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공지능(AI)이 세상을 바꾼다는 이야기가 떠들썩하게 들려온 지는 꽤 됐다. 신기술이 삶을 편리하게 해줄 거란 말은 당연한 이야기처럼 들려 주목을 끌지 못한다. 그래서인지 주목받기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와 관련해 온갖 디스토피아적인 이야기를 떠든다. AI에 의해 인간과 같은 로봇이 만들어질 것이고, 인간이 초지능을 가진 로봇에 의해 지배될 수 있다는 공포감을 부추기는 디스토피아 영화와 소설이 잘 팔린다. 과거의 산업혁명 때에도 기계가 도입되면 인간의 삶을 황폐하게 만들 것이라는 공포감이 있었고, 그래서 기계를 파괴하고자 하는 이들도 있었다. 그러나 우리는 역사를 통해 배워 알고 있다. 새로운 기술이 자리를 잡는 동안 산업계가 재편되는 고통이 있기는 했지만, 결국 우리의 삶을 전에 없이 풍요롭게 만들었다는 것을. AI가 과거의 기술과 다를 것이라고 생각할 이유는 별로 없다.
AI에 정신을 빼앗겨 우리의 미래가 어떻게 바뀔 것인지 궁리하던 때에 코로나19와 관련된 음산한 이야기가 들려 왔다. 사스(SARS)나 신종플루 정도의 일이거니 생각했지만, 2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온갖 변이를 거쳐가며 맹위를 떨치고 있다. 코로나19가 스페인독감이나 신종플루처럼 과거의 추억으로 되기까지는 굴곡과 고난을 좀 더 겪어야 할 모양이다. 그렇지만 우리가 출구를 향하고 있는 것은 분명하다. 백신이 나왔고 치료제가 곧 보급된다. 변이가 있겠지만, 인류의 지성과 과학은 이에 충분히 대응할 능력을 갖고 있다.
코로나19로부터 벗어나 AI 시대로 들어가는 과정에 무슨 대비가 필요할까? AI 시대가 풍요로운 미래로 인도하고, 코로나19는 과거의 추억이 된다면 그저 미래로 진행하면 되는 것이 아닌가? 미래에 대해 온갖 디스토피아를 떠들며 호들갑을 떠는 것은 문제지만, 맹목적 낙관도 조심해야 한다. 역사의 큰 변곡점을 지나면서 흔적이 남지 않을 수 없다. 코로나 사태는 큰 사건이고, AI 시대로의 이행도 큰 사건이다. 이 둘을 아무 흔적 없이 지날 수 없다.
어떤 이들은 이런 큰 변화를 겪는 시점에서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것인가를 한가롭게 예언한다. 한편 비겁하고, 한편 패배주의적이다. 오늘 우리가 어떤 노력을 하는가와 상관없이 미래가 정해진 것처럼 이야기하는 것은 패배주의적이다. 그래서 오늘 우리가 무엇을 하든 상관없다는 뜻이라면 책임을 회피하는 비겁한 일이다.
미래가 어떤 모습으로 다가올 것인가는 이런 흔적들에 우리가 어떻게 대응하는가에 달려 있다. 긍정적인 것은 긍정적인 대로 발전시키되, 부정적인 것이 있다면 그 여파를 최소화하도록 희망을 안고 그림자에 대비해야 한다. 무엇이 코로나19의 후유증을 안고 AI 시대에 들어가는 우리에게 드리워진 그림자이고, 이 그림자에 빛을 비추기 위해서 무엇을 할 수 있을까?
공감
공감은 인간의 중요한 자산이다. 진화론자들은 인간이 종으로 살아남기 위해 협력이 필요했고, 그러한 협력을 촉진하기 위해 공감이 계발돼 확산됐다고 이야기한다. 종교인들은 공감을 신이 준 선물이라고 이야기한다. 어찌 됐든 공감은 인류의 중요한 자산으로 본성에 깊이 자리 잡아 공존을 위한 윤리를 촉발했다. 공감 능력이 있기 때문에 남을 함부로 해하여서는 안 된다는 마음이 생기며, 이런 마음이 있기에 규범과 윤리도 있을 수 있다. 사이코패스에게서 윤리를 찾기 어려운 이유는 그들의 공감 능력이 결여됐기 때문이다.
그런데 공감이 사람들 사이의 관계를 비대면으로 몰아가는 AI와 코로나19 모두로부터 도전을 받는다. 코로나19가 확산되는 시기에 대학들의 강의가 비대면으로 전면 전환되면서 사람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기 어려워하며 불평했다. 재택근무도 처음에는 간단치 않아 업무의 효율성에 대한 우려가 많았다. 지금은 어떤가? 비대면에 최적화된 앱들이 사용되며 비대면 환경의 불편함은 많이 줄어들었다. 더 나아가 출퇴근 시간을 줄여주는 효과, 상의만 잘 걸치면 회의에 참여할 수 있는 복장상의 편리함 등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다. 얼굴 맞대고 비위를 맞춰야 하는 것이 부담스러웠는데 재택근무가 꽤 괜찮은 대안으로 느껴진다. 이제 코로나19 이후의 시대로 들어서면서 공존의 대상이었던 타인들이 바이러스의 매개자일 수 있다는 전혀 새로운 생각마저 어른거린다. 그렇지 않아도 정보화 시대에 SNS의 발전으로 사람들과 얼굴 맞대고 지내는 시간보다 인터넷 공간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았었는데, 새로운 시대에 대면성은 더욱 약해질 수밖에 없다.
