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평등은 과연 이 시대의 가장 중요한 화두인가 보다. 지난해 봄부터 토마 피케티 파리경제대 교수가 쓴 「21세기 자본(Capital in the 21st Century)」이 지구촌 서점가를 휩쓸더니 올봄에는 피케티의 멘토라는 앤서니 앳킨슨 런던정경대 교수의 「불평등을 넘어(Inequality)」가 출간됐다. 올가을에는 2년 전 「위대한 탈출(The Great Escape)」을 내놓은 앵거스 디턴 프린스턴대 교수가 노벨경제학상을 받았다. 이 책들은 모두 불평등 문제에 대한 깊은 통찰을 담고 있다.
나는 피케티와 앳킨슨의 책을 우리말로 옮기고 그 둘을 직접 만나보기도 했다. 지난봄 프랑스 셰르부르에 머물던 앳킨슨을 만났을 때는 몇 년째 노벨경제학상 후보로 거론된 그가 올해에는 실제로 상을 탈 수 있겠다 싶었다.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제임스 미드의 가르침을 받았고 ‘앳킨슨지수’라는 불평등 지표로 널리 알려진 그는 피케티의 연구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하지만 수상의 영예는 앳킨슨(71세)보다 한 살 적은 케임브리지대 동문 디턴에게 돌아갔다.
노벨경제학상 발표 후 디턴의 책을 다시 집어든 나는 두 번 놀랐다. 불평등에 대한 문제의식에서 디턴의 생각이 피케티나 앳킨슨의 인식과 서로 통하는 데가 많아서 놀랐고, 그럼에도 일부 언론과 학자들이 굳이 피케티와 디턴이 대척점에 있다고 도식화해서 한 번 더 놀랐다. 심지어 불평등은 성장의 원동력이며 따라서 불평등은 좋은 것이라는 단순논리까지 등장하기도 했다.
디턴은 기본적으로 불평등을 성공의 산물로 본다. 가지지 못한 자가 있으려면 먼저 가진 자가 있어야 한다. 앞서가는 이가 있으면 뒤처지는 이가 있으므로 불평등은 진보의 불가피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디턴은 또한 어느 정도의 불평등은 진보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본다. 불평등은 뒤처진 자가 앞선 자를 따라잡기 위해 더 열심히 뛰도록 자극하기 때문이다.
오늘날 지구촌 사람들은 그 어느 때보다 나은 삶을 누리고 있다. 많은 사람이 지독한 가난에서 탈출했고, 더 오래 더 건강하게 살게 됐으며, 더 이상 자녀 넷 중 하나를 잃는 고통을 겪지 않아도 된다. 그러나 디턴은 “지금 세계는 엄청나게 불평등하다.”고 선언한다. 또한 미국 같은 나라에서는 갈수록 성장의 과실이 소수에게 집중되고 있으며, 지나친 부의 집중은 경제성장을 가능케 하는 창조적 파괴의 숨통을 막고 민주주의의 기반을 약화시킬 수 있다고 지적한다. 이 대목에서 디턴은 피케티나 앳킨슨과 문제의식을 공유한다. 물론 세 사람의 목소리는 그 결이 사뭇 다르다. 피케티와 앳킨슨이 적극적인 분배정책을 주장하는 데 비해 디턴은 ‘성장과 불평등의 끊임없는 춤’에 관해 이야기할 뿐 구체적 처방을 내놓지는 않는다. 그러나 성장의 활력이 떨어질수록 불평등이 심화될 수 있다는 그의 생각은 자본수익률(r)에 비해 경제성장률(g)이 낮을수록 불평등이 커진다는 피케티의 주장과 다르지 않다. 세 사람은 서로 대척점에 있다기보다 강조점이 다를 뿐이다. 나는 피케티, 앳킨슨 그리고 디턴의 대립각을 찾기보다는 다음과 같은 공통점에 주목하고 싶다.
첫째, 이들은 모두 우리가 함께 고민하고 풀어야 할 가장 심각한 문제인 불평등을 연구했다. 경제학은 정치적이고 규범적이며 도덕적 목적을 지닌다는 점을 새삼 일깨워준다.
둘째, 세 사람 모두 치밀한 실증자료를 갖고 말한다. 철학과 이념, 연구방법론을 달리하는 각 진영 사이의 논쟁이 상대방의 말에 귀 기울이지 않는 ‘귀머거리들 사이의 대화’가 되지 않도록 하려는 것이다.
셋째, 이들은 기본적으로 미래를 낙관한다. 피케티는 이대로 가면 21세기 자본주의는 19세기형 세습자본주의체제로 돌아갈 수 있다고 경고하면서도 “어떤 경제결정론도 경계해야 한다.”고 했다. 우리의 의지에 따라 미래는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다. 앳킨슨 역시 “미래는 우리 손에 달려 있다.”고 했고, 디턴은 “(빈곤과 불평등으로부터의 탈출을) 조심스럽게 낙관한다.”고 밝혔다. 죽비소리와도 같은 이들의 경고를 새겨듣는 것이 더 나은 미래로 가는 첫걸음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