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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사물을 배운다자연이 키우고 우주가 담그는 맛
서지영 (『나라경제』기자 ) 2008년 12월호
그 옛날 우리 조상들은 푸성귀의 씨를 뿌리고 다듬고 삭히고 땅에 묻어 덮는 모든 과정에 생명을 존중하는 따스한 마음을 담았다. 제 몸을 씻듯, 손자의 얼굴을 닦아주듯 재료 하나하나에 정성스런 손의 훈김을 내어줬다.

지금은 시대와 입맛이 바뀌어 손이 자주 가지도 않고, 마트에서 손쉽게 쇼핑할 수 있는 음식이 됐지만, 김치 한 포기에는 한국의 역사와 문화가 깃들어 있고 우주와 자연의 원리를 활용한 지혜가 녹아 있다. 마치 어머니의 자궁에서 태어난 아기가 성인으로 자라기까지의 과정과도 같은 김치의 인생. 11가지 키워드로 알아본다.

가꾼다

개화기 한국에서 활동했던 선교사 게일은 한국사람의 밭농사를 보며 ‘원예(園藝)’라고 했다. 추우면 짚으로 덮고 땡볕은 짚으로 발을 얽어 가렸다. 흙이 굳으면 긁어주고 뿌리가 드러날 성싶으면 흙을 덮었다. 바람이 세면 대를 세워 묶고, 가지가 처지면 쳐들어 맸다. 한 줄기에 꽃이 많으면 서로 싸워 못 큰다 해서 꽃을 땄다. 손의 훈김이 푸성귀에 자주, 듬뿍 닿을수록 잘 자라고 맛이 더하는 것이라고 조상들은 생각했다.

다듬는다

옛 어머니들은 손으로 다듬은 푸성귀의 맛과 그렇지 않은 맛을 분간했다. 다듬을 때부터 손가락 맛이 배어들기 때문이다. 모든 푸성귀들은 손으로 시든 잎을 떼고 뿌리를 무질러내며 이물을 골라냈다. 사람 살에 칼을 대면 피가 흐르듯, 푸성귀에도 칼을 대면 그 맛을 좌우하는 피가 흘러버린다 했다. 다듬는 행위에도 생명을 파손시켜서는 안 된다는 우리 조상들의 휴머니즘이 투영돼 있다.

씻는다

모든 푸성귀는 세벌 씻는 게 관례다. 세벌 씻지 않으면 아들을 못 낳고, 헹구기가 깔끔하지 못하면 태어날 아기의 얼굴이 검어진다는 말도 생겼다. 채소 씻어놓은 걸 보고 그 여인의 속살 예쁘고 미운 것을 가늠하는 규방 관습도 있었다. 고추는 씻어 말린 후에도 깨끗한 행주로 낱낱이 닦았다. 3•5•7 홀수로 닦고 행주 빨기를 거듭했다. 홀수는 양기(陽氣)로 사내아이를 상징해, 홀수 번 닦음은 그것을 먹는 사람이 아들 낳기를 소원하는 행위다. 정성들여 손맛을 들이면서도 그 행위에 정서적 알파까지 곁들이는 게 우리의 문화다.

썬다

1960년, 펄벅 여사는 한국을 찾았을 때 굵기가 고르고도 가늘게 썰어놓은 무채가닥을 보며 감탄했다. 한국 사람은 손바닥과 손가락의 재간을 좌우하는 장장근(長掌筋)이 유난히 발달했다. 채소에 철물을 대면 맛이 반감한다는 철학 때문에, 궁중에서도 여염집에서도 김장채소를 썰거나 봄나물을 캘 때 쇠칼 대신 대나무칼을 썼다. 마늘이나 생강은 모두 칼날 아닌 칼자루로 다지거나 으깼고 고추는 돌확에 갈아 썼다.

