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5월 24일 새벽 2시, 세계지식재산기구(WIPO) 회의장. 의장이 조약 채택을 선언하자 깃털관을 쓴 아마존 원주민들이 마라카스를 흔들며 환호했고, 천여 명의 대표단은 기립박수를 보냈다. WIPO의 27번째 조약인 ‘지식재산, 유전자원 및 관련 전통지식에 관한 WIPO 조약’(이하 조약)이 탄생한 순간이었다. 조약을 지지해 온 개도국과 원주민 대표들에게는 23년 만의 역사적 성과였고, 출처 공개 의무가 특허제도를 흔들고 혁신을 저해할 수 있다고 우려해 온 국가들에겐 최악의 결과를 피했다는 안도의 순간이었다. 그 후 2년이 넘은 시점에서 이를 돌이켜보는 것은 다자주의의 승리로 평가되는 이 조약이 아직 발효도 되지 않은 상황에서 다렌 탕 WIPO 사무총장과 개도국들이 WIPO를 비롯한 다른 국제기구에 또 다른 논쟁을 일으키며 협상의 지형을 바꾸고 있기 때문이다. 이 조약을 다자주의의 결실로만 볼 수 없는 이유다.
40년 넘게 이어진 유전자원·전통지식에 관한 논쟁…
선진국–개도국 간 대립 속 2024년 최종 협상의 길 열려
논쟁의 시작은 1980∼1990년대로 거슬러 올라간다. 님(Neem) 나무 사건(인도가 수천 년간 써온 님 나무의 살충 효과를 미국 기업이 특허로 내자 인도 정부와 NGO가 이의를 제기해 특허가 취소된 사례), 강황 사건(1995년 미국 특허청이 인도계 과학자에게 상처 치료용 강황에 특허를 부여했으나 1997년 인도 과학기술부가 이의를 제기한 뒤 특허가 무효화 된 사례) 등 다국적 기업들이 개도국의 유전자원과 전통지식을 활용한 기술로 특허 확보를 시도한, 소위 ‘생물해적행위(Bio piracy)’가 문제였다. 생물자원이 풍부한 국가들은 글로벌 대기업들이 자국의 유전자원과 원주민의 전통지식을 개발해 큰 경제적 이윤을 창출하면서도 그 이익을 공유하지 않는 것을 문제 삼았다. 이러한 문제의식은 유전자원 이용에 따른 이익공유 원칙이 담긴 1992년 생물다양성협약과 2010년 나고야의정서로 이어졌다. 이에 따라 기업 등이 유전자원에 접근하려면 제공국의 사전통고승인(PIC)을 받고 상호합의조건(MAT)에 따라 원주민 등과 이익을 공유해야 하는 체계가 마련됐다. 다만 유전자원과 전통지식이 국경을 넘어 연구와 제품개발 단계를 거치면 실제 이용과 이익 발생을 추적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남았다.
실제 유전자원 및 전통지식 이슈가 WIPO에 들어온 것은 1999년 콜롬비아가 유전자원·전통지식·전통문양과 관련한 지식재산 보호 방안 마련을 제안하면서부터다. 이후 실태조사를 거쳐 2001년 WIPO에 유전자원·전통지식·전통문화표현물에 관한 정부간위원회(IGC)가 설치됐다. IGC 협상 초기부터 선진국과 개도국의 입장 차이는 컸다. 선진국은 유전자원 자체는 지식재산이 아니고 전통지식도 원칙적으로 공공의 영역(public domain)에 속하므로 별도의 권리를 부여하기 어렵다고 봤다. 반면 개도국은 자원주권을 근거로 이에 대한 독자적 보호제도(sui generis)를 요구하고, 생물해적행위를 막기 위한 출처 공개 의무를 주장했다. 선진국은 출처와 특허성은 별개이며 새로운 의무가 혁신·연구개발(R&D)과 특허의 법적 안정성을 해칠 수 있다고 맞섰다. 2010년 이후 문안 협상이 진행됐지만 공개대상과 의무 발생 요건, 허위·누락 공개 시 제재, 제도 도입의 필요성을 둘러싼 대립으로 2018년 사실상 교착됐다. 그러다 2022년 WIPO 총회에서 아프리카그룹이 제안한 외교회의 개최안이 표결로 통과되면서 2024년 최종 협상의 길이 열렸다.
