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수습되고 있는 현시점에 나는 중요한 교훈을 하나 깨달았고, 그걸 실현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인문학 대학 하나를 만드는 일이 그것이다. 학문 이력만 30년이 넘은 입장에서 중대한 기로라 할 것이다.
나는 코로나19를 계기로 확인하게 된, 우리가 맞이한 새로운 시대 상황을 ‘뉴노멀’로 규정하고, 그와 관련해 몇 가지 중요한 연구를 수행했다. ‘위기’라기보다 ‘변화’로 특징지을 수 있는 지금 시점에서 문사철(文史哲) 중심의 전통 인문학은, 서양의 오랜 전통 속에서 갱신을 거듭해 온 ‘아르테스 리베랄레스’[artes liberales; 문법, 수사, 논리의 3학(trivium)과 산술, 천문, 기하, 음악의 4과(quadrivium)]의 교육·학문 시스템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언어, 문사철, 사회과학, 자연과학, 예술’을 포괄하는 새로운 인문학으로서 ‘뉴리버럴아츠(New Liberal Arts)’ 인문학으로 거듭나야 한다고 주장했다.
전통 인문학이 됐건 뉴리버럴아츠 인문학이 됐건 이를 실천할 수 있는 ‘대학’은 현재로선 요원해 보였고, 학계 내외의 실현 전망도 전혀 긍정적이지 않았다. 그러던 중에 이러한 대학을 만드는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이 떠오르게 되었으니, 이 어찌 기쁘지 않을까?
대학은 본디 교육자와 학생의 공동체···
전통적인 대학은 이대로 몰락하는가?
서양 역사를 되짚어 보면, 11세기경 탄생한 대학(universitas)은 ‘공부 모임’이었고, 주요 구성원은 ‘교육자와 학생’이었다. ‘univer sitas’라는 단어는 본디 ‘동아리’나 ‘모임’이라는 뜻이었으며, 오늘날 대학으로 일컬어지는 universitas는 universitas magistrorum et scholarium, 즉 ‘선생과 학생의 모임’이라는 말의 축약어였다.
대학에 장소는 본질적이지 않았다. 어떤 도시가 협조하지 않으면 다른 도시로 옮겨가면 그만이었다. 가령 세계 최초의 대학이라고도 불리는 이탈리아의 볼로냐대는 볼로냐시와 갈등이 생기며 비첸차, 아레초, 파도바, 시에나, 피사 등지로 이주하기도 했다. 대학은 본디 ‘교육자와 학생의 공동체’였기 때문이다. 공간을 완전히 떠나 자유로울 순 없겠지만, 다른 한편 공간에서 상당히 자유로울 수도 있다는 사실을 지금 이 시점에 인류는 새삼 깨달았다. 공간에 적게만 의존하는 대학, 그러니까 첨단 기술은 최근 200년 동안의 대학과는 완전히 다른 대학을 구체화하고 있다. 전통적인 대학은 이대로 몰락할 것인가?
대학에서 이뤄지는 핵심 작업은 교수에겐 연구와 강의, 학생에겐 수업과 토론 그리고 소논문 작성이다. 오늘날 이런 작업이 제대로 이뤄지고 있는지 물어볼 일이다. 교수는 강의에 시달리면서 학기 중에 연구하는 게 불가능하다고 서로 한탄한다. 요즘 강의는 3학점짜리도 75분 2회로 쪼개져 있어, 3과목만 강의해도 주 6회를 해야 한다(3과목 강의는 요즘 특혜에 가깝다). 주중에 매일 강의 부담에 허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75분에 강의, 강독, 토론이 제대로 이뤄질 리 만무하다. 사실 인문·사회 계열 강의에서 3시간 연강해도 깊이 있게 파고들 시간이 충분치 않다. 그렇다고 강의 외 시간에 이런 작업이 이뤄지긴 더 어렵다. 6과목 정도 들어야 할 학생에게, 강의마다 소모임을 진행하는 건 고문에 가깝다. 더욱이 학생은 학점도 잘 따야 하지만 취업 준비의 압박도 감당해야 한다. 전통적 의미의 대학 개념에서 보면 지금 상황은 지옥이나 다름없다.
깊이 있게 파고들 시간 충분치 않은 현실 속에
본격적인 인문학 강의를 시도해 보다
인문학으로 범위를 좁혀 보자. 나는 인문학이 지식과 지혜를 쌓는 데 국한되지 않는다고 본다. 리버럴아츠 인문학은 물론 좁은 의미의 전통 인문학도 마찬가지다. 인문학은 흔히 이공계 교육이 길러준다고 얘기되는 ‘기술’ 혹은 ‘노하우’를 함양하는 역할을 해왔다. 가장 중요한 기술로는 언어 능력, 읽기 기술, 토론과 소통 역량이 있다. 이런 것들은 주로 ‘강독’이라는 형태의 수업을 통해 익힐 수 있었다. 그런데 앞서 진단한 오늘날 대학의 현실에서 이런 기량을 익히는 건 불가능에 가깝다. 학부 고학년 전공수업은 물론 대학원에서도 충분한 시간을 할애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이 난관을 어떻게 극복할 수 있을까? 인문학의 미래는 이 지점에 걸려 있다고 생각된다.
