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는 의료영상 판독과 임상 의사결정 지원부터 질병위험 예측, 개인 맞춤형 치료, 신약개발, 진료기록 작성과 병원 운영에 이르기까지 보건의료의 여러 영역으로 빠르게 확산되고 있다. 고령화와 만성질환 증가, 의료인력 부족과 의료비 상승에 직면한 각국에서는 AI가 의료의 질과 접근성, 업무 효율성을 함께 높일 수 있다는 기대가 크다.
하지만 기술적으로 우수한 AI가 개발됐다고 해서 보건의료 체계의 성과가 자동으로 개선되는 것은 아니다. 한 병원에서 높은 정확도를 보인 알고리즘이 다른 의료기관과 환자집단에도 같은 성과를 낸다는 보장은 없다. 진료기록 작성 시간을 줄이거나 더 많은 환자를 진료할 수 있게 되더라도 이것이 환자의 건강 개선이나 의료비 절감으로 이어지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AI 성능이 곧 보건의료 체계 성과와 직결되진 않아…
데이터 분절, 정책–현장 불일치, 인력난 등이 장애 요인
이러한 간극을 줄이려면 AI 기술 자체뿐 아니라 이를 뒷받침하는 디지털헬스 기반도 함께 살펴봐야 한다. OECD 보고서 「한눈에 보는 보건 2023」에서는 디지털헬스 준비도를 분석 역량, 건강데이터, 기술, 인적 요소의 네 차원으로 제시한다. 품질 높은 데이터와 안정적인 기술 기반, 이를 제대로 활용하고 관리할 사람과 조직이 함께 갖춰져야 기술의 편익이 실제 진료와 보건의료 체계의 성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OECD는 올해 발표한 「보건의료에서의 AI 확산」 보고서에서 의료 AI의 책임 있는 확산에 관한 문제를 한 단계 더 구체화했다. AI 활용은 빠르게 늘고 있지만 보건의료 체계 전체로 확산된 사례는 아직 제한적이며 분절된 데이터, 정책과 현장의 불일치, 규제의 불확실성, 거버넌스와 인적 역량 부족이 주요 장애 요인으로 지적된다. OECD는 이에 대응하기 위해 데이터와 인프라 등 ‘활성화 조건’, 효과와 위험을 관리하는 ‘안전장치’, 환자와 의료인 등의 ‘실질적 참여’, 그리고 안전성·투명성·책임성·형평성을 충족하는 ‘신뢰할 수 있는 AI’를 함께 갖출 필요가 있다고 본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지난 5월 마드리드에서 열린 OECD와 스페인 보건부 공동 국제회의에서도 확인됐다. 마드리드 회의에서 특히 눈에 띈 것은 이미 논의의 초점이 ‘AI를 도입할 것인가’를 넘어 ‘어떤 AI를, 누구를 위해, 어떤 기준과 책임 아래 활용할 것인가’로 옮겨가고 있다는 점이었다. 이 회의에서 한국은 의료의 질·접근성·효율성을 높일 AI의 잠재력을 강조하면서도 생명과 안전에 직결되는 보건의료 분야에서는 책임 있는 AI 확산을 위해 신뢰와 안전, 엄격한 검증이 전제돼야 한다는 의견을 제시했다. 특히 보편적 건강 보장의 관점에서 ‘AI for All’, 즉 인종·성별·지역에 관계없이 AI의 편익이 폭넓게 공유돼야 하며 이를 위해 데이터의 다양성과 공정성을 확보할 필요가 있다는 점도 강조했다.
의료데이터 상호운용성과 공익 목적의 2차 활용 필요…
의료인은 AI 도입부터 사후 관리까지 판단 역량이 필수
AI를 실제 보건의료 체계에 확산하려면 여러 제도가 함께 움직여야 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중요한 것은 데이터 기반, 의료인과 조직의 변화, 그리고 평가와 보상 체계다.
의료 AI의 첫 번째 기반은 데이터다. 그러나 데이터가 많다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의료기관마다 데이터의 형식과 의미가 다르고 필요한 정보가 여러 시스템에 흩어져 있다면 AI를 개발하고 검증할 때마다 같은 작업과 비용이 반복된다.
OECD의 최근 분석에서는 이를 해결하기 위한 핵심과제로 상호운용성(interoperability)을 제시한다. 이는 서로 다른 의료시스템과 기관이 데이터를 안전하게 주고받는 것을 넘어 그 정보를 같은 의미로 이해하고 실제 진료와 의사결정에 활용할 수 있는 역량을 뜻한다. 이때 공통된 기술표준을 마련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기관마다 다른 데이터 공유 방식과 관리 책임, 의료 현장의 업무 과정까지 함께 고려해야 한다.