바이오·제약 역량 뛰어난 한국, 미·일·영과 공조해
공개대상 확대하려는 개도국 시도 저지에 협상력 집중
한국은 오랫동안 유전자원 제공국과 이용국의 이해를 함께 가진 국가였지만, 외교회의 개최가 결정되던 2022년에는 입장을 분명히 해야 했다. 한국은 미국·유럽·일본에 이어 상당한 바이오·제약 역량을 갖췄고, 특히 바이오의약품 제조와 바이오시밀러 분야에서 국제 경쟁력을 확보했다. 이에 2022년 WIPO 총회에서 미국·일본·영국과 함께 외교회의 개최안에 반대표를 던졌으나, 다수 개도국과 유럽의 찬성을 막지는 못했다. 이후 조약 채택 자체는 불가피하다고 보고 미국·일본·영국 등과의 공조를 통해 출처 공개 의무 위반만을 사유로 한 특허 취소·무효와, 공개대상을 파생물이나 디지털염기서열정보까지 넓히려는 개도국의 시도 등을 저지하는 데 협상력을 집중했다.
2024년 5월 13일부터 24일까지 2주간 열린 외교회의에서는 거의 매일 나이트 세션을 개최했고 주말도 없는 강행군의 연속이었다. 그 결과로 완성된 조약 최종 문안은 선진국과 개도국 간 치열한 협상의 절충점이었다. 청구된 발명이 유전자원에 ‘기초한(based on)’ 경우 출원인은 그 원산국을, 관련 전통지식에 기초한 경우 이를 제공한 원주민 또는 지역공동체를 공개해야 한다. 해당 정보를 알 수 없으면 출처를 밝히고 그마저 알 수 없으면 모른다는 취지의 선언을 해야 한다. ‘기초한’의 의미는 해당 자원이 발명에 필요하고 발명이 그 자원의 특정 속성에 의존하는 경우로 정의됐다. 특허청이 출처의 진위를 확인할 의무는 없다. 미공개나 오류에는 적절하고 효과적이며 비례적 조치를 취해야 하지만, 사기 의도가 없는 한 공개 의무 위반만으로 특허를 취소·무효화하거나 권리행사를 불가능하게 할 수는 없다. 조약은 15개국이 비준서 또는 가입서를 기탁한 뒤 3개월 후 발효된다. 디지털염기서열정보를 공개대상에서 제외하고 제재의 한계를 분명히 했다는 점에서 우리의 핵심 협상 목표는 대체로 달성됐다고 평가할 수 있다.
지난 7월 말 기준 유전자원 조약의 비준·가입국은 4개국(말라위, 우간다, 알바니아, 페루)이다. 서명국이 44개국에 이르는 만큼 향후 1∼2년 내 발효될 가능성은 열려 있지만, 주요 특허출원국이자 바이오·제약 산업국인 한국·미국·일본·영국이 서명하지 않았고 가입할 가능성이 높지 않은 점도 조약의 실효성을 제한하는 요소다. 또한 중국·브라질·인도·스위스·노르웨이와 EU 등 40여 개국이 조약 채택 이전부터 국내법으로 출처 공개 제도를 운용하고 있었다는 점도 이번 조약으로 기업들의 특허 확보에 미치는 영향이 크게 달라진다고 볼 수 없는 이유다. 현재로서 유전자원 조약은 ‘채택에는 성공했지만 실제 작동은 검증되지 않은 규범’이라는 평가가 적절하다.
채택엔 성공했지만 작동은 검증 안 된 유전자원 조약…
우리 기업·연구기관에 추가 부담 초래할지 면밀히 따져야
조약 채택은 논쟁의 종결이 아니라 또 다른 논쟁을 예고하고 있다. 조약은 발효 4년 뒤, 출처 공개 의무를 다른 지식재산권과 유전자원 파생물로 확대할지와 신기술로 생기는 문제를 어떻게 다룰지를 검토하도록 하고 있다. 조약 개정을 위한 외교회의 참가 자격도 해결되지 않았다. 선진국은 WIPO 전체 회원국의 참가를, 개도국은 조약 당사국만의 참가를 주장했다. 결국 외교회의 참가 자격을 비엔나 협약의 해석에 맡겨 향후 분쟁의 여지가 남았다.
