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1월 15일 화상으로 개최된 제4차 역내포괄적경제동반자협정(RCEP) 정상회의에서 RCEP이 최종 서명됐다. 지난 8년간의 길고 긴 협상이 마침내 마무리된 것이다. 지난 2년간 RCEP 협상을 담당하면서 15개국 간 협정문 문구 하나, 토씨 하나를 일일이 합의하는 과정이 얼마나 어려웠는지 잘 알기에, “역사적인 순간입니다”로 시작한 대통령의 정상회의 말씀이 누구보다 가슴에 와닿았던 순간이었다.
2012년 협상 개시 선언 후 8년 만에 이룬 성과
RCEP은 개방형 통상국가를 지향하는 우리나라에 여러 가지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우선 전 세계 인구, GDP, 무역규모의 3분의 1을 차지하는 세계 최대 규모의 FTA이기 때문에 코로나19 등으로 불확실성이 증대되는 상황에서 우리 수출과 경제에 큰 활력을 줄 것으로 예상된다. 아울러 발효된 지 13년이나 지난 한아세안 FTA가 대폭 개선됨으로써 아세안과의 교류·협력이 한층 강화되고 신남방정책도 더욱 가속화될 것으로 보인다. 또한 역내에 통일된 무역규범이 마련돼 원산지, 투자, 지식재산권(이하 지재권), 무역구제, 무역기술장벽(TBT) 등에서 우리 기업의 편의도 제고됐다.
여담이지만 RCEP이 세계 최대의 FTA라는 것은 이미 널리 알려졌으나 여러 측면에서 우리에게 ‘최초’의 FTA라는 점은 잘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RCEP은 첫째,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우리가 서명한 최초의 FTA이고 둘째, 우리 FTA 사상 최초로 화상회의를 통해 서명을 진행했으며 셋째, 한아세안 및 한EU FTA가 양자 FTA 성격이 큰 점을 고려했을 때 사실상 우리가 체결하는 최초의 다자·메가 FTA다.
RCEP은 1990년대 말에 시작된 동아시아 경제통합 논의 결과의 일환으로, 아세안 회원국 그리고 아세안과 FTA를 체결한 6개국(한국, 일본, 중국, 인도, 호주, 뉴질랜드) 간 광범위하고 높은 수준의 역내 자유무역지대를 창설하기 위해 협상이 시작됐다. 2012년 11월 협상 개시 선언, 2013년 5월 첫 협상 시작 이후 모두 31차례의 공식협상, 19차례의 장관회의 등이 개최됐고 비공식 협상 등을 합치면 훨씬 더 많은 회의가 열렸다. 8년이라는 긴 협상 기간이 말해주는 것처럼 협상 과정은 순탄치만은 않았다. 최빈개도국부터 선진국까지 다양한 국가가 참여하고 있고, 정치·사회·문화적으로도 스펙트럼이 다양하다 보니 쉽게 합의할 수 있는 사안도 예상치 못한 데에서 이견이 나오기 일쑤였다.
그러나 2019년부터 분위기가 조금씩 달라지기 시작했다. 협상을 주도한 아세안은 반드시 성과를 내야 한다는 분위기가 역력했고 여타 참여국들도 적극적이었다. 한 달에 2~3번씩 협상을 하며 조금씩 진전시켜나갔고 결국에는 각국 장관이 전날 밤 12시까지 협의한 끝에 2019년 11월 4일 제3차 정상회의에서 ‘협정문’을 우선 타결하는 성과를 얻어냈다. 2020년에도 각국은 의지에 차 있었고 시장개방협상이 이미 70~80% 완료된 상황이었기에 조금만 더 하면 RCEP 최종 타결 및 서명이라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예상치 못한 코로나19가 복병이었다. 대면회의가 불가능하다 보니 협상 진전은 더뎠고, 협상이 타결될 수 있을까 하는 의구심이 확산됐다. 하지만 참여국들은 하루 8~9시간씩 화상회의를 하며 협상을 진전시켰고, 결국 RCEP 최종 서명에 이르게 됐다.
RCEP 서명 후 한 달이 훨씬 넘은 지금, 그간 많은 언론보도와 전문가 인터뷰 등을 통해 RCEP 발효 시 우리 수출과 경제에 긍정적 효과가 예상된다는 방향으로 의견이 수렴되는 듯하다. 다만 여러 매체에서 눈에 보이는 경제적 이익은 잘 적시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전략적 이익은 소홀히 하는 것 같기에 병행해 설명하고자 한다.
우선 눈에 보이는 중요한 이익은 상품·서비스에서의 추가 시장개방을 확보하면서 우리가 지켜야 할 부분은 잘 지켜냈다는 점이다. 특히 한아세안 FTA를 상당히 업그레이드해 자동차·섬유 등 한국산 상품에 대한 아세안 국가들의 시장개방 수준을 79.1~89.4%에서 91.9~94.5%로 상향시켰다. 일본과는 최초로 FTA를 체결한 것으로 섬유·농산물 등에서 대일 수출 확대가 기대된다. 반면 자동차, 기계 등 민감품목은 철저히 보호했는데, 특히 소재·부품·장비 품목은 약 80% 이상을 양허제외, 장기철폐 등으로 보호했다.
