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야흐로 ESG 열풍이 불고 있다. 기업들은 앞다퉈 ESG 경영을 선포하고 ESG 위원회 등 관련 조직을 확충하고 있다. 금융기관들은 ESG 펀드 등을 출시하고 있고 연기금이나 기관투자자들은 투자 결정과 의결권 행사에 ESG 요소를 고려할 것을 선언하고 있다. ESG 평가기관, 로펌, 회계법인, 컨설팅회사들도 관련 업무 개발에 적극적이다. 언론에 ESG 관련 기사가 크게 증가하고 있고, 각 행정부처에서도 ESG 공시제도나 분류체계 수립 등 여러 노력을 기울이고 있다. 불과 1, 2년 사이에 발생한 일들이다.
ESG에 대한 사회적 압박, 연기금 통해 자산운용사로
그리고 기업 경영진에게로 전달돼
투자자나 금융기관이 투자 의사결정을 할 때 환경(Environmental), 사회(Social), 지배구조(Governance) 문제를 고려해야 한다는 ESG 개념 자체는 등장한 지 꽤 됐다. 2004년 유엔과 여러 금융기관 등이 참여한 「Who Cares Wins」 보고서에서 ESG라는 용어가 사용된 이후, 2006년 코피 아난 유엔 사무총장 주도하에 추진되고 여러 기관이 동참한 책임투자원칙(PRI; Principles for Responsible Investment)에서 투자 분석과 의사결정 과정에서 ESG 요소를 고려할 것임을 선언하면서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시작했다.
그렇지만 최근의 ESG 열풍은 세계적 자산운용사인 블랙록의 CEO 래리 핑크가 몇 년 전부터 투자대상 기업들에 보내는 연례 서한에서 기업이 사회적 목적을 수행하고 기후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응할 것을 강조한 것과, 미국 내 주요 기업 경영자들의 모임인 비즈니스 라운드테이블(BRT)이 2019년 ‘회사의 목적에 관한 성명서’를 통해 기업들이 고객, 근로자, 공급 업체, 지역사회 등 이해관계자들에게 기여하겠다고 선언한 것으로부터 비롯됐다. 불과 10여 년 전만 해도 세계적 자산운용사 대표들이 기업 경영자의 주된 임무는 기업의 수익 성장에 있다는 발언을 하고, BRT 역시 1997년 성명서에서 기업의 주된 목적은 주주들에게 경제적 수익을 제공하는 데 있다고 천명했던 것에 비춰볼 때, 이러한 변화는 실로 놀라운 것이다.
그렇다면 왜 자산운용사들이나 주요 기업 경영자들이 ESG를 강조하기 시작한 것일까? 여기에는 몇 가지 이유가 있다. 먼저 사회적·정치적 압박을 들 수 있다. 2008년 세계금융위기 이후 미국과 유럽에서는 주주의 단기 이익 추구나 투자은행의 활동에 대한 반감이 높아졌다. 2011년경 활발했던 월가 점령운동(Occupy Wall Street)이 대표적이다. 버니 샌더스나 엘리자베스 워런 등 미국 내 유력 정치인들이 빈부격차 해소나 근로자의 경영 참여 등을 내용으로 하는 각종 입법안을 발표한 것도 그 무렵부터다. 지난해 코로나19 팬데믹으로 사회문제에 대한 우려가 커지고 이를 해결하기 위한 기업의 역할이 강조된 것도 영향을 줬다. 영국은 「2006 회사법」을 통해 이사가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고려해야 함을 규정했고, 프랑스는 2019년 입법된 「빡뜨법(Loi Pacte)」을 통해 이사가 의사결정 시 사회·환경적 영향을 고려해야 함은 물론 회사가 존재의 이유를 정관에 정할 수 있도록 했다.
