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수은주가 영하로 뚝 떨어진 12월의 어느 날, 추위를 뚫고 서울 혜화동 모처로 사람들이 모여든다. 좁은 테이블 위로 좋은 작물들, 옳은 먹거리들이 가득하다. 카카오 100%인 걸까 3천원짜리 초코케익은 찐한 맛을 내고, 말린 고구마는 쫀득, 말린 귤은 향긋하다. 사람으로 꽉 찬 실내를 벗어나니 배추전, 감자전 굽는 고소한 냄새와 훈기로 꽉 찬 테라스가 이어진다. 값이 엄청 싸거나 독특한 제품들은 아니지만 채식주의자를 위한 먹거리, 건강한 반찬들, 밭에서 막 거둔 신선한 채소와 직접 뜬 머플러까지 눈과 몸이 즐겁다.
이곳은 ‘농부와 요리사, 아티스트가 만드는 도시형 장터’를 표방하는 ‘마르쉐@’의 장날이다. @뒤에 어떤 장소든 붙을 수 있는데, 지금까지는 시골의 5일장처럼 매월 둘째 주 토요일 혜화동에서 열렸다.
마르쉐@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도시농부들이 생산한 각종 신선한 작물과 먹거리다. 어디 그런 땅이 있을까 싶게 삭막한 서울에서 옥상과 공터를 활용해 텃밭농사를 짓는 도시농부들은 환경과 사람 모두를 이롭게 하는 방법을 아는 선각자다. 시인 이문재가 그랬던가. “도시농업이 우리의 미래”라고.
#. 휴양지란 무릇 사람들로 북적이고 먹거리와 즐길거리로 넘쳐나게 마련인데 여기 신비로울 만큼 고요한, 무미건조한, 아니 멋대가리 없는 마을이 있다. 도시에서 여행 온 여자는 어렵게 민박집을 찾는다. 핸드폰도 잘 터지지 않고, 동네 사람인지 여행자인지 알 수 없는 사람들은 바닷가에 모두 모여 느린 체조를 한다. 천천히 얼음을 갈아 팥빙수를 해먹고 느리게 걷는다. 관광지를 찾던 여자에게 누군가 말한다. 이곳엔 관광할 만한 곳이 없다고. 놀란 여자가 그렇다면 이곳에 여행 온 사람들은 무얼 하냐고 묻자 대답이 가관이다. “사색?. 음 그렇네요 사색이네요.”
현대인 중 누가 사색 따위를 하기 위해 여행을 가는가. 맛집을 검색하고 빠뜨리면 안 될 관광지 리스트를 작성하는 데만도 머리가 아플 지경인데. 그런 우리들에게 이 영화 <안경>(오기가미 나오코 감독, 2007)을 권한다. 영화의 배경인 작은 바닷가 마을은 ‘슬로시티’의 축소판이라 해도 좋겠다.
도시농업과 슬로시티. 뿐만 아니다. 슬로푸드, 슬로패션, 슬로비즈니스, 슬로디자인, 슬로머니, 슬로워터, 비폭력과 생태주의, 산책과 걷기, 채식과 친환경까지. 다운시프트(downshift)족, 슬로비(slobbie)족이라는 신조어도 눈에 띈다. ‘느리게 사는 삶’을 영어로 하면 문법에는 맞지 않지만 ‘슬로라이프(slow life)’라 부른다. 일본의 문화인류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쓰지 신이치가 만들어낸 이 말은 이제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느림의 대표 문구가 됐다. ‘미학’이라고까지 칭송되는 ‘느림’은 이미 사회 전 분야를 강타했다.
느림은 ‘빠름’에 피로해진 현대인들이 택한 돌파구일 것이다. 우리들은 온갖 업무에 쫓기듯 살아가고 투 두 리스트(to do list)의 항목을 지우려 이리저리 뛴다. 실제로 빨리 먹고 빨리 말하며 빨리 걷기까지 한다. 누군가 말했다. 북적이는 서울의 지하철 통로나 거리에서 누가 시골 사람인지 구별해낼 수 있다고. 발걸음 속도를 보면 안다는 것이다. 영국의 과학자들도 궁금했던지 세계 32개 도시를 대상으로 걸음 속도를 연구했다. 오늘날 사람들의 걸음 속도가 10년 전에 비해 10%나 빨라졌다는데 그 이유는 짐작 가능한 것이었다. 스트레스와 업무에 대한 중압감, 무언가 생산해야 한다는 강박감 등이 발걸음을 재촉하는 요인이었다.
느리게 사는 법은 단순히 속도에 대한 고민만은 아니다. 빠름과 경쟁을 강요하는 자본주의, 사회시스템에 대한 환기이기도 하다. 끊어진 관계와 잃어버린 가치들에 대한 반성이기도 하다.
앞으로 1년간 속도와 경쟁에 지친 당신에게 12번의 쉼을 만들어 드린다. 도시에서의 생태적 삶을 위한 실천방안, 귀농이나 귀촌, 각종 공유와 나눔 등 대안적인 삶의 선택지는 무궁하고 다양하다. 그들이 전하는 느림의 방법은 과연 무엇일까. 그것이 무엇이 됐든 느림을 용기 있게 실천에 옮긴 사람들의 이야기를 통해 스스로의 삶을 환기해볼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