조약으로 인한 가장 직접적인 충돌은 특허협력조약(PCT) 실무그룹 회의에서 벌어졌다. 조약 제7조의 합의문은 출처 공개 요건을 PCT 제도 내에 반영할 수 있도록 체약국 총회가 PCT 규칙 개정의 필요성 검토를 PCT 동맹총회에 요청할 수 있게 한다. 그러나 지난해 2월 제18차 PCT 실무그룹 회의에서 브라질이 이를 의제화하자 미국 등 선진국은 조약이 발효되지 않았다는 이유 등을 들어 반대했다. 이로 인해 제18차 회의는 중단됐고 지난 2월 재개됐으나 바로 이어진 제19차 회의에서 브라질이 동일한 의제 상정을 재차 시도하자 미국이 의제 상정 자체를 반대하면서 제19차 회의가 다시 중단, 교착 상태에 빠졌다. 조약의 ‘검토 요청’이라는 한 줄짜리 단어가 그동안 기술적 성격이 강했던 PCT 회의를 정치적 대립의 장으로 바꾼 셈이다.
갈등은 다른 WIPO 회의체로도 번지고 있다. 집행자문위원회(ACE)에서 브라질 등 개도국은 유전자원 조약 채택을 규범적 근거로 삼아 생물해적행위와 유전자원·전통지식의 위조·도용을 의제화하려 하고 있고, 미국 등 선진국은 해당 사안은 ACE가 아닌 IGC 관할이라며 반대하고 있다. IGC에서도 전통지식과 전통문화표현물 보호 관련 문안 협상이 재개되면서 개도국과 선진국이 충돌하고 있다. 개도국은 유전자원 조약은 첫 단추일 뿐 공동체 권리, PIC·MAT 등이 반영된 권리 기반 중심(Right based)의 구속력 있는 국제조약을 목표로 하는 반면, 선진국은 각국의 여건에 맞게 이행할 수 있는 조치 중심(Measure based)의 연성법적 접근을 선호한다.
파장은 WTO에서도 감지된다. WTO에서는 2001년 도하 각료선언 이후 무역 관련 지식재산권 협정(TRIPS)과 생물다양성협약의 관계, 전통지식 보호, 특허 출원 시 출처 공개를 둘러싼 논의가 오랫동안 교착돼 왔다. 유전자원 조약은 다른 협정상의 권리·의무에 영향을 주지 않는다고 명시한다. 그럼에도 WIPO 회원국이 유전자원 조약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는 사실은 ‘출처 공개는 특허제도와 양립할 수 없다’는 선진국 측 주장을 약화시키고, TRIPS 제29조의 발명의 상세한 공개원칙을 생물자원 정보로 확장하려는 개도국 측 주장의 근거로 작용한다. 당장의 법적 효과보다 협상 지형에 미치는 효과가 더 크다.
그렇다면 유전자원 조약은 다자주의의 결실인가, 갈등의 씨앗인가. 답은 둘 다다. 23년의 대립 끝에 선진국과 개도국, 원주민 공동체가 최소한의 공통언어를 만들었다는 사실은 가볍지 않다. 완벽하지 않은 합의도 규범의 출발점이 될 수 있다는 점은 다자주의의 힘을 보여주기도 하지만, 합의는 갈등의 비용을 없애기보다 뒤로 미루기도 한다. 조약 해석, 적용 범위 확대, PCT 개정, IGC 등에서 새로운 전선이 형성되고 있다.
한국의 선택은 유전자원 조약 가입을 서두르지 않는 데 있다. 미국·일본·영국 등과 마찬가지로 출처 공개 의무가 기업과 연구기관에 추가 부담과 법적 불확실성을 초래할 가능성을 면밀히 따져야 한다. 조약의 발효가 늦어지거나 IGC 협상이 더디게 진행된다고 해서 반드시 우리에게 불리한 것도 아니다. 오히려 보호 대상과 권리주체, 공개된 지식의 취급 및 제재 수준에 대한 충분한 합의 없이 규범을 확대하면 국내 기업의 비용만 높일 수 있다. 다만 이러한 신중론이 PCT 실무그룹의 파행으로 이어져 한국 기업들이 많이 이용하는 PCT 시스템 개선에 악영향을 미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한국은 독일, 일본 등 유사 입장국들과 협력해 미국과 브라질의 대립을 완화하고 PCT 실무그룹 논의를 정상화하는 데 기여할 필요가 있다. 다자주의는 모든 새로운 규범에 동참하는 데서만 구현되는 것이 아니다. 불필요한 의무의 확산을 경계하면서도 기존의 국제제도가 정상적으로 작동하도록 관리하는 것 역시 책임 있는 다자주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