이러한 과제는 최근 OECD 지표에서도 확인된다. 「한눈에 보는 보건 2025」에 따르면 2024년 온라인 디지털 건강서비스의 이용가능성은 비교 가능한 데이터를 보유한 국가들을 기준으로 평균 82%로 높아졌지만, 의료기관과 진료영역 간 상호운용성은 여전히 과제로 남아 있다. 같은 보고서에서 OECD 환자보고지표조사(PaRIS)는 연령과 교육수준 등에 따라 디지털 건강관리와 건강정보 이해 역량에 차이가 있음을 보여준다. 디지털서비스를 제공하는 것과 모든 국민이 실제로 그 편익을 누리는 것은 다른 문제인 셈이다.
데이터는 환자의 권리와도 연결된다. 지난해 OECD가 발표한 보고서 「OECD 국가의 개인 건강데이터 시스템」은 국민이 자신의 건강정보에 안전하게 접근하고 관리·공유할 수 있는 체계의 중요성을 강조한다. 동시에 AI를 다양한 인구집단에서 검증하고 편향을 줄이려면 연구와 공익을 목적으로 하는 건강데이터의 2차 활용도 필요하다. 개인정보 보호와 활용을 양자택일의 문제로 보기보다는 명확한 승인 절차와 안전한 분석 환경을 갖추는 것이 중요하다. OECD도 국가마다 다른 규칙과 절차를 조화시키는 것을 국경을 넘는 공익적 데이터 활용의 핵심 과제로 보고 있다. AI 시대의 데이터정책은 결국 더 많은 데이터를 모으는 경쟁이라기보다 필요한 데이터를 안전하게 연결하고 신뢰할 수 있게 활용하는 체계를 만드는 일에 가깝다.
두 번째는 사람과 조직이다. AI가 실제 임상 현장에 도입될 때 가장 크게 달라지는 것 중 하나가 의료인의 업무와 역할이다. 의료 AI에 관한 논의는 흔히 의사나 간호사가 AI로 대체될 것인지에 집중되지만 현재의 변화는 의료인력 전체의 대체라기보다 일부 업무의 자동화와 역할의 재구성에 가깝다.
OECD의 의료인단체 조사에서 단체의 72%가 의료 AI의 편익이 위험보다 크다고 응답했으며, 70%는 AI가 의료를 크게 변화시키더라도 의사가 여전히 중심적인 역할을 할 것으로 봤다. AI가 의사를 대체할 것이라고 본 응답자는 없었다. 이는 기술 자체보다 위험과 책임의 관리, 임상 현장의 필요가 반영된 도입이 중요하다는 인식을 보여준다.
따라서 의료인은 완성된 AI를 사용하는 최종 사용자에 머물러서는 안 된다. AI로 어떤 문제를 해결할 것인지 정하는 단계부터 설계와 검증, 실제 도입과 사후 감시에까지 참여할 필요가 있다. AI의 결과를 누가 확인할 것인지와 오류가 의심될 때 어떻게 대응할지도 명확히 해야 한다. 특히 AI의 판단을 지나치게 신뢰하는 자동화 편향(automation bias)이나 AI 활용이 일상화되면서 의료인의 독립적인 판단 역량이 약화될 가능성도 고려해야 한다.
그렇다고 모든 의료인이 프로그래머가 될 필요는 없다. 중요한 것은 AI가 어떤 데이터로 개발됐고 어느 환자집단에서 검증됐는지, 결과의 한계와 오류 가능성은 무엇인지 판단할 수 있는 역량이다. AI에 대한 투자는 의료인의 역량과 업무 방식, 조직의 변화에 대한 투자와 함께 가야 한다.
세 번째는 평가와 보상이다. 의료 AI는 실제 진료에 활용되기 전에 안전성과 정확성 등이 충분히 검증돼야 한다. 그러나 사전에 확인된 결과가 다양한 환자와 의료 현장에서도 그대로 나타나는지는 별개의 문제다. 환자 특성이나 데이터, 의료기관의 업무 환경에 따라 실제 활용 결과가 달라질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일부 AI는 새로운 데이터를 학습하며 계속 변화할 수 있다. 도입 당시 확인된 정확성과 안전성이 시간이 지나도 유지된다는 보장은 없다. 따라서 허가 이후에도 오류와 성능 변화, 환자 안전과 형평성에 미치는 영향을 지속적으로 점검할 필요가 있다.
