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내용으로 건더뛰기

KDI 경제교육·정보센터

ENG
  • 경제배움
  • Economic

    Information

    and Education

    Center

세계는 지금
인류의 건강 vs 자유무역 증진, 공존할 수 없을까
김강립 주제네바대표부 공사참사관 2013년 04월호

보건기술 접근성 제고에 관한 WHOㆍWTOㆍWIPO 공동보고서

 

지난 2월 5일 스위스 제네바에 위치한 세계무역기구 대회의장에는 좀처럼 한자리에 모이기 어려운 국제기구 수장 3인이 회동했다. 2년여 간 공동작업의 결과물인 보건기술 접근성 제고에 관한 세계보건기구(WHO), 세계무역기구(WTO), 세계지식재산권기구(WIPO) 공동보고서 「Promoting Access to Medical Technologies and Innovation : Intersections between public health, intellectual property and trade」 발간을 축하하기 위해서였다. 이들 거대 국제기구의 수장들은 인간의 생명연장과 건강증진을 위한 기술혁신을 장려하면서도, 빈곤으로 인해 혁신의 결과인 의약품이나 의료기술을 이용하지 못하는 사람이 없는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고 주장했고 앞으로 이를 위해 함께 노력하겠다고 선언했다.


인류의 건강증진을 위한 노력은 새로운 의약품과 의료기술의 개발을 통해 놀랄 만한 성과를 거뒀고 이러한 혁신적 건강기술 덕분에 과거에는 꿈꾸지 못했던 건강수준을 누릴 수 있게 됐다. 하지만 그 이면에는 혁신적 기술개발 노력을 상업적으로 보상하는 국제질서로 인해 개발된 제품이나 기술의 혜택에서 소외당하는 경우가 세계 어디에선가 발생하고 있는 상황이다. 또한 보건제품에 대한 교역확대를 통해 전 세계적 건강증진에 기여하고 있지만, 자유무역 확대에 따라 세계인의 건강을 저해하는 물품들이 더 많이 유통되는 것도 엄연한 현실이다. 예를 들어 아시아와 아프리카의 저개발국가 국민들 가운데 소위 에이즈치료약이나 결핵, 말라리아 의약품이 없어 소중한 생명을 잃게 되는 경우가 빈번하게 발생하고 있다. 아프리카 지역에 만연한 질병의 경우 상업성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글로벌 거대 제약기업들이 연구개발 투자를 전혀 하지 않는 경우도 있다. 다른 한편에서는 인간의 건강에 위해한 담배, 주류, 심지어는 건강에 해로운 식품(부자나라에서는 폐기 처분되는)들이 자유무역이라는 미명 아래 활발히 유통돼 인류의 건강을 해치는 부정적 결과를 초래하기도 한다.


이 같은 문제 인식하에 WHO를 중심으로 WIPO와 WTO 등 국제기구, 민간단체, 학계 등은 인류의 건강을 증진시키기 위해 무역과 지식재산권에 관련한 국제질서가 어떻게 조화롭게 개선돼야 할 것인가를 논의해 오고 있다. 앞서 언급한 공동보고서는 이러한 노력의 일환으로 진행된 작업이다. 건강권과 무역, 지식재산권과 관련된 논의들은 향후 보건 문제뿐 아니라 유사한 성격의 환경기술 등에도 주는 시사점이 크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혁신적 의약품에 대한 접근권 보장 필요


무역 및 지식재산권 관련 국제규범의 공중보건에 대한 적극적 조치, 즉 건강증진을 위한 접근은 우선 기존의 의약품 등에 대한 소외계층의 이용을 어떻게 보장할 것인가에 집중돼 있다. 결핵, 말라리아, 기생충, HIV 등과 같이 이미 치료할 수 있거나 적어도 증세를 악화시키지 않도록 통제 가능한 질병들에 대한 의약품들이 개발돼 있음에도 불구하고, 가격 문제로 이용하지 못하는 안타까운 경우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에 관한 논의가 그것이다. 주로 의약품의 지식재산권 보호로 인한 가격장벽으로 인해 저소득국가의 환자들이 의약품 이용에 겪는 장애를 줄이는 것이 문제의 초점이다.