비대면 관계가 확대된다 하더라도 SNS의 발달로 접할 수 있는 사람들의 범위가 확대된다면 오히려 공감의 폭이 넓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닌가? 많은 연구에 비춰 보면 실상은 그렇지 못하다. 예를 들면 실리콘밸리에 있는 어린이들이 SNS를 사용하는 비율이 높은데, 이 아이들 사이에 타인의 마음을 이해하는 데 문제가 있는 자폐아의 비율이 현저히 높다는 것이 보고된 바 있다. 또한 SNS를 통한 인간관계는 내가 보이고 싶어하는 모습만을 선택적으로 드러내기 때문에 서로 간의 피상적인 모습에 대한 경쟁을 부추긴다.
경쟁은 공감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공감은 나와 가족, 친족, 동족과 같은 가까운 그룹에는 호의적으로 작동하는 반면, 경쟁 대상에게는 잘 작동하지도 않고 때로는 역기능을 한다는 한계를 갖고 있다. SNS의 환경은 경쟁을 부추긴다는 점에서, 또 무한한 수의 바다에서 나와 유사한 사람들과의 관계만을 선택한다는 점에서 나와 같은 부류의 사람들과의 연대만을 강화할 뿐, 상이한 사람들과의 공감을 확대하는 데는 도움이 되지 않는다. 대면을 통한 전인격적인 관계가 점차 소원해지는 상황, 타인을 바이러스의 매개자일 수 있다는 시선으로 보게 되는 상황, 더군다나 정치인들이 끝도 없이 정파성을 부추기는 상황에서 인류에게 윤리를 선사한 공감 능력은 사면초가의 상황에 직면하게 된다. 공감을 넓혀온 긴 역사의 과정을 정보화 시대와 코로나19가 결합해 역주행하는 위험이 감지되고 있다.
자유와 자율
자유와 자율 역시 오늘의 인류를 구성하고 있는 중요한 자산이다. 이 자산은 동서양을 막론해 전통적 권위주의에 저항하는 과정에서 엄청난 희생을 치르고 획득됐다. 문명화된 선진국들은 한결같이 헌법의 초두에 온갖 자유권을 명시함으로써 이러한 자산의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자유에 대한 의식이 성장하며, 자율의 의식도 성장한다. “너는 자유를 가졌으니 스스로의 삶의 주인이 돼 자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삶을 그려나가라.” 누구도 반대하지 않을 만큼, 이런 생각이 우리 의식의 깊은 곳에 자리 잡고 있다. 생명, 신념, 의사 표현, 거주 이전 등에 대해 누구도 간섭할 수 없는 자유를 갖고, 자신이 원하는 삶을 주체적으로 사는 것이 존엄한 삶이라는 생각에 시비 걸 사람은 찾기 어렵다.
자유와 자율이라는 자산도 공감과 마찬가지로 코로나19와 AI로부터 도전을 받는다. 안전을 이유로 정부가 개인의 일거수일투족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행동을 통제하는 것이 정당성을 얻으면서, 개인의 선택권은 뒷전으로 밀려난다. 긴급상황에서의 중앙통제라는 선택지가 문제가 아니라, 그 과정에 개인의 자유에 대한 고민이 서려 있지 않은 것이 문제다. 목숨이 위기에 봉착한 상황에서, 지금까지 자유를 얻기 위해 얼마나 많은 생명이 희생됐는가는 망각에 묻히고 정부의 통제에 대한 저항은 일부 정신 나간 이들의 일탈행위로 치부된다. 목숨의 중요성이 삶을 압도하는 상황에서 국가가 개인의 자유를 좌지우지하는 권위주의 사회로 고민 없이 회귀하는 징조들이 보인다.
코로나19가 개인의 자유와 자율이 국가에 의해 통제되는 권위주의로의 길을 마련한다면, 정보화사회는 AI와 데이터 사이언스를 통해 개인의 자율성을 위협한다. 결혼을 고민하는 한 커플에게 빅데이터에 기반한 AI가 이들이 불행할 확률이 98%, 이혼할 확률이 75%라고 한다면, 과연 결혼할 수 있을까? 나의 뇌에 저장된 정보에 의존했던 의사결정이 외부의 저장장치에 의존해 간다. 나와 관련된 정보와 다른 사람들의 정보를 함께 뒤섞어 처리하는 앱으로, 이동통신 단말기로, 클라우드 컴퓨터로. 결정이 아니라 권장이라고 하지만, 거대한 데이터를 활용한 결정을 누가 거부할 수 있겠는가? 내 인생은 나의 것이라는 자율성과 관련된 전통적 휴머니즘은 이제 뉴노멀의 시대에 재정립될 상황에 직면하게 됐다.
질문의 질문
공감의 능력, 자유와 자율이 오늘 우리가 생각하는 인간다움의 핵심 요소들인데, 코로나19를 안고 AI로 들어가는 시대에 이들 모두가 도전에 직면하고 있다. 더 많은 존재를 품을수록 풍요한 삶이기에 공감이 쇠약해 가는 것을 뒷짐지고 바라볼 수 없는 일이고, 인류의 유산인 자유와 자율도 모르는 사이 쇠약해 간다. 변화하는 시대에 우리가 지금 갖고 있는 유산이 유지될 수 없다면, 이들을 대체할 이념이 준비돼 있는가? 유지해야 한다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가? 쉬운 대답을 허용하지 않는 질문들이다. 그런데 우리는 이런 질문을 하고는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