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클릭경제교육(종간)
화폐와 유동성
이승훈/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2011.06.29

돈은 개인의 살림살이에서 필수 불가결하지만 나라살림에서도 매우 중요한 역할을 수행한다. 다만 개인에게는 돈이 많을수록 좋은데 나라경제에서 너무 많은 돈은 오히려 문제다. 경제학의 표준 교과서에 따르면 화폐는 결국 교환의 매개수단, 가치저장의 수단 그리고 가치척도의 단위로 기능한다. 이 가운데 화폐의 핵심기능으로 평가받는 것은 교환의 매개수단이고, 가치저장과 가치척도로서의 기능은 화폐가 교환의 매개수단이기 때문에 발휘할 수 있는 기능이다.


상품을 거래하면서 사람들이 화폐를 거래대금으로 주고받는 것은 그 화폐가 거래 상품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고 또 그 가치가 다음의 다른 거래에도 그대로 인정받기 때문이다. 물론 화폐만 가치를 지닌 것은 아니다. 사람들이 돈 주고 구입하는 모든 상품은 각각 그만큼의 가치를 지니고 있고, 그 상품이 내구적이라면 가치저장의 수단으로도 기능할 수 있다. 그런데 왜 유독 화폐만 교환을 매개하고 다른 상품은 그렇게 하지 못하는 것일까?


농부가 쌀 20kg 한 포대를 내다 팔고 대신 설탕 15kg과 쇠고기 300g을 사려고 한다. 쌀 20kg의 값이 4만5천 원인데 설탕 15kg과 쇠고기 300g의 값은 각각 1만8천 원과 2만7천 원이라면, 농부는 쌀 20kg으로 설탕 15kg과 쇠고기 300g을 살 수 있다. 그러나 이 농부가 정확히 설탕 15kg과 쇠고기 300g을 쌀 20kg과 맞교환하려는 사람을 만나는 일은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 그보다는 쌀가게에 들러서 쌀 20kg을 팔고 쌀값으로 받은 돈 4만5천 원으로 식품가게와 고깃간에 들러서 설탕 15kg과 쇠고기 300g을 산다면 일이 훨씬 더 간단하게 풀린다. 이처럼 화폐를 매개로 하는 상품의 거래는 물건과 물건을 직접 맞교환하는 물물교환보다 훨씬 더 쉽게 성사된다.


이 예에서 쌀 20kg의 가치, 설탕 15kg과 쇠고기 300g의 가치 그리고 돈 4만5천 원의 가치는 모두 같다. 돈 4만5천 원으로는 쌀 20kg을 즉시 살 수 있고 설탕 15kg과 쇠고기 300g도 즉시 살 수 있다. 그런데 설탕 15kg과 쇠고기 300g을 쌀 20kg과 물물교환하기는 대단히 어렵다. 같은 가치인데 왜 교환이 어려울까?


사람들이 쌀이나 설탕과 쇠고기 같은 일반 상품을 원하는 까닭은 일반적으로 그 재화를 소비하기 위해서이다. 그러나 화폐는 다르다. 사람마다 화폐를 원하지만 어느 누구도 직접 소비하기 위해 화폐를 원하지는 않는다. 화폐는 소비할 재화를 구입하는 데 필요할 따름이다. 설탕과 쇠고기의 가치 4만5천원은 이것을 소비하려는 사람이 인정하는 가치일 뿐이며 설탕과 쇠고기의 소비를 싫어하는 사람이 인정하는 가치는 아니다. 반면에 화폐 4만5천 원의 가치는 다르다. 누구나 이 돈을 가지고 있으면 쌀이든 설탕이든 쇠고기이든 각자 자신이 소비하고 싶은 재화를 가진 돈만큼 구입할 수 있다. 그러므로 화폐 4만5천 원의 가치는 모든 사람들이 인정하는 것이다.


정 상품의 가치는 이것을 소비하려는 특정 소비자가 부여하는 것이지만 종잇조각에 불과한 화폐의 가치는 신기하게도 모든 소비자가 인정한다.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은 각종 진귀한 상품을 넘겨주면서 그 대가로 종잇조각인 지폐를 주저하지 않고 받아들인다. 일반 상품은 누리지 못하는 일반적 수용성을 유독 종잇조각 지폐가 누리고 있는 까닭은 무엇인가?


일반적으로 돈 1만 원은 모든 사람들에게 똑같은 1만 원어치의 가치를 가진다. 그런데 1만 원어치 쌀과 1만 원어치 설탕은 금액으로는 서로 같지만 소비자들의 쌀과 설탕에 대한 가치평가는 천차만별이다. 돈 1만 원으로 어떤 사람은 쌀을 사고 어떤 사람은 설탕을 사는 데서 분명히 드러나듯이 쌀 1만 원어치와 설탕 1만 원어치의 가치는 사람에 따라서 서로 다르다.


그러므로 시장가치가 1만 원으로 서로 같다고 해서 내가 가진 1만 원어치의 쌀을 다른 사람이 가진 1만 원어치의 설탕과 항상 바꿀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돈 1만 원은 1만 원짜리 상품과 항상 교환되지만 1만 원짜리 상품끼리는 잘 교환되지 않는 경우가 많다.


이처럼 교환과정에서 화폐는 자신의 가치를 항상 100% 실현하지만 일반 상품은 그렇지 못하다. 상품의 유동성(liquidity)이란 교환과정에서 그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정도를 뜻한다. 화폐의 유동성은 1로서 완전하지만 쌀이나 설탕 같은 상품의 유동성은 화폐보다 크게 떨어진다.


모든 사람들이 그 가치대로 인정하는, 따라서 유동성이 큰 상품 가운데 대표적인 것이 귀금속이다. 귀금속은 장신구와 공예품 등으로 모든 사람들의 생활에 널리 사용되고 영구불변이므로 처분해야 할 때 제값을 받고 처분할 수 있다. 즉, 유동성이 크다. 경제의 발달과 더불어 시장교환의 규모도 커졌고 유동성 높은 금과 은이 자연스럽게 화폐로 유통됐다. 그러나 가치가 불안정하던 은은 점차 화폐의 기능을 상실했고 꾸준하게 안정된 가치를 유지해 온 금만이 화폐로 통용될 수 있었다. 은행이 보관 중인 금과의 교환을 보증한 태환지폐(편집자 주 : 소비자의 요구가 있으면 언제든지 명목가치와 소재가치가 같은 화폐로 바꿔주도록 돼 있는 정부나 발권은행이 발행한 지폐)도 금과 함께 화폐로 유통되는 소위 금본위제(편집자 주 : 화폐의 가치를 금의 가치와 연계시키는 화폐제도로 19세기 영국을 중심으로 발전)의 시대에 돌입한 것이다.


경제가 더욱 발전하면서 시장교환의 규모도 급속히 커졌고 교환을 매개하는 화폐에 대한 수요도 늘어났지만 충분한 금을 생산해낼 금광은 발견되지 않았다. 금본위제는 결국 종말을 맞았고, 세계 각국은 금태환이 불가능한 불환지폐(편집자 주 : 명목가치와 소재가치가 같은 화폐로의 교환이 보증돼 있지 않은 화폐)를 발행하기 시작했다. 금의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금화를 화폐로 사용하던 사람들은 국가와 중앙은행의 신용을 믿고 지폐의 가치를 그대로 받아들이기 시작한 것이다.

 

이승훈 서울대 경제학부 명예교수 | shoonlee@snu.ac.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