로 콘텐츠 경쟁력이 핵심이 될 것으로 본다.
사업을 키워나가는 과정에서 맞닥뜨린 제약이나 어려움이 있다면.
회사를 키울 방법이 제한적이라는 것이다. 국내 투자 구조를 보면 창업 7년 차 이내 기업에 자금이 집중되는 경향이 있어 그 이후 단계에 들어서면 지원과 투자가 급격히 줄어든다. 특히 7년 차 이상 기업은 시리즈 A 투자로 넘어가야 하는데, 그 규모가 크다 보니 기존 투자 이력이 없는 기업에는 기회가 쉽게 주어지지 않는다. 현장에서도 직접 투자보다는 개념 검증 방식(PoC)의 제안이 많다. 그런데 해외에서는 반응이 다르더라. CES 혁신상을 두 해 연속 수상한 이후 일본의 대형 전자·엔터테인먼트 기업을 비롯해 유럽의 피트니스 프랜차이즈, 미국의 부동산 관련 단체 등 다양한 분야에서 협업 제안을 받았다. XR 기술이 실제 비즈니스로 연결되고 수익을 낼 수 있다는 가능성과 잠재력을 인정받는 분위기다. 해외에서 먼저 성과를 만든 후에 국내로 돌아오는 방향도 고민하고 있다.
앞으로의 목표나 계획이 궁금하다.
창업할 때 세 가지 목표를 세웠다. CES 혁신상 수상, 오스트리아 아르스 일렉트로니카 전시 참여, 그리고 자체 매장 운영이다. 창업 멤버들에게 3년 안에 이루겠다고 했었는데 10년이나 걸렸다(웃음). 이젠 사업 성과를 만들어내는 단계로 넘어가야겠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무엇보다 실질적인 수익 구조를 만들고 싶다. 단기적으로는 연간 30억 원 이상의 순수익을 만들고, 장기적으로는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다. 특히 XR 기술을 접목해 신체장애뿐 아니라 정신장애를 겪는 사람들을 위한 재활·치료 콘텐츠를 개발하는 것이 궁극적인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