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개입하지 않아도 AI 에이전트가 스스로 정보를 탐색·비교·협상하고 즉시 결제까지 완결하는 에이전틱 커머스(Agentic Commerce) 혹은 머신 이코노미(Machine Economy)가 이제 실험 단계를 지나 상용 인프라 경쟁 단계로 진입했다. 실제로 미국의 가상자산 거래소 코인베이스가 주도하고 구글·AWS·앤스로픽 등이 채택한 AI 에이전트 결제 프로토콜 ‘x402’는 올해 들어 누적 처리 건수 1억6,500만 건을 돌파했고, 이 가운데 99%가 달러 스테이블코인(USDC)으로 정산되고 있다.
스테이블코인은 법정화폐에 1대1로 연동되며 다음 네 가지 속성을 동시에 충족한다. 담보되는 가치 안정성, 블록체인 네트워크 위에서 수 초 내에 완결되는 실시간 초고속 정산, 카드 수수료 대비 수십 분의 1 수준에 불과한 초저비용 거래 처리 능력, 국경과 은행 영업시간에 구애받지 않는 24시간 글로벌 호환성이다. 이러한 속성으로 인해 스테이블코인은 이제 디지털경제의 기본 화폐이자 토큰증권·실물연계자산(RWA; Real World Asset) 시장을 완성하는 필수 인프라로 부상했다.
그러나 한국은 은행과 핀테크 업계 간 발행 주체를 둘러싼 지분 다툼, 만기 3개월 이내 국고채가 전체 국채의 1.8%에 불과할 만큼 부실한 단기국채시장, 예금 이탈과 통화정책 유효성 약화를 우려하는 한국은행의 신중론 등 이해관계의 충돌로 법제화가 계속 지연되고 있다. 그 사이 미국이 일명 ‘지니어스법’을 통과시켜 달러 스테이블코인을 제도화하고 결제시장을 장악하고 있다.
이에 따라 한국이 결제 표준 경쟁에서 뒤처질 경우 원화의 통화주권과 국내 핀테크산업의 성장 동력이 함께 잠식될 위험이 커지고 있다.
지금 필요한 것은 금융의 안정과 혁신을 함께 담는 정교한 설계다. 첫째, 발행 주체 논쟁에 매몰되기보다 누가 발행하든 지켜야 할 최소 규율을 먼저 세워야 한다. 준비자산의 100% 이상 분리 보관과 외부 감사 실시, 실시간 공시 의무화, 예금 대체를 막기 위해 이자 지급과 스테이킹을 명확히 금지하는 등 스테이블코인의 성격을 결제 수단으로 한정해야 한다.
둘째, 민간과 중앙은행이 공존하는 이층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 단기적으로는 엄격한 규율 아래 민간 원화 스테이블코인을 제도화해 혁신과 마이크로페이먼트(소액결제시스템) 시장을 키우고, 중장기적으로는 도매형·목적형 중앙은행 디지털화폐(CBDC)를 단계적으로 도입해 최종 정산과 상호 운용성의 기준을 중앙은행이 뒷받침하도록 한다. 이는 통화정책 유효성 우려와 혁신 요구를 동시에 충족하는 절충점이 된다.
셋째, 단기금융시장 인프라를 개선해야 한다. 「국가재정법」을 개정해 만기 3개월에서 1년 수준의 단기 국고채를 정례 발행하고, 발행한도 산정 방식을 국제 기준에 맞게 정비해 발행사들이 준비금을 국내 우량자산으로 구성할 실질적 경로를 열어야 한다.
넷째, 처음부터 글로벌 호환성을 설계에 반영해야 한다. x402나 CPN(Circle Payments Network)과 같이 이미 확산 중인 AI 에이전트 결제 프로토콜 및 해외 금융 인프라와 연계 가능한 API와 기술 표준을 갖춰 원화 스테이블코인이 국내에 갇힌 자산이 아니라 글로벌 정산망에 자연스럽게 편입되도록 해야 한다.
스테이블코인은 더 이상 투기적 가상자산이 아니라 화폐가 디지털 공간에서 살아남는지를 가르는 통화주권의 시험대다. ‘허용할 것인가’라는 소모적 논쟁에서 벗어나 ‘어떻게 안전하고 경쟁력 있게 관리할 것인가’로 신속히 전환해야 대한민국이 디지털 금융 영토와 미래 화폐 주도권을 지킬 수 있다. 디지털 금융의 영토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재편되고 있다. 그 영토를 지키고 미래 금융의 주도권을 선점할 수 있는 마지막 문은 아직 닫히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