가격장벽과 더불어 논의되고 있는 주제는 보건의료에 관한 연구개발의 형평성을 높이기 위한 방안이다. 아프리카의 많은 기생충ㆍ감염성 질환 등은 세계적 제약기업들의 관심영역에서 벗어나 있다. 막대한 자금을 투자해서 의약품 연구개발에 성공한다고 하더라도, 실제 구매력이 극히 낮은 인구에서 주로 발생하는 질환에 대한 의약품 개발은 투자의 우선순위가 낮을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 결과 세계 질병부담의 11%는 빈곤국가의 방치된 질환에서 발생하고 있으나, 이에 대한 연구개발 투자는 겨우 1.3%에 불과한 형편이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해 논의된 결과가 2012년 초 발표돼 실행방안에 대한 국제적 협의가 WHO에서 진행되고 있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Report of the Consultative Expert Working Group on Research and Development 2012).


실행방안으로 제시된 내용은 첫째, 각국 정부가 경제수준에 따라 GDP의 일정 비율(0.01% 정도) 이상을 보건의료 연구개발에 의무적으로 투자해 재원조달의 지속 가능성을 확보하고 둘째, 이러한 연구개발의 성과는 독점적 특허권을 배제해 보편적으로 활용(open innovation)할 수 있도록 하고 셋째, 이러한 방식을 통해 연구개발 투자비용과 의약품 가격의 연동을 차단하며 넷째, 이러한 구조를 국제규범화함으로써 이행력을 높이자는 것이었다. 이에 대한 WHO의 논의과정은 앞으로도 각국의 상반된 입장과 이해관계에 따라 지루하게 전개될 것으로 예상된다.


올해 초 합의에 따라 향후 몇 년간은 글로벌 차원의 보건의료 연구개발 투자현황을 파악하는 시스템을 구축하는 데 주력할 것이며 시범사업을 통해 연구개발 투자조정을 검증하게 될 전망이다. 따라서 단기간 내에 보건의료 연구개발 성과물에 대한 지식재산권 보호를 제한하는 규정을 도입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무엇보다도 의약품 등 보건제품의 지식재산권 보호가 약해질 경우 민간에게는 경제적 인센티브가 없어지고 의약품 등이 공공재 성격을 띠게 될 가능성이 크다. 다시 말해, 공급 측면에서는 새롭고 도전적인 연구개발 투자가 크게 위축될 것이며, 수요 측면에서도 가급적 정당한 비용지불을 회피할 수 있는 방안에 집착할 가능성이 높기 때문이다. 없는 약보다는 비싸더라도 혁신적인 약이 개발돼야 한다는 입장도 일리가 있다. 혁신적 연구개발 노력에 대한 동기 부여를 위축시키지 않으면서도 저소득국가의 접근성을 높여야 하는 어려운 문제를 풀기에는 상당한 시간이 소요될 것으로 예상된다.


건강에 해로운 상품 교역에 대한 규제강화 논의 중


앞의 예와는 반대로 국제교역에 제한을 부과해 공중보건의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경우도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담배규제기본협약(FCTC)을 통한 담배의 생산과 소비를 줄이기 위한 노력이다. 현재 담배규제협약엔 전 세계 174개국이 가입하고 있어 보건 관련 국제협약 가운데 가장 강력하게 작동하고 있다. 우리나라는 지난해 11월부터 담배규제협약 당사국총회 의장국으로 활동하고 있는 만큼, 담배로부터의 건강폐해를 줄이기 위한 글로벌 노력을 선도해야 하는 입장이다. 담배규제협약은 담배의 소비와 공급에 대한 동시 규제조치들을 통해 접근하고 있다. 우선 담배제품의 유해성분 규제, 담배수요 감소를 위한 가격 및 조세조치, 담배 재배농가들이 다른 작물로 대체하도록 지원하는 방안 등 다양한 수단을 담고 있다.