농수임산물의 경우 추가 개방을 최소화했다. 특히 쌀, 고추, 마늘, 새우 등 주요 민감품목은 양허제외로 보호하고, 열대 과일 등 일부 개방품목도 관세를 일부 감축하거나 10년 이상의 장기철폐로 양허했다. 서비스의 경우 아세안 국가의 문화콘텐츠, 물류서비스 등을 상당 부분 개방해 우리 기업의 시장 진출 가능성을 높였고, 발효 후 6년 내 시장개방을 ‘달리 명시하지 않는 한 원칙적으로 모든 서비스를 개방’하는 네거티브 방식으로 전환하기로 합의했다. 일부 분야에 대해 현재 자유화 수준보다 더 많은 제약을 부과하는 것을 금지하는 자유화 후퇴 방지 메커니즘인 래칫(rachet) 조항도 마련했다.
규범 측면에서는 역내 15개국 간 교역에 적용하는 단일한 원산지 기준을 도입해 FTA 활용 편의성을 높였고, 협정 참여국 전역에서 재료를 조달·가공하더라도 재료누적을 인정해 공급망 제고 기반도 마련했다. 지재권 분야에서는 저작권, 특허, 상표, 디자인 등을 아우르는 포괄적 보호 규범과 온라인 지재권 침해에 대한 구제 기반을 마련해 최근 문화콘텐츠의 소비 성향을 반영했다. 아울러 한아세안 FTA에는 없던 전자상거래 챕터도 신규 도입해 비대면 경제 활성화 기반도 마련했다.
신남방 지역 내 전략적 이익 확보
하지만 RCEP에는 눈에 보이지 않아 수치화할 수는 없지만 매우 중요한 성과도 있다. 대표적인 것이 신남방정책으로 대변되는 역내에서의 전략적 이익 확보다. RCEP의 자유화 수준이 포괄적·점진적 환태평양경제동반자협정(CPTPP)만큼 높지 않아 효과가 떨어진다는 일부의 지적은 이러한 전략적 이익을 간과한 측면이 있는 듯하다. 아세안은 지난 30년간 우리와 교역이 30배, 투자가 40배, 상호방문객이 40배나 증가한 매우 중요한 지역으로 부상했고 앞으로의 협력 가능성도 무궁무진하다. 따라서 아세안이 주도한 RCEP 협상에 참여하는 것을 단순히 경제적 측면에서만 볼 것이 아니라 중국·일본의 대아세안 전략, 이에 대응하는 우리의 전략 등의 측면에서 종합적으로 바라봐야 한다. 참고로 일부 전문가들이 RCEP을 중국 주도라고 얘기하면서 미중 대결구도하에서 이분법적으로 RCEP을 접근하는 경향이 있는데, 통상협상이 그렇게 단순한 방정식도 아닐 뿐더러 실제 협상에 참여한 일원으로서 RCEP은 중국 주도가 아니라 아세안이 주도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싶다. 중국 주도의 협상이라면 최근 중국과 갈등을 겪고 있는 호주는 왜 참여했고 일본은 왜 참여했는지 되묻지 않을 수 없다.
눈에 보이지 않는 또 다른 이익은 RCEP이 협력 플랫폼으로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8년간 협상을 하면서 RCEP 담당자들은 수시로 연락하고 마주해왔다. 그러다 보니 RCEP 이슈가 아니라 다른 현안이 있을 때에도 RCEP 채널을 통해 정부관계자 간 회의를 주선하기도 하고 해결방안에 대한 조언을 구하기도 하면서 일종의 플랫폼 역할을 해왔다. 앞으로 RCEP이 발효돼 공동위원회, 사무국 등이 공식 출범하게 되면 이 채널을 통해 여러 가지 협력 의제를 논의할 수 있을 것으로 기대된다.
RCEP은 아세안 10개국 중 6개국, 비아세안 5개국 중 3개국이 비준서를 기탁하면 60일 후 발효된다. 정확한 발효시점을 예측하기는 어렵지만 RCEP 참여국 간 조기 발효에 대한 공감대가 형성된 만큼 각국은 조기에 비준절차를 밟고자 노력할 것으로 예상되고, 우리 정부도 영향평가 등 필요한 절차를 거쳐 국회 비준에 만전을 기할 계획이다.
얼마 전 한 분이 RCEP 협정문에 대해 이것저것 물어왔던 기억이 있다. 나름대로 답변을 해줬는데 새로운 사업기회를 찾는 그분에게 조금이나마 도움이 됐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RCEP을 지난 8년간 추진하면서 밤늦게까지 협상에 참여해 한 글자라도 우리의 이익을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 수많은 공무원도 같은 마음이라고 생각한다. RCEP에 투입된 이러한 모든 노력이 우리 기업과 소상공인에게 조금이나마 보탬이 되기를 기대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