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깨어난 신상도는 빠르게 주변을 살폈다. 술에 취했다가 깨어난 것처럼 주변 상황을 파악하는 게 힘들었다. 깨어난 장소가 어디인지, 지금이 낮인지 밤인지, 잠들기 전에 어떤 일이 있었는지 잘 기억나지 않았다. 빨리 생각하는 게 신상도의 특기였지만 오랫동안 냉동 상태에 있다가 방금 깨어난 사람처럼 피가 돌지 않는 느낌이었다.
“어, 일어났어?”
목소리가 들리는 곳으로 고개를 돌렸더니 구영대가 여유 있는 표정으로 커피를 내리고 있었다.
“형, 어떻게 된 거야?”
신상도가 침대에서 일어서며 물었다. 다리에 힘이 들어가지 않아 잠깐 비틀거렸다.
“뭐가 어떻게 돼?”
“여기가 어디야?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기억이 안 나.”
“현실로 돌아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야. 나도 한 시간 동안 진짜 멍하더라.”
“현실로 돌아오다니? 우리가 어디 갔었는데?··· 응? 아악, 아이씨, 머리가 깨질 것 같다.”
“커피 한 잔 마셔. 도움이 될 거야.”
구영대가 아이스커피를 건넸다. 신상도는 머리가 깨질 것처럼 차가운 아이스커피를 벌컥벌컥 들이켰고, 두통이 사라졌다. 두통이 재발할 것 같으면 다시 아이스커피를 마셨다. 슬픈 일이 생기면 더 슬픈 일을 떠올려서 현재의 슬픈 일을 덮어버리는 방식과 비슷했다. 일종의 마취제처럼 얼음 같은 아이스커피가 고통을 상쇄시켰다.
“영대 형, 이제 좀 살 것 같으니까 제발 뭐가 어떻게 된 일인지 설명 좀 해줄래?”
“조금 있으면 기억이 돌아오겠지만 기다림을 참지 못하는 세대를 위하여 직접 설명을 해주지. 도시에 전산 네트워크 장애가 있었던 건 기억나?”
“네트워크 장애? 맞아. 우리가 BBB에 잠입하던 날 그랬잖아.”
“우리가 진짜 BBB에 잠입한 거 맞아?”
“당연하지. 내가 CCTV 무력화시키고, 키오스크 해킹하려고 했는데 이상한 화면 계속 나오고, 괴상한 소리도 나오고···, 설마···.”
“설마, 뭐?”
“설마, 그거 전부 시뮬레이션이었어?”
“어떤 거 같아?”
“나는 너무 진짜 같은데? 시뮬레이션이면 이렇게 몸이 막 아프고, 경찰 인공지능이 막 쫓아오고, 그런 게 전부··· 그럼 퍼즐 자물쇠도 전부 시뮬레이션 속에서 일어난 일이라고? 말도 안 돼.”
“요즘 기술 많이 좋아졌지?”
“형이 다 꾸민 일이야?”
“꾸민 게 아니라 설계했다고 해주면 안 되겠니?”
“나 모르게 한 일인데 설계가 아니라 꾸민 거지.”
구영대는 신상도 앞에 앉아 커피를 마시면서 그동안 있었던 일을 차근차근 설명해 주었다. 시뮬레이션을 제안한 것은 인공지능 예측봇 ‘알프’였다. 빅바이트버거(BBB) 본점의 키오스크 해킹 계획을 알려주었을 때 알프는 성공 확률 51퍼센트를 예측했고, 오차 범위를 생각하면 실패할 확률도 높기 때문에 시뮬레이션으로 가상 작전을 수행하는 게 좋다는 조언을 남겼다. 알프는 시뮬레이션이 시작되는 지점에 도시 전체의 네트워크가 먹통이 되는 설정을 집어넣었고, 그게 일종의 ‘체크포인트’가 되었다. 네트워크 장애가 시작되면 알프가 뉴럴 브릿지를 통해 현실과 시뮬레이션을 자유롭게 오갈 수 있도록 설정했다.
구영대와 신상도는 시뮬레이션 속에서 작전을 수행했다. 키오스크를 해킹하다 실패했고, 인공지능 아르테미스의 도움을 받아 탈출했지만 경찰 인공지능 하데스에게 쫓겼으며, 안전가옥에 들어가서 퍼즐 자물쇠를 열었고, 키오스크에서 촬영한 동영상 속에서 흙먼지가 만들어내는 신호를 보았다. 51퍼센트 성공 확률이던 작전은 실패했지만 소득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시뮬레이션 속에서 보았던 정체불명의 흙먼지 신호는 현실 세계에서 절대 포착할 수 없는 정보였다. 구영대는 시뮬레이션에서 빠져나오자마자 알프가 저장해 놓은 신호를 분석했다. 키오스크의 위치를 16진수 문자열로 알려주는 신호였다. BBB 본점의 3번 키오스크를 정확히 가리키고 있었고, 키오스크로 다시 돌아오라는 신호가 분명했다.
