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영화 <시>에 등장하는 시인 ‘김용탁’은 시를 강의하는 장면에서 사과 한 알을 놓고 이렇게 말한다. “여러분은 살면서 몇 번이나 사과를 봤습니까? 수천 번? 수만 번이요? 아닙니다. 우리는 한번도 사과를 제대로 본 적이 없습니다. 사과를 오래도록 지켜보고 무슨 말을 하나 귀기울여보고 주변에 깃드는 빛도 헤아려보고 그러다 한입 깨물어보기도 했어야 진짜 본 것입니다.” 영화 <시>에 출연했던 시인 ‘김용택’도 같은 생각이다. 영화의 그 장면은 시인의 실제 강의를 토대로 했으니까. 무릇 자세히 보려면 멈추어야 한다. 가속 붙은 페달에 발을 떼지 않고서는, 빠르게 달리는 자동차 안에서는 풀잎 하나도 자세히 볼 수가 없다.
속도전(戰)에 지친 사람들은 섬진강 근처에서 고요히 살아가는 그의 글에, 시에 열광했고 위로받았다. 그가 교사직을 은퇴하고 전주에 자리 잡자 전국 방방곡곡에서 강의를 청해 온다.
전주의 재래시장과 한옥마을의 골목을 함께 걸으니 많은 사람들이 시인에게 알은체를 했다. 시인은 일일이 화답하며 화통하게 웃었다. 시인과의 짧지 않은 인터뷰를 통해 삶의 속도에 대한 고민을 덜고 환경과 인간성의 회복이라는 덤을 챙겼다. 어쩌면 다 아는 얘기일는지 모르지만 시인의 입으로 정리되니 반가운 마음이 일었다.
2012년 등단 30주년을 맞으셨습니다. 감회가 새로우셨겠습니다.
20대에 문단에 나오는 다른 작가들에 비하면 난 많이 늦었죠. 초ㆍ중ㆍ고 때는 책 읽을 기회조차 없었고 혼자 공부해서 13년 만에 등단했으니. 그런데 30주년 같은 거 별 의미 없어요. 어떻게 하면 좋은 글을 쓸 수 있을까 늘 생각할 뿐이죠. 좋은 글 쓴다는 게 엄청 힘든 일이니까. 하긴 글 쓰는 사람만 힘든가 어디. 요즘은 누구나 힘들지. 그런데 다들 힘들어 해도 “너~~무” 힘들어해(웃음). 대체 뭐가 문제일까요?
다 알면서 넌지시 묻는 시인에게 “먹고사는 일”이라는 대답을 들려주었더니 “어지간히 다 먹고는 살지 않냐”고 반문했다. 그렇다면 결국은 남들만큼 돈을 벌려니 그런 게 아니겠냐고 자신 없이 말끝을 흐리는데, 그가 덧붙인다.
그래요. 결국 돈을 많이 벌고 싶은데 생각대로 못 버니까 힘든 거잖아요? 그 누구도 ‘아, 이제 다 됐다. 그만 벌어도 된다’ 이렇게 생각하진 않을 걸요. 그런데 과연 얼마나 벌어야 사람들이 행복할까요? 비관적입니다. 인간의 욕망은 끝이 없어요. 물론 경제 중요합니다, 어느 선까지는. 그런데 인간으로서 더불어 살고 공동체를 이루는 일이 뒷전으로 밀려나고 양극화가 극심해진 지금, 저는 우리가 짐승같이 살고 있다고 생각해요. 이제 경제를 살리겠다는 말보다는 인간정신의 회복, 사람과 생명 이런 게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2000년대 초 고향의 자연환경이 파헤쳐져 매우 괴로웠다고 회고하셨는데요, 이런 난개발과 자연파괴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인간이 살다 보면 자연에 손을 안 댈 수는 없어요. 그런데 자연은 말이 없고 힘도 없어서 스스로를 지킬 수 없죠. 그러니 인간이 자연을 배려해줘야 하는데, 그저 자신들 편리한 대로 함부로 대해요. 이를 테면 개발하더라도 물의 흐름, 강기슭, 강바닥 등 강이 가지고 있는 몸 자체를 생각해야죠. 그렇지 않으니 경관은 물론이고 생태계가 파괴되고 죽어나가는 거에요. 우리가 하나 명심해야 할 것은 자연의 파괴와 상처는 인간의 상처로 돌아온다는 점입니다.
교육 문제에 대해서도 관심이 많으신 걸로 압니다. 요즘 아이들은 아주 어렸을 때부터 경쟁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살아남으려면 일찍부터 준비해야 한다는 부모들의 심정도 이해 못할 바는 아닌데요, 어떻게 보십니까.
