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의 언어학자이며 사회운동가인 헬레나 노르베지 호지(Helena Norberg Hodge)는 그의 저서「오래된 미래」(Ancient Futures)에서 이렇게 얘기했다.
“전통문화는 지역의 자원으로서 그 지역의 특정한 환경의 모습을 반영하는데 지금 그 자원들은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한 방편이 되어 고유의 문화와 독립성을 포기하도록 강요받고 있으며, 그것은 인류의 삶의 질이라는 측면에서 중대한 손실을 초래한다.”
우리나라도 예외는 아니다. 자본과 에너지 집약적인 농산업의 발전, 도농 간 생활환경 격차 해소를 위한 도시지향적 지역개발 과정에서 농어촌의 독창적 가치를 지닌 농어업시스템, 경관자원이 훼손되거나 소멸되고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 아래 최근 OECD 국가의 농촌정책 패러다임은 농업소득 향상, 농업경쟁력 제고, 지역균형 발전 등에서 지역자원의 가치화, 지역 특화개발, 미 이용 지역자원의 활용 등으로 전환되고 있으며 주요 정책영역도 농업에서 관광·휴양, 경관·환경, 전통 문화 등으로 확대되고 있다. 이와 같은 흐름 속에서 EU는 유럽농촌유산가이드(European Rural Heritage Guide)를 제정해 농촌문화유산을 자원으로 하는 개발계획 등에 적용하고 있다. 이미 일본은 주민의 일상생활, 생업 및 지역 고유 풍토에 의해서 형성된 전형적이고 독특한 경관을 문화적 경관으로 지정·보호하고 있다.
지난해 ‘농어업유산지정제’ 도입…국가 차원에서 관리·활용
유엔식량농업기구(FAO)는 세계 각국의 독창적인 농업제도, 고유한 농사지식체계, 생태경관, 농업생물다양성 등을 보전하기 위해 2011년부터 세계중요농업유산(GIAHS; Globally Important Agriculture Heritage System)을 지정해 등재해 오고 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오랜 기간 동안 형성·진화되어 온 보전·유지·전승할 만한 가치가 있는 농어업 활동·시스템 및 그 결과로 나타난 농어촌 경관 등의 자원을 국가가 지정하고 효율적으로 관리하고 활용하기 위해 지난해 4월 농어업유산지정제도를 도입했다.
국가중요농어업유산으로 지정되기 위해서는 100년 이상의 전통성을 갖추고 보전·유지 및 전승할 만한 가치가 있어야 하며 생물다양성 향상에 기여하고 주민들이 농어업유산을 보전·유지·활용할 협력체계를 갖추고 있어야 한다.
지정절차는 농어업 유산이 대부분 사유재산이고 농어업행위가 이뤄지고 있는 점을 감안해 강제지정이 아닌 주민 신청에 의한 자율적 상향식 지정방식을 택했다. 국가지정 유산의 관리도 시장·군수와 주민협의회 간에 자율관리협약서를 체결해 주민이 자율적으로 관리하도록 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2012년 전국 시·군에서 신청한 64건의 농어업유산자원에 대해 서류심사와 현장심사를 실시한 후, 최종 심사대상까지 올라 온 총 13건 중 ’청산도 구들장논‘과 ’제주도 흑룡만리 돌담밭‘ 2건을 지난 1월 25일 농업유산으로 지정했다.
FAO 세계 중요농업유산에 등재 준비
국가농업유산 제1호로 지정된 전남 완도의 ‘청산도 구들장논’은 전통온돌과 유사한 구들장을 통수로 역할을 할 수 있도록 논바닥 밑에 설치하고 그 위에 진흙으로 틈새를 메운 후 흙을 덮어서 만든 논으로서, 경지면적이 적고 돌이 많아 물 빠짐이 심한 청산도의 열악한 농업환경을 극복하기 위한 조상들의 애환과 지혜가 담겨 있다.
제2호로 지정된 ‘제주도 흑룡만리 돌담밭’은 바람이 많은 제주 기후로부터 작물 보호, 토양과 씨앗의 비산 방지, 우마(牛馬)들의 농경지 침입 방지 및 소유지의 구획 등을 위해 고려시대 고종 때부터 제주 현무암으로 만든 2만2천여㎞에 달하는 밭 주변의 담으로서 척박한 자연환경과 맞서 싸운 제주인의 개척정신과 지혜를 엿볼 수 있다.
농림수산식품부는 전통자원의 보전, 생물다양성의 증진 및 농어촌의 활성화를 위해 앞으로도 농어업 유산자원을 지속적으로 발굴하고 국가유산으로 지정할 계획이다. 중장기적으로는 유형·농어업 분야로 한정하고 있는 지정대상을 무형·농어촌 분야까지 확대할 예정이다. 아울러 국가유산으로 지정되면 ‘농어촌 다원적자원 활용사업’을 통해 3년간 개소당 15억원의 예산을 투입, 1단계로 멸실·훼손·변형자원은 복원해 유산자원의 품격·전통성 등을 갖추도록 하고, 2단계로 경관을 훼손하거나 방문객에게 혐오감을 주는 주변환경을 정비하며, 3단계로는 유산자원을 관광상품화해 농어촌의 소득과 연계할 수 있도록 특화상품을 개발하고 휴양공간 등을 조성할 계획이다.
또한 국가중요농어업유산 1, 2호로 지정된 청산도 구들장 논과 제주 돌담 밭은 우리나라의 전통 문화를 외국인에게 소개하고 외국관광객의 방문을 유도하기 위해 FAO 세계 중요농업유산에 등재를 준비하고 있다.
농어업 유산을 단순히 개발중심적·경제주의적인 관점으로 보고 평가하는 것은 다원적 기능을 가지고 있는 농어촌을 폄훼할 뿐만 아니라 장구한 역사와 전통적 가치를 훼손함으로써 우리의 정체성마저 부정하는 결과를 초래한다. 농어업 유산은 우리가 보호하고 지켜야 할 자산일 뿐만 아니라 농어촌의 발전을 위한 새로운 성장 동력이면서 시공을 초월하는, 도농이 상생하는, 세계인이 찾는 소통의 무대가 될 수 있다.
앞으로 우리가 농어촌 자원의 보전·활용에 더 많은 애정과 관심을 가진다면 헬레나 노르베지 호지의「오래된 미래」라는 모순된 저서명처럼 과거의 유산이 우리의 미래를 이끄는 동력이 될 수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