“뭐야, 키오스크가 우리를 부른다는 얘기야?”
“시뮬레이션을 통해서가 아니고, 진짜 키오스크에 와주길 바란다는 신호를 보낸 거야.”
“무섭잖아. 우리가 온다는 걸 뻔히 알고 있다는 얘긴데 거길 들어가자고?”
“초대장이라고 생각하면 되지. 어쩌면 대단한 환영을 받을지도 모르잖아.”
“난 왜 결투 신청을 받은 것 같지?”
구영대는 어린 시절 독서에 미쳤던 시기가 있었다. 외계로부터 신호를 받았다고 생각했던 열두 살 이후부터 스무 살이 되기 전까지 엄청난 독서광으로 살았다. 처음에는 외계 생명체와 외계 신호에 대한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시간이 갈수록 소설과 SF(Science Fiction)에 빠져들었다. 이야기는 구영대에게 자유를 가르쳐 주었다.
이야기는 일종의 시뮬레이션이었다. 새로운 이야기를 읽을 때마다 처음 보는 세계가 머릿속에 펼쳐졌고, 구영대는 새로운 세계를 마음껏 살았다. 이야기 속의 세계는 때로 현실보다 더 실감 났다. 빠져나오기 싫을 만큼 달콤한 세계도 있었고, 현실에서는 절대 경험할 수 없는 모험으로 가득 찬 세계도 있었다. 구영대는 이야기 속에서 수많은 경험을 했고, 세상을 배웠고, 더 나은 선택을 배웠다. 구영대가 가장 좋아했던 소설은 스타니스와프 렘의 『솔라리스』였다. 솔라리스라는 행성에 있는 바다는 인간의 무의식을 읽을 수 있다. 주인공 켈빈이 솔라리스 행성의 외계 생명체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다가 결국 자신의 내면과 마주하게 된다는 이야기다. 『솔라리스』에 이런 문장이 있다. “나는 아무렇지도 않은 척했다. 스스로를 경멸할 여력조차 없었으므로.” 구영대는 그 문장을 노트에 적어놓고 자신의 처지와 무척 비슷하다는 생각을 했다. 한가한 사람한테만 스스로를 경멸할 여유가 있다.
“『솔라리스』라는 소설을 보면 인간의 무의식을 읽을 줄 아는 바다가 등장해.”
“형, 소설도 읽어?”
“옛날에 좀 읽었지.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 어쩌면 그 바다처럼 키오스크 역시 우리의 생각과 감정과 무의식을 읽는 건지도 몰라.”
“키오스크가 무의식과 대화한다니까··· 너무 무섭다.”
“무섭지만 기회가 될지도 몰라. 어쩌면 셀레나가 우리를 끌어들인 게 이런 이유 때문일지도 모르겠어. 다시 키오스크로 가보자. 알프에게 작전 성공 확률을 물어봤더니 80퍼센트로 나왔어.”
“왜 그렇게 높게 나왔대?”
“키오스크가 우릴 초대했다는 걸 알프도 알고 있으니까.”
신상도는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목표물을 점검했고, BBB 매장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모두 기록했다. 햄버거도 사 먹어보았다.
구영대의 설명대로라면 도시 전체의 네트워크가 먹통이 되었던 몇 분 동안 두 사람이 시뮬레이션으로 진입한 것이다. 그 후에 겪었던 수많은 일들은 현실이 아니라 뇌가 겪은 가상의 경험일 뿐이다. 신상도는 아무리 생각해도 현실과 시뮬레이션을 구분할 수 없었다.
“영대 형, 뭐 하나 물어봐도 돼?”
“물어봐.”
“지금이 현실인 건 맞아?”
“현실 아냐. 네 꿈속에 내가 들어온 거야.”
“장난치지 말고.”
“하하하. 내 농담이 장난 같다고 생각했으면, 지금 이 순간이 현실이라고 믿고 있는 거네. 믿으면 그게 현실이야.”
“계속 그런 말 들었더니 어지럽고 토할 것 같다.”
“아까 아이스커피 마셨지? 그 감각 기억나?”
