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규슈 서쪽 끝 작은 도시 나가사키(長崎)를 여행했다. 나가사키를 여행지로 택한 이유는 인공으로 조성된 섬 ‘데지마(出島)’, 특히 그 인 공섬에 지어진 석조창고를 보기 위해서였다. 나는 지난번 일본여행에서 돌 미술관(石の美術館)을 둘러보며 나무를 짜맞춤해 집짓는 일본의 전통적 건설시스템 속에서 어떤 연유로 돌로 쌓아 올려 집짓는 방식이 출현했는지가 궁금했다. 목조 가구식 구조가 지배적인 집짓기 기술 방식 속에서 석조 조적식 구조의 갑작스런 출현에는 어떤 근거가 있으리라.
고려왕조가 무너지고 새 나라 조선이 세워질 당시, 일본 정치세력의 핵심부인 막부(幕府, 바쿠후)는 1570년 나가사키를 개항했고, 1571년 포르투갈과 통교하기 시작했다. 세계의 중심이 대륙 땅 중국이었던 조선에 비해, 일본은 이역만리 저 먼 곳에 완전히 새로운 세계가 있음을 감지하고 있었다. 서구라는 신천지의 문물이 나가사키를 통해 흘러들기 시작하자 일본 정치세력은 기존 질서의 교란을 걱정했다. 이에 에도막부는 쇄국 속에서 선별적 개항을 계획했다. 막부는 나가사키의 유력 상인 25인으로부터 자금을 출자시켜 인공섬 데지마를 축조했다. 오직 이 작은 섬을 통해서만 서구와의 교류를 이어갔다.
데지마는 나가사키 곶 끝 앞바다를 매립해 부채꼴 모양으로 축조 한 인공섬이다. 이 작은 섬의 면적은 1만5천m2로 축구장 2개 정도를 합친 면적이다. 데지마가 축조된 1634년부터 일본이 완전히 개국하게 되는 1859년까지 이 섬에는 네덜란드(초기에는 포르투갈) 체류 상관원들을 위한 여러 건축물들이 지어졌다. 이 건축물들의 대부분은 나무로 구조의 골격을 만들고 다다미로 바닥을 깔았는데, 내부는 서구식 입식가구들로 채워져 있다. 건축물의 큰 꼴은 전형적인 일본식 좌식공간으로 구성됐으나 생활 방식의 양태는 서구적 입식생활을 따르고 있다. 몸으로 익힌 생활 방식은 보수적일 수밖에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데지마의 나무집들 사이에 눈에 띄는 건축물이 두 동 있다. 19세기 중반에 축조된 것으로 추정되는 석조창고는 돌을 쌓아 올린 축조 방식을 단순하고 명확하게 보여준다. 데지마의 석조창고는 수출입 주요 물품의 보관이란 측면에서 내구성과 내화성이 취약한 나무집의 합리적 대안이었을 것이다. 석재를 채석해 일정한 규격으로 가공하고, 하중이 자연스럽고도 안정적으로 흘러갈 수 있게끔 차곡차곡 쌓아 올리며, 그 위에 지붕을 덮는 기술은 저 먼 유럽대륙에서 먼 뱃길을 따라 동아시아의 끝 섬에 닿았다. 지난 여행에서 봤던 작은 시골마을의 석조창고뿐 아니라 일본 전역에 산재한 이와 유사한 석조창고는 이 곳 데지마에서 유래한 것이 분명해 보인다. 데지마의 나무집과 돌집의 동거는 자연스럽고도 지당해 보인다.
인류의 집짓는 방식은 문명마다 서로 다르게 전개됐다. 서구의 문명이 돌을 쌓아 올려 집을 지은 이유와 동양의 문명이 나무를 짜맞춰 집을 지은 이유를 정확히 알 수는 없다. 다만 지리적·환경적 차이와 더불어 문명권마다 다른 자연관과 세계관이 복합적으로 얽혀 서로 다른 차이를 만들어냈을 것이라고 추정할 뿐이다. 이 차이를 인정하지 않을 때 한쪽이 다른 한쪽의 문화를 깔아뭉개는 폭력이 발생하며, 그 폭력으로 인류의 문화는 반쪽으로 쪼그라든다. 그러나 이 차이를 자연스러운 것으로 받아들일 때 한쪽의 문화와 다른 한쪽은 함께할 수 있게 되며, 이런 문화의 동거와 이종교배를 통해 우리의 문화는 두 배로 성장한다. 데지마의 석조창고를 보며 나는 그런 생각을 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