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오노 나나미의 「로마인 이야기」제1권 ‘로마는 하루아침에 이루어 지지 않았다’에는 권리와 의무가 같이 가는 제도를 만들어 낸 지혜가 로마제국 번영의 초석이 됐다는 설명이 있다.
이웃나라와의 전쟁이 일상이던 로마에서 가장 중요한 의무는 병역의무였다. 그런데 노예와 무산계급은 군역을 면제받았다. 왜냐하면 그들은 로마시민으로서의 권리가 부여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대신 귀족과 유산계급이 전쟁터에서 싸웠다. 왜냐하면 그들이야말로 로마번영의 수혜자이었기 때문이다.
2천년의 세월이 흐른 얼마 전 한국에서는 천안함이 폭침되고 연평도가 포격을 당하던 국가비상 시기에 청와대 상황실에 모였던 국가안보회의 멤버들 중 다수가 현역복무를 면제받았다는 사실이 알려지면서 국민들이 분노했던 적이 있었다.
대선기간 중에는 각종 여론조사에서 한국사회의 가장 중요한 문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불공정사회’라고 답한 국민들이 가장 많았다. 젊은이들은 취업기회가 불공정하다고 느끼고 직장인들은 승진과 처우가 불공정하다고 느끼며 중소기업인들은 경쟁이 불공정하다고 느낀다.
한국사회를 균열시키고 있는 이념갈등, 계층갈등, 세대갈등, 지역갈등을 완화시키기 위해서는 다각적인 노력을 기울여야 하겠지만 공정사회를 만드는 것이야말로 가장 시급하게 추진해야 할 일이다. 기회가 균등하고 경쟁과정이 공정하면 이념의 좌우, 계층의 상하, 세대의 노소, 지역의 동서남북을 막론하고 경쟁의 결과에 승복하고 우리 사회에 대한 소속감과 동질감이 높아져서 갈등과 대립의 소지가 줄어들 것이다.
공정사회와 복지
경쟁이 공정하려면 모든 참가자들이 동일한 출발선상에 위치해야 한다. 달리기에서 트랙의 안쪽과 바깥쪽의 출발위치를 달리하고, 체급경기에서 몸무게에 따른 구분을 두는 것은 누가 보아도 공정한 규칙이다. 그러나 사회현상에서 기회를 균등하게 만드는 것은 어렵고도 복잡한 사안이다. 부자부모를 둔 사람, 얼굴이 잘 생기고 키가 큰 사람, 머리가 좋은 사람은 그렇치 않은 사람보다 유리한 출발선상에 있고 같은 노력을 한다면 성공 가능성도 높다. 물론 집안은 부유하나 똑똑하지 않은 경우가 있고 얼굴은 잘 생겼지만 성격이 소극적인 경우도 있어서 종합적으로 볼 때 태생적인 불공평을 완화해 주는 것이 세상의 이치이기도 하다. 그렇지만 경쟁이 날로 치열해지는 현대사회에서는 출생의 불공평이 불공정한 경쟁으로 이어지는 일이 다반사다.
지금 우리나라는 복지확대에 대한 찬반 논쟁이 뜨겁다. 그런데 복지확대는 취약계층에 대한 시혜적 차원을 넘어서서 모든 국민들에게 균등한 기회를 부여하겠다는 적극적인 의미를 함축하고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 박근혜 당선인은 무상보육, 고교의무교육, 대학생 반값등록금, 4대 중증질환 전액 보험급여 등 복지의 대폭 확대를 공약했고 인수위에서는 구체적인 예산조치를 검토하고 있다. 이는 보육과 교육기회의 균등이 사회진출 이후의 공정한 경쟁으로 이어지고 질병치료의 균등이 근로기회의 균등으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그 의미가 크다고 하겠다.
공정사회와 노블레스 오블리주
사회적으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힘을 가진 계층이 눈앞의 이익만 도모하고 사회적 책임을 다 하지 않는 사회는 공정한 사회가 될 수 없다. 2차 세계대전 때 자기가 지휘하던 군함이 침몰하면서 입은 부상으로 평생을 고생한 케네디 전 미국 대통령은 전시에 안전한 후방으로 배치되는 행운과 총탄이 빗발치는 전방으로 배치되는 불운이 교차하는 것은 개인이 받아들일 수밖에 없는 운명이라고 했다. 백만장자인 아버지를 뒀으면서도 전쟁터에서 목숨을 잃을 뻔한 군인의 말이기 때문에 듣는 사람들은 수긍을 한다. 만약에 부친의 재력을 이용해서 후방으로 빠진 군인이 같은 말을 한다면 오히려 반감을 불러일으킬 것이다.
이번 대선에서 경제민주화가 화두가 됐다. 한편에서는 선거 때마다 표심을 얻으려고 재벌 때리기를 반복하는 정치포퓰리즘이라고 매도하는 반면 다른 한편에서는 한국경제의 불균형을 해소하고 공정한 시장경제를 열어가기 위해서 꼭 필요한 시대적 과제라는 의견도 있었다.
재벌 대기업의 소유주는 막대한 부를 소유하고 지대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는 높은 신분에 위치하기 때문에 높은 도덕적 의무를 요구받는다. 기업을 잘 경영해서 세금을 제대로 납부하고 고용을 늘리는 것은 최고경영자의 당연한 의무지만 재벌 소유주는 더 나아가 종업원, 협력중소기업, 소비자 등 이해관계자들과 공생해야 하는 책임도 지고 있는 것이다.
경제민주화를 이루는 바람직한 경로는 재벌 소유주들이 자발적으로 노블리제 오블리주(noblesse oblige)를 실천하는 것이다. 우리 속담에 ‘개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말이 있다. 미국의 록펠러나 카네기 등 초기자본주의 시대의 대기업주들은 생전에 비난을 많이 받았으나 후대에는 록펠러재단, 카네기-멜론대학 설립의 공로로 칭송을 받고 있다. 우리나라 재벌 소유주들이 ‘정승처럼 벌어서 정승처럼 쓴다’는 새로운 경지를 열어 간다면 경제민주화는 시장자발적으로 이뤄질 것이다. 그렇지 않고 규제적 법률과 행정조치만으로 경제민주화를 이루려고 하면 그 실효성이 확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경제활력을 저하시키는 부작용이 커질 염려가 있다.
공정, 통합, 경제위기 극복
사회가 공정해지면 경쟁의 결과에 대해서 승복하는 기풍이 진작되고 경쟁촉진적 정책에 대한 반대가 줄어들어서 우리 경제의 활력이 다시 살아나고 경쟁력이 강해지게 된다.
좋은 일자리를 만들기 위해서 서비스산업을 선진화해야 한다는 총론에는 동의하면서도 투자개방형 의료법인, 외국학교 유치 등 각론에 들어가면 반대가 거세다. 이는 가진 자들만 질 높은 의료서비스와 교육서비스에 접근할 수 있게 돼 양극화를 더욱 악화시킨다는 우려 때문이다. 만약 우리 사회가 기회가 균등하고 경쟁이 공정하면서 기본적인 교육과 의료서비스를 보장하는 사회라면 그 우려는 현저히 완화될 것이다.
공정한 사회의 구성원들은 자기가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을 것이라고 기대하기 때문에 더욱 열심히 일할 것이다. 이러한 자발적인 동기부여야말로 지금 우리 경제가 안고 있는 무기력증에서 탈피해 제2의 도약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