“응, 너무 차가워서 머리가 깨지는 것 같았어.”
“바로 그거야. 시뮬레이션 속에서는 모든 감각을 부드럽고 안전하게 처리해. 그걸 이해하면 구분이 쉬울 거야.”
“경찰한테 쫓길 때는 진짜 죽을 것 같았어.”
“실제로 죽지는 않기 때문에 그런 상황에서는 아드레날린을 과다하게 분출하기도 해. 생존 본능이 극대화되면 더욱 살아 있다는 느낌을 줄 수 있으니까. 감각은 설계된 거지만 그때 느낀 감정은 진짜나 다름없어.”
“그럼 형이 정신을 잃었던 것도 실제가 아니라 설정이었던 거네.”
“지난 일은 그만 얘기하고, 오늘 밤에 BBB에 다시 들어가는 거 괜찮겠어?”
“다시가 아니라 처음이라고 해야 하는 거 아냐?”
“맞아, 그렇지.”
신상도는 장비를 챙겼다. 기분이 묘했다. 굉장한 모험을 벌이고 온 것 같은데 그건 시뮬레이션 속이었다. 앞으로 일어날 일에 대한 예고편 같은 것일지도 몰랐다. 본편은 예고편과 다르게 흘러갈 수도 있다고 생각하니 등골이 서늘해졌다. 지금 할 수 있는 일은 단 하나, 동료인 구영대를 믿는 것뿐이었다. 구영대는 알프의 메인 프로세서를 뜯어낸 다음 조립형 키트로 만들고 있었다. 알프를 가슴에 지니고 갈 생각이었다.
“CCTV 차단하고 우회로 통해서 진입하려면 11시까지 기다려야 해.”
신상도가 모든 준비를 마치고 소파에 앉으면서 말했다.
“기다릴 필요 없어.”
구영대가 웃으며 말했다.
“기다릴 필요 없다니?”
“우린 초대받았잖아. 키오스크가 우릴 위해서 모든 문을 활짝 열어줄 거야. 9시에 영업이 끝나니까 조금 있다가 출발하자.”
“안 열어주면?”
“걱정 마. 우리 이야기를 알프가 전해줄 거야.”
구영대는 알프를 조립형 장치로 바꿔 조끼 안쪽 주머니에 고정했다. 살아 있는 고양이를 품에 안고 있을 때처럼 따뜻한 기운이 온몸으로 퍼졌다. 알프가 함께 있다고 생각하니 듬직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두 사람은 9시 30분에 BBB 매장 앞에 도착했다. 3층 규모의 건물 외벽은 모두 유리로 덮여 있었는데, 곡면 유리가 내부의 은은한 빛을 거리로 뿜어내고 있었다. 사전 조사를 할 때의 모습과는 달랐다.
사람들이 북적거릴 때는 건물이 잘 보이지 않았는데, 고요함 속에서 빛을 내고 있으니 건물이 마치 살아 있는 존재 같았다. 구영대와 신상도가 건물 쪽으로 다가가자 유리의 색이 바뀌었다.
“상도야, 지금 겁나?”
“당연한 거 아니에요?”
“아마도 저 유리가 네 두려움을 읽었나 봐. 붉은색으로 바뀌고 있잖아.”
“진짜로 그게 가능하다고? 아까 형이 말했던 소설 ‘솔라리’인지 뭔지 그것처럼 저 유리가 우리의 무의식과 감정을 읽는 게 가능하다고?”
“그럼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혀 봐. 평온한 걸 떠올려 봐. 해변에서 뛰어노는 강아지나···.”
“한여름밤의 차가운 맥주 좋다. 캬···.”
“저기 봐. 유리 색이 바뀌잖아. 푸른색으로.”
유리 색이 붉은색으로 푸른색으로 바뀌는 장면은 아름다웠다. 신상도 마음속의 열기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두려움과 흥분은 가라앉고 차가운 아이스커피가 피를 대신하는 듯했다.
“형, 나 이제 들어갈 준비가 된 것 같아.”
“좋아. 들어가 보자.”
구영대와 신상도는 BBB의 정문 앞에 섰다. 문이 자동으로 열렸다. 발밑에서 등이 깜빡였다. 두 사람이 어디로 움직이면 되는지 바닥의 빛이 알려주고 있었다. 신상도의 사전 조사에 의하면 바닥의 빛이 가리키고 있는 곳은 키오스크가 있는 자리였다. 3번 키오스크가 기다리고 있는 곳으로 두 사람은 걷기 시작했다.
(다음 화에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