교육 문제를 얘기하자면 눈물겹습니다. 아이들의 영혼이 사라졌어요. 내가 저 사람을 괴롭히면 저 사람이 아파한다는 걸 몰라요. 영혼이라는 건 상대를 인정하는 인간의 마음이죠. 세상에 나만 있는 게 아니고 상대가, 이웃이, 사람이 있다는 걸 인정하는 방향으로 교육이 이뤄져야 하는데 지금의 학교 교육을 보면 어른의 삶과 다를 바가 없어요.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점수만 많이 받으면 된다는 식이니까요. 물론 지금까지는 그런 교육을 받고 엘리트가 된 사람들의 지도 아래 생산현장에서 좋은 물건을 만들어냈고 경제성장도 했죠. 그런데 이젠 그렇게 단순하지 않아요. 사회가 복잡해져버렸어요. 그런데도 창조적인 것을 무시하고 획일화된 주입식 교육이 계속 이뤄지고 있다는 것은 끔찍하죠. 그간의 교육방식으로는 복잡한 사회에서 일어나는 문제를 해결할 수 없어요. 다 아는 사실이지만 지금 아이들에겐 노는 시간이 필요해요. 놀이라는 건 내 생각을 바꾸고 양보해서 상대방과 어울리는 거에요. 사실은 이게 공부나 마찬가지죠.
삶의 속도에 치이고 있는 현대인들이 여유를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가 말해봐야 소용없어요. 자기가 알아서 살아야지(웃음). 사람들은 이미 지금의 삶에 다 젖어버렸습니다. 속도와 경쟁, 돈, 출세에서 못 빠져나와요. 인간이 자본을 이길 수가 없게 됐어요. 극소수 사람들이 거기서 벗어나려고 노력하지만 쉽지 않죠. 여러 열풍이 불기도 했는데, 걷기, 올레길, 슬로시티 같은 거요. 그런데 거기서도 경쟁하는 사람들이 많아요. 여기서 저기까지 주파해야 한다, 뭐 이런 식으로(웃음). 물론 우리 삶이 그런 특정한 장소에 가서 위안 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일상 아닐까요. 일상에서 여유를 가지려면 가정부터 되찾아야 한다고 봅니다. 식구들끼리 노는 게 슬로라이프 아닌가요? 식구들끼리 놀면서 경쟁하겠느냐는 거죠.
구체적으로 말씀해주신다면요.
원래 가정은 사랑과 애정으로 뭉쳐진 아름다운 공동체였죠. 그런데 지금 우리 사회의 가정을 들여다보세요. 놀랍게도 조직이나 마찬가지에요. 서울대를 보내기 위한 강력한 조직 말이죠. 조직이란 게 뭐냐면 공동체랑 상관없이 자기 역할만 잘하면 되는 거거든요? 그런데 가정도 그런 식이에요. 구성원이 각자의 역할만 따로따로 하고 있어요. 예전에는 나락 베고 메뚜기 잡고 갯벌에 가고 이런저런 체험을 하느라 밖으로 다녔는데, 그것보다는 엄마 체험, 아빠 체험, 가족 체험을 해야 해요. 한 달에 두 번씩만 어디 가지 말고 집에서 놀아 봐요. 고구마도 궈 먹고 라면도 삶아 먹고 소통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거죠. 물론 첨엔 맨날 싸울 거야. 놀 줄을 모르니까. 시간은 또 얼마나 더디게 가겠어. 그런데 우리 어머니도 말씀하셨지만 사람은 싸우면서 크는 거에요. 하하. 이런저런 이야기를 하고 고민도 털어놓다 보면 가정이 살아날 거에요. 정말로 요즘 가장 중요한 건 가정이라고 생각해요. 가정이 제대로 작동하면 모든 게 해결됩니다. 느리게 살고 더디게 살고는 그 다음 문제죠.
김용택 시인
1948년 생. 태어나 자란 마을의 초등학교에서 교사로 일하며 시를 쓰다가 2008년 정년 퇴임했다. 요즘은 저녁 일찍 잠자리에 들어 새벽 3시에 일어난다. 두세시간 글을 쓰고 신문을 읽고 책 보고 운동 좀 하고 간소한 아침을 먹는다. 아침에 그렇게 볼 일을 다 보고 나선 낮잠도 자고, 강연으로 바쁠 때가 많지만 시간이 나면 영화도 본다. 지난해에는 고향인 전북 임실군 진메마을을 주제로 8권짜리 전집을 집필했다. 마을 사람들이 가난 속에서도 어떻게 삶을 잘 꾸려왔는지, 같이 먹고 놀고 일하면서 자연과 더불어 어떻게 농촌공동체를 이끌어왔는지를 담고 있다. 올해 안에 ‘김용택의 작은 학교’가 고향집에 만들어지면 내려가서 살 계획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