OECD는 디지털 의료기기의 평가에 관한 국가 비교에서 한국을 포함한 6개국의 제도를 분석했다. 중요한 점은 규제기관의 허가와 보건의료 체계의 가치평가는 서로 다른 역할을 한다는 것이다. 보건의료기술 평가(Health Technology Assessment)는 안전성과 성능뿐 아니라 환자의 건강 개선, 비용, 의료 조직과 업무에 미치는 영향까지 살핀다. 예를 들어 AI가 진료기록 작성 시간을 줄여 의료진이 더 많은 환자를 볼 수 있게 됐다고 가정할 때 개별 의료기관에서는 생산성이 높아진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진료량과 비용만 늘고 건강 결과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보건의료 체계 전체에서 얻는 가치는 제한적이다. 결국 허가와 평가, 건강보험 보상, 도입 이후 모니터링이 유기적으로 연결돼야 혁신을 촉진하면서도 환자의 안전과 재정적 책임을 함께 확보할 수 있다.
한국, 디지털헬스 준비도 지표상 선도국에 포함…
축적된 제도적 기반을 건강 성과로 연계하는 것이 과제
한국은 이러한 전환을 추진할 수 있는 상당한 기반을 갖추고 있다. 「한눈에 보는 보건 2023」에서 한국은 건강데이터의 이용·연계, 상호운용성 표준 채택, 디지털 보안, 전자의무기록 인증, 이해관계자 참여 등 여러 디지털헬스 준비도 지표에서 선도국에 포함됐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OECD가 올해 발표한 「뉴질랜드 경제보고서」에서 한국의 디지털헬스정책을 별도 사례로 소개했다는 것이다. 연구개발(R&D) 투자뿐 아니라 관계부처 간 조정, 데이터·AI 테스트베드, 안전한 분석 환경과 기업의 데이터 접근 지원을 함께 추진해 온 점을 짚었다. 기술개발 못지않게 이를 검증하고 현장에 적용할 제도적 기반이 중요하다는 의미다.
이제 한국의 과제는 이러한 기반을 실제 건강 성과로 연결하는 데 있다. 보건의료 데이터와 AI 정책을 직접 담당했던 본인의 경험에 비춰 봐도 기술적 기반을 갖추는 것과 이를 실제 의료 현장의 변화로 연결하는 것은 다른 문제다. 결국 그 기술이 환자의 건강 개선에 도움이 되는지, 그 혜택이 폭넓게 돌아가는지, 건강보험 재정에는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를 함께 살펴봐야 한다.
앞서 마드리드 회의에서 한국이 강조한 ‘AI for All’도 이러한 맥락에서 의미가 있다. 의료 AI의 편익은 일부 대형 의료기관이나 특정 환자집단에 머물지 않고 지역·필수·공공 의료를 포함해 폭넓게 공유돼야 한다. AI의 형평성은 알고리즘의 편향을 줄이는 데 그치지 않으며, 이는 필요한 국민이 실제로 기술의 혜택에 접근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기도 하다. 이를 위해 정책도 R&D, 허가, 평가, 건강보험 보상과 사후관리가 서로 다른 방향으로 움직이지 않도록 설계돼야 한다. 의료 AI 정책의 목표는 좋은 기술을 더 많이 개발하는 데 그치지 않는다. 기술개발과 시장진입을 촉진하면서 국민의 건강 개선, 의료인의 지속 가능한 업무 환경, 접근성과 형평성, 보건의료 체계의 재정적 지속 가능성까지 함께 추구해야 한다.
마드리드에서 확인한 국제적 논의 역시 같은 방향을 향하고 있었다. 의료 AI 경쟁은 알고리즘 자체의 성능 경쟁을 넘어 유용한 기술을 안전하고 형평성 있게 보건의료 체계 안에 통합할 수 있는 제도적 역량의 경쟁으로 이동하고 있다.
한국은 이미 디지털 기반과 데이터 활용, R&D에서 상당한 자산을 축적해 왔다. 이제 이를 국민이 체감하는 건강 성과로 전환할 때다. 동시에 그 과정에서 축적한 경험을 OECD 회원국과 공유하고 건강데이터의 활용, AI-의 평가와 보상, 도입 이후 관리 등 국제 논의의 구체적인 의제를 형성하는 데도 기여할 수 있을 것이다. 기술혁신을 실제 보건의료 성과로 연결하는 제도를 얼마나 정교하게 갖추느냐가 AI 시대 보건의료의 중요한 경쟁력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