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중업(1922~1988년) 평양에서 태어나 그곳에서 유년시절을 보냈다. 그는 열여덟 살에 일본으로 건너가 요코하마고등공업학교에서 건축을 공부했으며, 졸업 후에는 귀국하여 몇몇 사무실을 옮겨 다니다가 피난지 부산에 임시로 꾸려진 서울대학교 건축학과에서 학생들을 가르쳤다. 그리고 1952년, 그는 시인 김소운, 소설가 김말봉, 극작가 오영진, 조각가 윤효중 등과 함께 국제예술가회의의 한국 대표로 선출되어 이태리 베니스로 향했다. 김중업은 그곳에서 당시 세계 건축계를 뒤흔들고 있었던 건축가 르 꼬르뷔제를 만날 수 있었다. 그는 르 꼬르뷔제에게 매달리듯 구애했고 결국 프랑스에 있는 꼬르뷔제의 사무실에서 일할 수 있었다. 김중업은 그곳에서 3년 가까이 일하면서 서구 유럽의 ‘선구적’ 건축가들이 세계 각처에 뿌리고 있는 근대건축의 혁명적 사건들을 몸소 경험할 수 있었다.
구한말 식민의 땅 조선에 ‘건축’이라는 단어는 없었다. 전통과 근대라는 격절의 간극 속에서 서구의 ‘건축(architecture)’은 일본판 ‘건축(建築)’이 되어 들어왔다. 한국의 근대건축이란, ‘탈아입구(脫亞入歐)’의 컴플렉스로 점철된 일본판 아류의 아류였다. 그러나 김중업을 통해 극동 변방의 최빈국은 비교적 온전한 의미의 서구적 근대건축을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건축가 김중업은 3년간의 프랑스 생활을 마무리하고 금의환향했다. 이후 그는 정력적으로 활동하며 프랑스대사관, 제주대학교본관, 서산부인과 같은 시대의 대작들을 남겼다. 그는 직선과 곡선, 이성과 감성, 기능과 반기능 그리고 유클리드와 비유클리드의 경계를 무시로 넘나들며 근대건축의 처녀지에 새로운 건축의 여명을, 비로소 밝혔다.
제주 서귀포 한적한 바닷가 절벽 위에 2층집 소라의 성이 있다. 이 건물의 설계자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은 남아 있지 않은 듯한데, 집의 형태와 완성도 등으로 봤을 때 그 설계자가 김중업이라는 데는 이견이 없어 보인다. 다만 이 집을 지을 당시의 용도에 관해서는 의견이 갈리는데 관광전망대라는 설과 박정희 대통령 경호관들의 숙소였다는 설이 그것이다. 그러나 군사 정권의 도시 정책(광주대단지 이주정책)에 대한 공개 비판으로 필화를 입고 국외를 떠돌아야 했던 김중업을 생각해 보면 후자보다는 전자의 설이 더 설득력 있다. 68년 지어진 이 건축물은 관광전망대에서 식당으로, 다시 식당에서 제주올레 사무국으로 용도가 변경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소라의 성은 가우디에게 바치는 김중업의 오마주(hommage)였던가? 이 건물의 모든 몸통은 곡선으로 굽이치는데 가우디의 까사 바트요(Casa Batllo)와 까사 밀라(Casa Mila)의 이미지가 포개지고, 2층 돌출부를 받치고 있는 기둥들의 열주 공간은 구엘 공원(Parc Guell)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여기에 김중업의 탁월한 조형감각과 공간연출이 덧붙여지며 소라의 성은 드라마틱한 ‘까사 까라꼴라(Casa Caracola, 소라의 집)'로 완성된다. 소라의 성은 여하한의 ‘비논리’적 곡선들을 온몸으로 끌어안으며 절벽 위의 그림 같은 풍경을 완성하고 있다.
청년 김중업은 불운과 비운의 시대와 불화하며 세계 건축의 중심으로 진입하여 그 중심을 받아들였고, 다시 세계 건축의 변방으로 돌아와서 변방화 된 중심을 펼쳐보였다. 장년의 김중업은 군사정권의 몽매한 무식과 불화하며 국외를 떠돌며 그의 정신과 건축을 단련시켰고, 다시 그 있을 자리로 돌아와 더욱 성숙해진 건축을 펼쳐보였다. 김중업은 항상 장력으로 팽팽한 현악기의 줄처럼, 그 긴장의 힘으로 울어내듯 전위적 건축을 펼쳐보였다.
김중업은 중심의 관성 속에서 뒤돌아보지 않는 질주를 하지 않았으며, 항상 경계에 서서 여기와 저기를 넘나드는 창작열로 한국 근대건축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 한구석에 곡선으로 물결치는 소라의 성이 남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