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씨를 쓸 때 쓰는 담요가 너무 더러워 얼마 전 하얀색으로 새로 깔았지만 며칠 지나지 않아 금세 먹때가 탔다. 처음 붓글씨를 배울 땐 먹물 한 방울 묻는 것이 그렇게도 싫었는데 지금은 손톱 밑에 묻은 먹물을 괜히 신경 쓰기보다는 막 작업하다 나온 척 미팅에 나가기도 하고, 먹물이 튀어 옷에 묻어도 아랑곳 않고 그 느낌 그대로의 멋으로 입기도 한다. 붓끝이 닳는 만큼 눈앞의 옷이며 벽이며 주변 모든 곳곳이 나에게는 먹때를 묻힐 백의 화선지이며, 먹때 속에 숨어 있는 모든 소중한 이야기들은 이 여백이 있기에 존재한다.
손목의 점 하나는 눈에 걸리적거리기도 하며 때론 매력적으로 보이기도 한다. 책을 읽다가 잠시 책속의 흰 여백을 본다면 딴생각을 하는 것일까, 어쩌면 눈이 아닌 마음으로 글을 읽는 순간일 것이다. 먹과 붓으로 글씨를 쓰는 것은 점과 선을 흩뿌려 화면을 분배하고 갖가지 공간들을 구성하는 일이기도 하다. 흑(黑)은 텅빈 공간을 숨이 막히도록 꽉 들어차 보이게도 하며, 작은 평면을 확장시켜 광대한 우주를 담기도 한다. 흑과 백은 정반대인 것 같지만 서로 공존하며, 싸우고 받아치면서 긴장과 여유의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진정한 흑백의 미를 나타낸다.
대부분은 화려하고 아름다운 컬러와 오브제 그리고 붓이 지나는 검은 선에 시선을 빼앗기게 마련이다. 그렇게도 많은 화선지와 먹물을 버려왔건만 여전히 가장 기본이 되는 흑백만을 대할 때가 가장 어렵게 느껴진다. 글씨는 검다. 글씨를 쓸 때 붓과 방금 지나간 검은 선을 보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것이지만 때로는 검은 붓으로 백(白)을 지워내며 흑이 버려둔 여백을 써내려가야 한다.
흑은 백이 있음으로 해서 완벽한 흑으로 존재한다. 반대로 백은 흑으로 인해 더욱 밝아지며, 흑이 백에 스며들고 백이 흑을 받아들일 때 각각의 존재 가치를 증폭시킨다.
아직도 검은 먹물에 빠져 허우적거리며 하얀 화선지에 눈이 멀어 살고 있지만, 내 삶의 여백을 만드는 먹때 묻은 손톱 끝이 나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