샐리 페이지 『이야기를 지키는 여자』
얼마 전 한 여자 중학교에 강의를 갔다가 ‘왜 책을 읽어야 할까요?’, ‘글을 쓰는 게 왜 중요한가요?’라는 질문을 받았다. 사실 어디를 가든 흔히 듣는 질문이기는 한데, 그날은 대답과 함께 얼마 전에 읽은 영국 소설 『이야기를 지키는 여자』를 추천했다. 소설가이자 꽃과 만년필 애호가라고 자신을 소개하는 작가 샐리 페이지(그의 이력을 보면 ‘애호가’는 매우 겸손한 표현이다. 그는 꽃집을 열어 운영했고 만년필 브랜드를 설립해서 직접 펜을 만들기까지 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의 데뷔작으로 2023년 아마존 ‘올해의 책’에 선정되고 영국 도서상 ‘페이지터너’ 부문 최종 후보에 오르는 등 몇십만 영국 독자에게 큰 사랑을 받은 책이다. (데뷔작의 놀라운 성공으로 샐리 ‘페이지’의 삶도 완전히 바뀌었으니 진정 ‘페이지터너’라고 할 수 있겠다.)
이 책의 주인공 재니스는 케임브리지에서 유능한 청소 도우미로 일하며 다양한 집을 드나드는데, 그 집들에 사는 사람들이 저마다 품고 있는 이야기를 모으는 자칭 ‘이야기 수집가’다. 그가 맡은 집들에는 얼룩보다 훨씬 지우기 힘든 사연들이 구석구석 어김없이 눌러붙어 있기에, 마치 청소기로 먼지를 흡입하는 것처럼, 그는 먼지처럼 어디에나 있고 누구에게나 쌓이기 마련인 이야기들을 하나하나 소중히 주워 담는다. 오고 가는 길이나 버스 안에서 만난 사람들이 흘리고 간 말들도 수집 대상이다. 이 책에서 그가 피력하는 이야기를 수집하는 여러 이유는 (그처럼 타인의 가장 은밀한 공간까지 자유롭게 들어갈 수 없는) 사람들이 책을 통해서 타인의 진실한 이야기들을 다양하게 읽고 아는 게 어떤 의미인지와도 매우 맞닿아 있다.
“전 평범한 사람들이 예상치 못한 일을 하는 걸 좋아해요. 그들이 용감하고 재미있고 친절하고… 이타적인 사람들이라는 사실을요. 그들에게도 단점이 있다는 건 알아요. 당연하죠. 하지만 그들의 이야기에서 선한 본성과 기쁨을 발견할 때면 위안을 받아요. 지극히 평범한 사람들, 그저 묵묵히 살아가며 최선을 다하려는 사람들이죠.” - p.176
그리고 우리는 사람들의 이야기 속에서 우리가 될 수 있는 최고의 모습을 발견할 수도 있고(절대 되어서는 안 되는 최악의 모습을 미리 경험할 수도 있고), 아주 조용하고 사소하지만 삶에 윤을 내주는 ‘작은’ 목소리들에 귀를 기울임으로써 우리를 파괴하려는 크고 폭력적인 목소리들로부터 우리를 지켜낼 수도 있다. 무엇보다 처음엔 그저 ‘듣는 사람’이었던 재니스는 점점 ‘이야기하는 사람’으로 변해가는데, 남의 이야기를 진심으로 계속 듣다 보면 자신에 대해서도 점점 더 잘 알아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은 바로 그 과정, 남의 말에 귀를 기울이다가 문득 내 마음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과정을 정교하고 감동적으로 그려낸다. 책을 읽는 것이 누군가의 이야기를 듣는 일이라면 글을 쓴다는 건 그 모든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나의 이야기를 꺼내보는 일이라는 것을, 독서가 글쓰기의 모태이듯이 듣는다는 건 곧 말할 준비를 하는 일이라는 것을, 재니스는 삶을 통해 증명해 낸다.
놀라운 점은 이 모든 게 전혀 무겁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매 장마다 빨아 널은 옷들처럼 촉촉하게 젖은 유머가 흘러넘친다. 그리고 우리가 타인의 이야기를 어떻게 소중히 다뤄야 하는지에 대해서도 선명하게 보여준다. 샐리 페이지도, 그의 페르소나인 재니스도 타인의 실수와 결핍을 절대 조롱하지 않는다. 대신 그 ‘틈’을 서사의 문으로 삼는다. 사람들이 ‘미끄러진 자리’에 조명을 비추되 카메라 앵글은 늘 애정을 품고 있다. 다 읽고 나면 어쩐지 마음의 귀가 예민해지는 책이다. 세탁기 돌아가는 소리에도 이야기가 있고 냉장고 문 여닫는 소리에도 기억이 있으니까. 아니면, 내 마음에 쌓인 먼지들을 조금 털어내고 싶어지거나. 그러니까, 무슨 이야기든 읽거나 쓰고 싶어진다는 말이다. 그렇게 이 책은 이야기를 지켜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