필자는 최근 유튜브에 철학 전문 채널을 하나 개설했다. 이름하여 <철학은 ‘생각의 싸움’이다>. 나야 평생 공부한 것이 철학이고, 석사 시절에는 니체를, 박사 시절에는 들뢰즈를 집중해서 공부했고, 그 후 인공지능(AI), 뉴노멀도 파고 있으며, 서양철학사를 학부 전공 수준에서 강의할 정도는 된다. 그래서 내가 잘할 수 있는 이런 내용을 담는 철학 전문 ‘동영상 강의’ 채널을 만들게 된 것이다. 현재 니체의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매주 2시간씩 온라인 실시간으로 번역·강독하고 내용을 편집해서 채널에 연재하고 있다. 들뢰즈의 『니체와 철학』, 『프랜시스 베이컨: 감각의 논리』, 『시네마 1(운동-이미지)』, 『시네마 2(시간-이미지)』 그리고 들뢰즈와 가타리의 『안티 오이디푸스』와 『천 개의 고원』도 강독할 것이다. 모두 내가 평생에 걸쳐 연구해 온 내용이다.
현존하는 대학에서 이런 강의를 진행하려면 어떤 조건이 필요할까? 학부 고학년 혹은 대학원생을 상대로 여러 학기의 시간이 주어져야 한다. 사실상 비정규 교수인 나로서는 엄두도 못 낼 일이고, 아마 철학과에 소속한 정규직 교수에게도 어려운 일일 것이다. 대학의 커리큘럼은 위의 내용을 학생과 공부할 틈을 내주지 못한다. 이공계가 아닌 인문·사회 계열 교수 대부분은 비슷한 처지에 놓여 있다(이공계는 잘 모르므로, 인문·사회 계열만 논하겠다). 다수 학생을 상대로 하는 교양과목 강의만으로도 벅차다. 더욱이 온라인 강의가 익숙해지면서 정원 100명이 넘는 수업도 허다하다. 강의와 평가에 너무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교수들은 자기 전공을 강의하고 싶어 안달이다. 전공 강의야말로 자기 공부의 기회이기 때문이다. 연구가 이뤄지는 건 통상 전공 강의 준비와 진행을 통해서다.
철학 혹은 인문학 연구자의 푸념으로만 여기지 않았으면 한다. 상황이 이렇다 보니 암담함과 우울감을 참다못해, 철학 전문 유튜브 채널까지 개설하게 된 것이다. 처음엔 예전에 강의했던 영상을 올렸지만, 지금은 매주 진행되는 강의를 올리고 있다. 이게 쌓이면 대학 강의에 가깝게 진행할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토론은 실시간 온라인 강의 중에 일부 시도하고, 발전하면 온라인 소모임도 개설할 수 있을 것이다. 소논문 작성은 당분간 쉽지 않겠지만 뜻이 모이면 또 어떻게 될지 모른다. 대학에서 현재 하지 못하는 일의 일부라도 보완할 수 있다면 다행이라 생각한다. 아마 나와 뜻이 비슷한 연구자가 유사한 방식으로 도전할 것 같기도 하다. 이런 연구자가 모이면 하나의 과, 하나의 대학이 만들어지는 건 시간과 의욕의 문제다.
공간에서 자유로울 수 있음으로
새로운 인문학 대학의 가능성을 엿보다
가까운 미래에 과연 대학이, 특히 인문사회 계열 대학이 연구와 교육 실천에서 얼마나 기능을 유지할지 의문이다. 개방형 온라인 공개강의 무크(MOOC)가 처음 등장했을 때 교육적으로 얼마나 유의미한지 회의적이었다. 하지만 코로나19를 겪으며 온라인 강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대부분 시험해 본 상황에서 무엇이 가능하고 무엇이 어려운지 잘 이해하게 됐다. 내가 철학 전문 채널을 개설한 건 가능성을 봤기 때문이다. 대신 더 깊이 있게 공부할 매개가 돼야 하리라. 뜻을 같이하는 동료 연구자가 모여 채널을 연합하면 결국 뉴리버럴아츠라 부를 수 있는 새로운 인문학, 새로운 전문 교양교육이 이뤄지지 못할 이유도 없다.
세계 대학의 역사에서 가장 주목할 만한 장면 중 하나는 68혁명 직후 세워진 파리8대학이다. 파리 대학 시스템에 속한 대부분이 전통 있는 대학(가령 소르본)을 계승하고 재편했다면, 파리8대학은 그야말로 혁명의 소산이다. 박사학위가 없어도 강의를 맡겼고, 수강도 자유로웠으며, 무엇보다 기성 제도에 대한 도전과 학문적 실험이 넘쳐났다. 20세기 중후반 프랑스를 대표하는 유수의 철학자가 이곳에서 가르치고 배웠으며 시대를 풍미하는 사상을 생산했다.
나는 코로나19가 우리에게 일깨우고 훈련한 온라인 대학강의 시스템과 구글의 엄청난 하드웨어 시스템을 결합하면 인문학 고유의 훈련을 다시 수행할 수 있는 새로운 대학 시스템이 마련될 수 있지 않을까 기대해 본다. 될 수 있을지 걱정하기에 앞서 먼저 실험해 보는 게 필요하리라. 어쨌건 현재의 대학이 학문 연구와 교육이라는 두 가지 일을 감당하기엔 너무 많은 장벽이 있는 건 분명하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