기후변화에 대한 우려 증가도 변화의 원인이다. 파리기후협정에 따라 전 세계 당사국들이 온실가스 감축 목표를 제시하고 있다. 우르줄라 폰 데어 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기후중립을 통해 EU의 번영을 이끌겠다는 이른바 유럽 그린딜을 핵심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고, EU에서는 이미 비재무적 사항 공시, 금융기관 지속 가능 공시, 녹색투자 분류체계(taxonomy), 인권 실사 등 각종 ESG 관련 법규의 제정이 완료됐거나 추진 중이다. 기후변화 문제는 어느 한 국가만의 노력으로 해결될 수 없기 때문에 자국 기업 보호를 위해서라도 기후변화 방지 노력에 동참하지 않는 국가의 기업에 탄소국경세 등을 부과할 가능성이 있고, 금융기관 입장에서도 기후변화로 인한 보유 자산 가치 하락 리스크는 중요한 문제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사회적, 정치적, 국제적 압박은 공공적 성격을 갖는 연기금들을 통해 연기금의 자산을 운용하는 자산운용사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자산운용사들은 다시 자신들이 지분을 보유하는 기업의 경영진에게 ESG 요소를 고려할 것을 요구하고 있다. 미국의 경우 이른바 빅3 자산운용사(블랙록, 뱅가드, 스테이트 스트리트)가 S&P 500 회사에 대해 20% 안팎의 지분을 보유하고 있기 때문에 경영진들은 자산운용사의 요구에 민감하게 반응할 수밖에 없다. 최근 미국의 자산운용사들이나 대기업들이 일제히 ESG, 사회책임투자, 이해관계자주의, 회사의 목적 등을 강조하는 것도 이러한 배경에서 이해할 수 있다.
지배주주 있는 기업지배구조 등
우리만의 ESG 문제 차분히 연구해야
그렇다면 우리나라는 어떤가? 앞서 살펴본 바와 같이 최근의 ESG 열풍은 우리나라에서 비롯됐다기보다는 미국이나 유럽의 영향을 받아 촉발됐다고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처럼 ESG 논의가 우리나라의 사회·환경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자생적으로 발전한 것이 아니다 보니 ESG를 왜 추진해야 하는지, 어떠한 ESG 문제에 초점을 둬야 하는지, ESG를 추진하는 것이 기업 가치에 도움이 되는지, 추진한다면 어떠한 방향성과 속도를 갖고 진행해야 하는지 등에 대해 혼란이 있을 수밖에 없다. 자선활동과 같이 착한 일을 하면 ESG라고 오해하는 것부터 시작해 ESG를 기업 홍보의 수단이나 비용 발생 요인으로만 생각하는 경우도 많은 것이 현실이다.
연기금이나 기관투자자들이 ESG를 고려해 투자를 한 결과 연금 가입자나 수익자의 투자수익이 감소하는 경우 어떤 책임을 부담하는지와 같은 여러 법률 문제에 대해 제대로 된 고민이 이뤄지고 있는지에 대한 우려도 있다. 기관투자자들이 많은 지분을 보유하는 미국과 달리 대부분의 회사에 지배주주가 있는 우리나라 기업지배구조 현실을 고려할 때 지배주주의 ESG에 대한 인식 변화 없이 연기금과 기관투자자의 활동만으로 우리나라에서 ESG가 잘 정착할 수 있을지도 지켜볼 부분이다. 제도적으로도 ESG 공시가 과연 투자자와 평가기관에 유용한 정보가 될 것인지, 기존의 재무공시 제도와 ESG 등 비재무적 공시 제도를 어떻게 통합할 것인지, ESG 평가기관들의 평가 결과 간 차이로 인한 혼선은 어떻게 이해할 것인지, 경영진의 경영 실책으로 인한 실적 부진이나 지배주주의 사적 이익 추구를 ESG나 이해관계자의 이익을 보호한 결과로 포장하지는 않을지 등과 같은 많은 문제가 존재한다.
이러한 ESG 문제의 본질에 대한 고민 없이 단순하게 ESG를 강조하거나 관련 제도를 수립할 경우에는 자칫 ESG 논의의 당초 이유, 즉 투자와 기업 활동을 통해 환경, 사회, 지배구조 문제를 해결하고 지속 가능한 발전을 추구하자는 목적을 달성하기 어려울 수도 있다. ESG 열풍 가운데서도 우리나라만의 ESG 문제들을 차분하게 연구하고 이를 국제적 논의에 어떻게 반영할 것인지 고민해야 하는 이유는 바로 이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