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7월 미국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AI 서밋에는 젠슨 황(엔비디아), 샘 올트먼(오픈AI), 다리오 아모데이(앤스로픽), 혹 탄(브로드컴)이 한자리에 모인 가운데 이재용, 최태원, 정의선, 이해진 등 국내 주요 그룹 총수들도 참석했다. 그리고 연단에 선 이재명 대통령은 이들 앞에서 ‘샌프란시스코 AI 선언’을 읽었다.
현재 AI시장을 두고 치열하게 다투고 있는 이들이 그 자리에 모인 이유는 AI 경쟁의 중심이 ‘공급망’으로 이동했기 때문이다. 2016년 알파고 시절의 키워드는 ‘알고리즘’이었고, 2023년 챗GPT 시절의 키워드는 ‘모델’이었다. 그리고 2026년의 키워드는 ‘공급망’이다. 아무리 뛰어난 모델도 반도체와 전력이 받쳐주지 않으면 돌아가지 않고, 아무리 좋은 반도체도 AI라는 수요가 있어야 제값을 받는다. 기술과 생산, 데이터와 에너지가 하나의 사슬로 엮이는 지금 시대에는 대체하기 어려운 고리를 쥔 쪽이 협상의 상석에 앉는다.
한국이 상석에 앉은 이유는 HBM이다. HBM은 AI 반도체 옆에 붙어 데이터를 실어 나르는 고성능 메모리인데, 이것을 제대로 만들 줄 아는 회사가 전 세계에 사실상 셋이고 그중 둘이 한국 기업이다. 이날 서밋 무대에 오른 글로벌 빅테크 4개 기업은 서로 경쟁하지만 겹치는 것이 하나 있다. 4개사 모두 한국 메모리를 쓴다.
공급망 시대의 협력은 기업 간 계약으로 끝나지 않는다. 데이터센터 한 곳이 웬만한 도시만큼 전기를 쓴다. 전력을 어디서 끌어올지, 어느 땅에 지을지까지 국가가 함께 보증해야 추진된다. 이 대통령이 직접 테이블에 앉은 이유다. 국내 기업과 글로벌 빅테크는 5년간 9,500억 달러(약 1,375조 원) 규모의 반도체 협력을 추진하는 데 합의했다. 삼성전자가 브로드컴과 2천억 달러, SK그룹이 엔비디아를 비롯한 미국 기업들과 7,500억 달러 규모의 협력을 진행한다. 이 돈은 한국이 지출하는 돈이 아니다. 대통령실은 이를 장기 구매 계약이라 설명했고, 영문 브리핑에서는 투자가 아니라 사전 주문이라고 더 분명히 밝혔다. 우리가 투자하는 것이 아니라 세계 최대 기업들이 우리 기업에 주문을 넣은 것이다.
다만 정확히 말해 아직 본계약이 진행된 것은 아니다. 삼성전자와 브로드컴 건은 양해각서, SK 쪽은 의향서 단계다. 품목과 규모는 적혀 있지만, 물량과 가격을 확정하는 후속 계약이 남아 있고 그 과정에서 숫자는 달라질 수 있다. 데이터센터 분야에서 합의된 5기가와트 규모도 마찬가지다. 정부는 이를 GPU 200만 장에 해당한다고 설명했는데, 여기에는 현재 세대의 칩을 기준으로 환산했다는 조건이 붙는다.
부품 공급국에서 인프라 보유국으로
숫자 외에 눈여겨볼 대목은 글로벌 빅테크와 국내 기업이 맺은 협력의 성격이다. 그동안 한국은 칩을 만들어 남의 데이터센터에 공급하는 쪽이었지만 이번에는 그 칩이 돌아가는 시설을 한국 땅에 세운다. SK텔레콤은 엔비디아의 차세대 플랫폼을 들여와 국내 최대 규모의 AI 팩토리를 짓기로 했고, 네이버는 엔비디아와 인프라 투자사 브룩필드로부터 100억 달러 규모의 투자와 금융 지원을 끌어냈다. 이 과정에서 엔비디아는 네이버의 주요 주주가 됐다. 삼성과 SK가 받은 것이 주문서라면, 네이버가 받은 것은 주주명부에 이름을 올린 동업자인 셈이다.
