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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로드리고의 여행 한 페이지평화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누군가의 등을 따라 여행하는 일
박 로드리고 세희 촬영감독 2026년 07월호


『강정평화서신』의 표지에 쓰인 ‘평화는 가둘 수 없다’는 부제를 가만히 들여다본다. 제주 해군기지 건설 반대 운동으로 수감된 송강호 활동가와 징집을 거부해 감옥에 간 청년 박정경수가 주고받은 편지를 한데 묶은 책. 한 사람은 평화를 외치다가, 한 사람은 총 들기를 거부하다 수감됐으니 세상에 이런 아이러니가 없다. 나는 이 책의 공저자 송강호 활동가를 잘 안다. 오래 알았을 뿐만 아니라 깊이 존경한다.

처음 만난 것은 십수 년 전이다. 송강호 선생은 인도네시아 술라웨시의 작은 바닷마을에서 토착민족인 만다르족과 함께 ‘산덱’이라는 전통 요트를 띄우고 있었다. 해마다 평화 활동가 몇몇과 해상훈련을 하는 것이었다. 십 년을 이어온 그 훈련에 참여하게 된 것은 얼떨결에 벌어진 일이었다. 나는 딱히 평화에 관심을 둔 사람이 아니었으니까. 그저 새로운 여행이 고팠고 이국적인 요트를 탈 수 있다는 말에 솔깃했다. 

한 달을 함께 지내보니 송강호 선생은 환갑을 목전에 둔 나이가 무색하게 여느 젊은이보다 성실했다. 그러니 일행 중에서 가장 몸이 단단했고, 가장 검게 그을려 있었다. 작은 고기잡이배 산덱을 부리는 일은 거친 바다와 벌이는 육탄전이었다. 파도가 배를 집어삼킬 듯 출렁일 때마다 나는 가슴을 졸였지만, 선생은 그저 묵묵히 키를 잡고 바다의 리듬을 읽어낼 뿐이었다. 

활동가들은 마을의 공동 우물가에서 몸을 씻고, 야자 껍질로 불을 지펴 밥을 지으며 현지의 낙후된 생활방식을 군소리 없이 따랐다. 그러니 누가 활동가이고 누가 어부인지 가려지지 않았다. 또 어찌나 검소한지 콜라 한 병조차 허투루 사먹지 않았다. 고백하자면, 나는 밤마다 거처를 빠져나와 몰래 콜라나 아이스크림을 사 먹었다. 낮에는 활동가들 사이에서 평화를 배우는 얼굴을 하고, 밤에는 시원하지도 않은 콜라를 좋다고 홀짝이던 걸 떠올리면 지금도 낯 뜨겁다. 부끄러움과 콜라 한 잔의 쾌락을 기꺼이 맞바꿀 정도로 세속적인 사람이었으니, 그들의 우직하고 검소한 생활은 내가 흉내 내기엔 너무나 버거웠다. 하지만 가까이 있으면 닮는다고 했던가, 한 달을 함께 지내다 보니 내 안의 한구석 어딘가에서부터 조금씩 변화가 일기 시작했다.

분쟁과 재난 곳곳을 떠돈 활동가 송강호를 알려주는 책…
선생을 따라 평화를 여행하는 일에 이끌리다
 
술라웨시 여행 이후로 자연스럽게 선생을 따랐다. 『강정평화서신』을 읽으면서 그가 어떤 길을 걸어온 사람인지 온전히 알게 됐다. 책을 펼치면 편지글 사이로 송강호의 평생이 잘 드러난다. 30여 년 전 동티모르의 한 불탄 마을에서 시작된 그의 활동은 아프가니스탄과 아이티, 인도네시아 아체로 이어졌다. 분쟁과 재난이 남긴 상처를 따라 세계 곳곳을 떠돈 평화 여행자. 그랬던 그가 마지막에 정착한 곳이 제주 강정마을이었다. ‘세계 평화의 섬’이라 불리던 제주에 군사기지가 들어선다는 소식을 듣고 곧장 달려간 것이었다. 평화를 찾아 세계를 누빈 사람이 한자리에 눌러앉았고, 그 자리는 두 번의 옥고를 치러가며 가장 오래 싸우게 된 자리가 됐다.

“나는 감옥에서 꿈을 꾸고 있습니다. 앞으로 석방이 되면 돛배를 구해서 오키나와와 하와이로 항해를 할 겁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군사기지로 땅과 바다를 잃어버린 희생자들을 만나 평화를 위한 결속과 연대를 더욱 굳게 만들어 동병상련으로 맺어진 국제적인 협력을 발전시키는 것이지요. 섬 주민이야말로 국가주의의 광기에 가장 쉽게 희생당할 수밖에 없는 약자입니다. (중략) 나는 전쟁을 반대하고 평화를 사랑하는 세계의 시민들과 함께 이런 위기에 처한 섬들을 향해 돛을 올리고 싶습니다.”

선생을 따라 평화를 여행하는 일에 이끌렸다. 거창한 결심이 있던 것은 아니다. 그저 그가 가는 곳을 따라가서 조금씩 일을 돕고 싶을 뿐이었다. 평생 해온 것이 여행이니, 이왕 하는 여행이 평화에 티끌만 한 보탬이라도 된다면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선생에게는 평생을 벼려온 여행이 하나 있었다. 작은 요트로 평화의 바다를 항해하는 일. 세계의 섬과 섬을 잇는 항해를 하며 평화의 메시지를 전하는 일이 그의 숙원이었다. 그 원대한 항해의 첫 단추가 동중국해의 제주와 오키나와, 타이완을 잇는 것이었다. 동중국해는 국경 분쟁이 끊이지 않을 뿐만 아니라 지정학적인 이유로 항상 군사적 긴장감이 팽팽한 곳이다. 그러니 세 섬 모두에 군사기지가 있는 것은 당연지사다. 
 

