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각해 보면 우리 국민이 나물을 좋아하는 건 곧 ‘오천 년’의 역사다. 단군신화의 쑥과 마늘이 바로 나물 아닌가. 저 시절 마늘은 일종의 산마늘이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산마늘은 전형적인 나물이다. 우리가 나물을 좋아하게 된 건 일종의 운명적 민족 서사랄까.
조선 후기 유학자 황필수가 1870년에 펴낸 『명물기략(名物紀略)』에는 나물을 이렇게 정의했다. “채소는 풀 중에서 먹을 수 있는 것으로, 속언(俗言)으로 ‘라물(羅物)’, ‘나물’이라 한다.” 나물이라는 말 자체가 오래된 순우리말이고 먹을 수 있는 풀 전체를 통칭하는 개념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자로 ‘라물(羅物)’이라 한 건 문자로 만드는 과정이었을 뿐이다.
자, 나물을 만들어 먹는 방식 중에 가장 보편적인 건 뭘까. 바로 데치기다. 요즘에야 독립적인 열원을 쓰니까 물을 따로 끓여 데치곤 하지만 예전부터 데치는 건 아주 손쉽고 에너지도 아끼는 방법이었다. 바로 구들 덕분이다. 구들은 아궁이가 필요하기 마련이고 아궁이에는 언제든 물이 끓고 있다. 방도 덥히고 조리도 하는 이중 효용이 있는 것이다. 물론 서양의 오븐이나 그릴도 난방과 요리를 겸하도록 고안됐다.
사실 나물의 원재료인 각종 ‘풀’은 열량도 낮고 맛도 없다. 거친 섬유질만 가득하다. 그걸 데치면 여러 가지 놀라운 이익이 생긴다. 많이 먹을 수 있으니 배 채우기 좋다. 섬유질이 연해지니까 소화도 잘된다. 데친 나물에는 양념을 더하는 것도 쉽다. 생채소를 쓰는 샐러드는 같은 풀이어도 소화가 어렵고 실제 먹을 수 있는 양 자체도 그리 많지 않다. 나물을 삶아보면 이해가 된다. 한 바가지의 풀을 삶아도 나물 한 줌이 안 된다. 이래저래 나물 조리방식에는 이점이 많다.
나물이 놀라운 건 먹을 수 없는 것을 먹을 수 있게 하는 과정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 나물의 재료가 되는 산과 들의 풀은 원래 식량이 아니다. 그걸 특정 시기에 채취해 먹을 수 있게 만들어야 비로소 나물이 된다. 특히 해당 풀(초본)이 식용 가능한 시기는 아주 짧다. 여름에 웃자란 풀을 나물로 먹지는 않는다. 그래서 우리 조상들은 초본별로 가공이 가능한 시기를 사람의 경험과 기억으로 대물림했다. 그러나 이제 이것도 맥이 끊겼다. 나물 캐던 할머니들 이후로 우리는 나물을 모르기 때문이다. 먹을 줄만 알지, 캘 줄 모르는 까닭이다.
<흑백요리사>에 나와 인기를 끈 선재 스님과 예전에 촬영을 한 적이 있다. 마침 봄이었다. 그와 들판을 걷는데, 좀처럼 앞으로 나아갈 수 없었다. 내 눈에는 모두 ‘잡초’로 보이는 풀들을 두고 그것이 어떻게 다른지, 그 조리법은 어때야 하는지를 말씀하시느라 그랬다. 아는 사람에게만 음식으로 보이는 마법, 그게 바로 나물이다. 이제 우리는 재배하는 한정된 나물 외에는 많은 산채를 잃어버리게 될 것 같다. 누가 그걸 기억하고 캐고 갈무리할 것인가. 아쉽다.
나물에는 그저 산나물만 있는 게 아니다. 주변에 보이는 많은 작물도 ‘나물화’됐다. 그게 밥을 넘기기에도 좋고 배도 부르기 때문일 것이다. 오이, 아욱, 가지, 상추, 부추에 콩나물도 나물이 됐고 온갖 버섯도 나물로 만든다. 그래서 우리 나물의 숫자는 셀 수 없다고 한다. 들에서 나는 초본의 숫자에 일부러 기르는 작물의 숫자를 더해야 한다고도 한다.
정부는 대체로 한국과 한식 홍보의 핵심으로 비빔밥을 썼거나 쓰고 있다. 그 비빔밥의 핵심이 바로 나물이다. 비빔밥은 결국 나물들의 집합체다. 고사리, 시금치, 도라지, 당근, 콩나물, 호박, 버섯 그리고 그 위에 밥과 고추장. 나물이 없는 비빔밥은 없다. 한국을 대표하는 음식이 곧 나물 음식이다. 나물을 다시 봐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