피지컬 AI에서의 위치 변화도 주목해야 한다. 현대자동차그룹은 엔비디아와 함께 개발한 로봇 레퍼런스 플랫폼을 축으로 피지컬 AI 전략을 내놨고, 자율주행 개발 플랫폼을 자사 차량에 통합하기로 했다. 기존에는 완제품 경쟁보다 핵심 부품 공급자로서의 포지셔닝이 현실적이라고 봤는데, 몇 달 사이 위치가 달라졌다. 부품을 대는 자리에서 플랫폼을 함께 만드는 자리가 된 것이다.
대기업만의 잔치도 아니었다. 서밋 현장에는 국내 AI 스타트업들이 함께 있었고, 브로드컴은 한국 스타트업과 차세대 AI 반도체를 공동 개발하겠다고 소개했다. 이튿날에는 국민연금공단이 실리콘밸리 소재 주요 벤처캐피털들과 협력에 나섰다. 기술의 악수 다음에 자본의 악수가 이어진 셈이다.
‘대체 불가’엔 유효기간이 있다
선언문에는 ‘대체 불가’라는 표현이 세 번 반복됐다. 그런데 이 말은 지금 대체가 어렵다는 뜻이지, 앞으로도 계속 그럴 것이라는 보장은 아니다. 선언이 나오고 며칠 지나지 않아 그 사실이 확인됐다. 중국의 D램 기업 창신메모리(CXMT)가 상하이 증시에 상장해 단숨에 본토 시가총액 최상위권에 올랐고, 비슷한 시기 중국이 반도체 노광장비를 자체 양산하기 시작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노광장비는 웨이퍼에 회로를 빛으로 그려 넣는 기계로, 사실상 네덜란드 한 회사가 독점해 온 품목이다. 시장은 이 두 소식에 크게 흔들렸다.
냉정하게 보면 위협의 크기는 아직 제한적이다. 중국 기업의 공정 기술 수준은 국내 기업보다 2~3세대 뒤처져 있고 수율도 낮다. 최첨단 HBM은 아직 만들지 못하고, 자체 노광장비 물량도 연간 수 대 수준이다. 문제는 현재의 실력이 아니라 방향이다. 상장으로 조 단위 자금을 확보했고, 막혀 있던 장비 병목이 뚫릴 수 있다는 신호가 처음 나왔다. 범용 제품에서 점유율을 늘리고 그 이익으로 첨단에 투자하는 전략은 30년 전 한국이 선발 주자를 따라잡을 때 썼던 공식이다. 이제 그 공식이 한국을 위협하고 있다.
이렇게 보면 5년 치 주문서의 의미가 달라진다. 그것은 매출 계획이기 이전에, 대체 불가의 유효기간을 미리 확보해 둔 시간이다. 남은 일은 서명된 약속을 실제로 돌아가게 만드는 것이다. 가장 큰 병목은 전력이다. 전기가 모자란 것이 아니라 보내는 길이 부족하다. 송전망 하나 짓는 데 10년이 넘게 걸리고, 민간 데이터센터의 상당수가 수도권에 몰려 있다. 선언문에 수도권과 지방이 나눠 맡는 다극 생산 거점이라는 표현이 들어간 이유가 여기에 있다.
기술 쪽 과제도 분명하다. 젠슨 황은 대통령과의 면담에서 “AI는 수입할 수 있지만 국가의 지능은 외주화할 수 없다”고 말했다. 완성된 AI는 구매할 수 있지만, 그것을 직접 만들고 우리 산업에 맞게 고쳐 쓰는 능력은 남에게 맡길 수 없다는 뜻이다.
가능성은 확인되고 있다. 최근 국내 스타트업 모티프테크놀로지스는 약 30명의 인력으로 5개월간 정부가 지원한 GPU 700여 장만 활용해 자체 설계한 대형 언어모델을 내놨다. 국제 평가에서는 중국 주요 모델과 대등한 점수를 받았다. 수십만 장 단위의 GPU가 오가는 판에서 도출한 의미 있는 결과로, 돈이 없어 최전선 경쟁은 무리라던 통념을 흔든 사례다.
잘 만드는 기업은 더 싸게 만드는 곳이 나타나면 밀린다. 한국은 잘 만드는 나라에서 없으면 안 되는 나라가 됐다. 다만 그 자리는 한 번 얻는다고 해서 유지되는 것이 아니라 계속 갱신해야 하는 자리다. 올해 말 시작되는 ‘모두의 AI’를 국민이 체감하게 만드는 일까지가 이번 선언에 딸려온 과제다. 선언은 출발선이지 결승선이 아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