선생이 감옥에서부터 꾸어온 꿈, 
낡은 배를 고쳐 군사의 바다를 평화로 잇는 것

송강호 선생은 그 다툼의 바다를 ‘공평해’라 고쳐 부르자고 제안한다. 함께 공(共), 평화 평(平), 바다 해(海). 모든 생명이 함께 평화롭게 사는 바다. 작은 배 한 척으로 거대한 군사의 바다를 항해하겠다는 소리가 다소 무모하게 들렸다. 심지어 항해에 쓸 요트도 없었다. 많은 사람이 반신반의한 가운데, 일본에 가서 버리기 직전의 낡은 요트 한 척을 사 오는 것으로 공평해 프로젝트는 시작됐다. 하지만 길고 먼 항해를 단박에 떠날 순 없는 일이었고, 재정이 넉넉지 못하니 더욱 어려웠다. 

일본에서 가져온 배는 말 그대로 고철이나 다름없었다. 선체 곳곳에 보수가 필요해 돈이 생기면 수리를 조금 하고, 돈이 떨어지면 몸으로 때우는 날들이 수년간 이어졌다. 주변에서는 그렇게 낡은 요트로 어떻게 먼바다를 항해하겠냐며 무모한 짓이라고 고개를 내저었다. 하지만 선생은 묵묵히 못을 박고 칠을 했다. 마침내 모든 수리를 마치고 출항을 앞두었을 때, 요트의 조종간을 잡은 선생의 다부진 얼굴을 잊을 수 없다. 이길 수 없는 싸움인 줄 알면서도 맨몸을 내던지는 일, 그 무모한 일을 하면서도 조금도 망설이거나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것이 그가 평생 살아온 방식이었다.
 

나는 공평해 프로젝트의 언저리를 오래 맴돌았다. 누구보다 열심히 선생을 도왔지만 먹고사는 일까지 제쳐둘 수 없어 정작 중요한 항해를 함께하진 못했다. 뭍에 남아 그들이 무사히 닿기를 기다리는 것이 내 일이었다. 송강호 선생과 선원들은 떠난 지 100일이 넘어 5천km를 항해하고 돌아왔다. 감옥에서 그가 꾸었던, 돛배를 구해 섬과 섬을 잇겠다던 그 꿈이 비로소 실현된 것이었다. 나는 멀리서 그의 항해를 지켜보며 혀를 내둘렀다. 무모한 여행을 기어이 성사시키는 그 우직함에 대해. 

언젠가 제주 법정의 방청석에 앉게 됐다. 선생이 두 번째로 수감돼 재판을 받을 때였다. 따로 면회는 가지 않았다. 일부러 그랬다. 그토록 좋아하고 존경하는 어른인데, 왜 그랬는지 설명하기 어렵다. 아마도 조금 거리를 두고 멀찍이서 지켜보는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 자리가 선생 곁에 더 오래 머무는 방법인지도 모르니까. 법정에서 그는 짧게 말했다. 변명도 호소도 없었다. 말을 마치고 다시 피고인석에 앉은 그의 등을 보았다. 술라웨시에서 본 그 단단하던 어깨가 눈에 띄게 좁아져 있었다. 평화는 사람을 깎는 일인지도 모른다. 세상을 지키려는 사람이 정작 제 몸은 지키지 못했다.
 

‘이 거대한 폭력 앞에서 무엇을 바꿀 수 있을까?’ 싶을 때 선생의 좁아진 어깨를 떠올리다
책을 덮는다. ‘평화는 가둘 수 없다’는 부제를 다시 들여다본다. 법정에서 선생의 좁아진 어깨를 가만히 바라보았을 때처럼. 송강호의 몸은 가둘 수 있어도, 그가 세상에 뿌려놓은 평화의 씨앗까지 가둬둘 순 없었다. 콜라나 몰래 사 먹던 나 같은 사람에게까지 뿌리를 내렸으니 말이다. 선생이 평화를 여행하는 곳을 졸졸 따라다니던 나는 이제 혼자서 로힝야 난민 캠프를 찾기도 하고, 내전의 상흔이 가시지 않은 시리아에 다녀오기도 한다. 폭격으로 무너진 잿빛 건물의 잔해를 걸을 때, 그리고 희망 없는 눈빛들이 모여 있는 난민촌의 진흙길을 걸을 때, 내 안에서는 질문이 솟구친다. 이 거대한 폭력 앞에서 고작 사진 몇 장 찍어서, 혹은 망망대해에 작은 요트 한 척 띄워서 무엇을 바꿀 수 있단 말인가. 하지만 절망의 한복판에서 기어이 아이를 안고 웃어 보이는 이들의 얼굴을 마주할 때마다, 법정에 홀로 앉아 있던 선생의 좁아진 어깨를 떠올린다. 어쩌면 선생이 평생 외친 “평화는 가둘 수 없다”는 문장도 이런 풍경 속에서 태어난 것은 아닐까.

평화는 거창한 구호가 아니라 누군가의 등을 따라 여행하는 일인지도 모른다. 나는 지금도 새 여행지를 두리번거린다. 지도를 펼쳐 놓고 아직 가보지 못한 분쟁의 자리와, 환대가 남아 있을 어느 골목 위로 손가락을 더듬더듬 옮긴다. 다음엔 어디로 갈까? 혼자서 그 길을 묻고 있으면 어딘가에서 선생이 빙긋 웃고 있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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