간다

우리 조상들은 음식 재료를 파쇄하는 방법의 차이에서 생기는 미각 차이에 별나게 민감했다. 고추를 다졌을 때, 손으로 으깼을 때, 절구로 빻았을 때, 돌확에 갈았을 때의 맛이 다름을 알았기에 조리마다 구분해 썼다. 고추를 돌확에 갈 때도 분쇄 정도를 세가름해 좌우로 가는 횟수가 달랐다. 돌확을 누르는 압력도 팔꿈치힘, 어깨힘, 허리힘으로 나눠 그 힘들을 번갈아 씀으로써 김치 맛이 달라짐도 알았다.

절인다

절이는 것은 옷에 땀이 절고 아기들 바지가 오줌에 절며 님 멀리 두고 그리다가 마음에 사랑이 저려오듯 ‘서서히 조금씩 간이 배게 하는 과정’이다. 조상들은 농도가 다른 소금물에 일정시간을 담갔다가 이리저리 옮겨 절이기를 3•5•7•9일간 계속했다. 두꺼운 뿌리부분은 켜켜마다 진한 소금으로 절이고 연한 잎부분은 연한 소금물에 담갔다. 소금 농도의 마술로 김치의 아삭아삭 씹히는 맛을 살렸고, 그로써 그 집 며느리의 솜씨를 평가했다.

담근다

김치 맛의 오묘함은 소의 배합에 따른 마술에서 온다. 절인 배추에 소를 만들어 넣어 독 속에 차곡차곡 쟁이는 과정을 ‘담근다’고 한다. 양념의 양적•질적 배합에 따라 김치 효소를 달리해 다양한 김치 맛을 만든다. 가문마다 다른 어머니와 아내의 ‘손맛깔’로 가족들의 미각은 결속됐고, 그것이 향수의 씨앗이 되기도 한다.

삭힌다

한국인은 짜고 달고 쓰고 시고 매운 다섯가지 미각 외에도 ‘삭은 맛’을 지각하는 미역(味域)을 가졌다. 양복과 양옥집에 곧잘 적응하면서도 유독 먹는 것만은 쉽게 적응하지 못하는 까닭은 ‘제6의 맛’이 충족되지 못해 생기는 욕구불만이다. 발효돼 우러나는 김치의 맛깔스런 ‘삭은 맛’은 세상 어떤 식품에도 없다.

갊는다

대형 질그릇인 독은 덥고 차가운 외기의 전도를 가장 완벽하게 차단하는 자질을 지니고 있어, 일정 온도를 유지하는 데 가장 적당하다. 김치는 영하로 보존하는 게 이상적이지만 4℃를 항온으로 유지해도 석 달까지는 산패를 면할 수 있다. 한국만의 오지그릇인 독, 곧 김치를 갊는 전통의 위대한 창조물이다.

묻는다

흙은 여름에는 더위를 겨울에는 추위를 차단하는, 열전도율이 가장 낮은 건재다. 장기간 맛의 변질없이 음식을 보관하기 위해 흙의 단열효과를 십분 활용한 것이 바로 ‘묻음’의 지혜다. 조상들은 일찍 먹을 김칫독은 장독대 응달에, 그보다 늦은 겨울에 먹을 김칫독은 도장(흙으로 만든 보관가옥)에, 겨울을 내고 봄에 먹을 김칫독은 땅에 묻었다. 김치의 산패와 흙의 단열 물리를 현명하게 활용한 조상의 지혜다.

덮는다

겨울을 나기위해 장기 보관하는 김칫독을 묻거나 배추, 무를 봄까지 보관할 때, 그 보온•보습•방풍은 짚주저리가 해줬다. 부잣집이나 대가(大家)에서는 짚으로 막을 지어 김치류나 음식을 적온으로 보관했다. 짚에 둘러싸여 보호를 받고 그것에 열린 열매를 먹고 평생 살다가, 죽을 때 관 속에 짚을 깔고 땅에 묻히는 것이 한국인이다.

- 김만조•이규태 공저 『김치견문록』에서 발췌•정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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