담배제품의 상표권 보호와 관련해 호주 정부가 도입한 단순포장규제(plain packaging)라는 강력한 조치가 WTO에 지난해 3월 제소돼 있다. 즉, 지난 12월부터 시행 중인 이 조치는 개별 담배제품들이 약 25% 이하의 포장에 대해서만 자사 브랜드를 표기할 수 있고, 나머지 포장은 담배의 유해성을 보여주는 사진이나 경고문구 등을 담도록 해 수요감소를 유도하는 규제다. 이에 대한 다국적 담배제조사의 위헌소송에서 지난해 8월 호주 대법원은 정부의 손을 들어줬으나 WTO의 분쟁해결절차는 어떠한 결론을 내릴지 귀추가 주목되고 있는 상황이다. 제조사의 재산권인 상표권 보호와 공중보건의 보호라는 정책목표가 충돌하고 있는 이 사례는 향후 다른 분야에서의 결론을 가늠할 수 있는 첫 선례가 될 것이다. 그러나 유럽, 뉴질랜드 등도 호주와 유사하거나 더욱 강력한 조치를 검토하고 시행할 예정이어서 앞으로 건강유해 제품의 무역질서에 대한 규제는 더욱 강화될 것으로 전망된다.


담배와 같이 건강에 위해한 품목의 국제교역을 제한하는 조치도 논의되고 있지만, 한편에서는 불법, 부정, 불량, 위조 등의 방법으로 제조돼 함량이 과다하거나 성분이 불량한 의약품 등의 유통을 막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고 있다. 우리나라에서도 문제가 되고 있는 가짜 발기부전치료제 등의 유통을 근절하는 것은 어느 한 국가의 노력만으로 가능하지 않다. 글로벌 차원의 공동노력이 필요하다는 인식하에 지난해 11월 아르헨티나에서 최초로 부정불량의료제품 근절을 위한 WHO 회의가 열려 향후 몇 년간 이 문제에 대한 집중적인 논의가 진행될 예정이다(필자 주; 1988년 제41차 WHO 총회에서 처음 문제가 제기돼 결의안이 채택됐으나 정부 간 논의체는 2012년 11월에서야 비로소 제1차 회의를 개최해 Substandard/Spurious/Falsely-Labelled/Falsified/Counterfeit 제품을 논의대상으로 진행하고 있다).


자유무역 측면에서 건강위해 식품의 유통 문제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난 2011년 사모아가 WTO에 가입하기 위한 협상이 진행되는 과정에서 미국 정부는 사모아 정부가 자국민의 건강보호를 위해 취했던 칠면조꽁지 수입금지 조치를 문제 삼았다. 즉, 지방덩어리로서 미국 내에서는 버려지는 칠면조꽁지가 사모아의 저소득층에게는 지방을 맛볼 수 있는 값싼 식품으로 환영받았고, 이는 사모아 국민들의 건강에 심각한 위협이 돼 사모아 보건당국은 수입금지 조치를 발동했다. 하지만 결국 무역자유화라는 가치에 밀려 WTO 가입 협상과정에서 다시 허용하고 말았다. 유사한 사례로 피지의 양고기 수입금지 조치가 뉴질랜드의 압력으로 취소된 바도 있다. 이와 같이 자유무역을 통해 세계경제를 활성화하는 목표와 세계인의 건강을 지켜야 하는 공중보건 증진의 목표가 충돌하는 경우가 계속 발생하고 있다.


인류의 질병극복과 건강유지를 위한 새로운 제품과 기술에 대한 혁신적 도전은 계속돼야 한다. 또한 건강제품들의 원활한 국제유통과 교류도 보장돼야 한다. 그러나 다른 한편 인도적 관점에서 제기되는 의약품의 접근성 보장, 의약품 연구개발의 형평한 투자, 건강을 해치는 제품의 교역규제 등에 대한 목소리도 무시할 수 없다. 인류의 건강도 보호하면서 무역자유화를 촉진하고 동시에 혁신적 기술개발도 장려해야 하는 어려운 숙제를 풀 수 있는 솔로몬의 지혜가 공중보건과 무역 및 기술혁신의 국제질서에서도 절실하게 필요한 시점이다. 

보기 과월호 보기
나라경제 인기 콘텐츠 많이 본 자료
확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