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이 책을 읽을 땐 정말 조심해야 한다. 그 누구도 예외 없이 주변에 무안할 정도로 크게, 자주 웃게 되는 책이니까. 수많은 매체에서 현대 기행 문학의 걸작으로 꼽는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 말이다. 키득거리며 책장을 넘기다 보면 긴 도보 여행이 하고 싶어지는 마음을 주체할 수 없게 될 것이다. 이 책은 저자가 약 3,500km에 달하는 미국의 애팔래치아 트레일에 도보 여행을 나선 이야기다.
걷는다는 행위의 본질까지 낱낱이 살피는 책
그가 이 무모한 여정을 시작한 이유는 거창하지 않다. 집 뒤로 이어지는 숲길을 보다가 문득 걷고 싶어서였다. 그게 전부였다. 위대한 여정은 종종 이렇게 사소한 동기로 시작된다. 브라이슨은 오랜 친구 스티븐 캐츠와 함께 길을 나섰다. 캐츠는 뚱뚱하고, 준비가 덜 돼 있고, 걷는 내내 투덜댄다. 그런데 바로 캐츠가 이 책을 생물처럼 만든다.
브라이슨의 유머는 캐츠를 향한 것이기도 하지만 자기 자신을 향한 것이기도 하다. 독자는 웃으면서 읽다가, 그 웃음 속에 무언가 진지한 것이 녹아 있다는 걸 슬며시 눈치챈다. 브라이슨의 미덕은 바로 이것이다. 조금도 젠체하지 않으면서 깊이 들어오는 것. 그는 숲을 걸으며 미국 산림청의 무능함을 비판하고, 자연 파괴의 현실을 고발하고, 미국이라는 나라의 문화적 속살을 들여다본다. 하지만 그 비판은 결코 무겁지 않다. 독자는 설교를 듣는 게 아니라 수다를 듣는다. 그러면서도 어느 틈엔가 세상을 다르게 보게 된다. 이는 여행 에세이가 성취할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일이리라. 눈치채지 못하게 독자를 바꿔놓고, 여행을 꿈꾸게 만드는 것.
브라이슨이 숲에서 발견한 것은 자연만이 아니었다. 그는 걷는다는 행위의 본질까지 낱낱이 살핀다. 걸을 땐 경쟁할 필요가 없다는 것, 누군가 함께 걷는다 해도 결국은 혼자 해야 하는 일이라는 것, 그리고 어딘지 모르는 목적지를 향해 뚜벅뚜벅 걸어가는 일이야말로 삶이라는 통찰에 이른다. 나는 젊어서 ??『나를 부르는 숲』??을 읽고 오랜 시간 도보 여행의 환희를 가슴에 품고 살았다. 돌이켜 보면 든든한 보험 하나와도 같았다. 세상살이에 치여 마음이 지쳐서 어딘가로 훌쩍 떠나 잔뜩 걷고 나면, 다시금 마음이 용기로 가득 차오른다는 것을 알았으니까.
함께 걸을 사람이 없었는데, 그것이 좋았다
십여 년 전, 네팔 히말라야의 쿰중 지역을 혼자 걷고 있었다. 짐이라고는 배낭 하나와 헌책방에서 구매한 지도 한 장이 전부였다. 함께 걸을 사람이 없었는데, 그것이 좋았다. 혼자 걷는다는 것은 온전히 자기 자신을 만나는 일이니까. 브라이슨은 캐츠와 함께였지만, 그도 결국은 혼자였다는 것을 잘 안다. 걸으며 진정한 대화를 나눌 상대는 언제나 자기 자신이다.
쿰중에서 하루하루 고도를 높여가는 일은 천천히, 그러나 확실하게 숨을 조여왔다. 심호흡의 패턴을 바꿨다. 짧고 빠른 호흡에서 길고 느린 호흡으로. 남은 길이 길었다. 긴 도보 여행은 퇴로가 없으니 스스로를 잘 건사하며 가야 했다. 천천히 걸었다. 바쁘고 급한 건 한국에서 이미 충분했으니까. 오늘 가야 하는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 살피는 일도 없었다. 부질없었으니까. 한 걸음씩 내딛다 보면 결국 어딘가엔 도착할 것이었다. 날이 갈수록 발걸음은 무거워졌지만 머리는 가볍고 선명해졌다. 산 아래에 남겨두고 온 세상살이 걱정들은 고도가 높아질수록 공기와 함께 희박해졌다. 나를 둘러싼 산속의 세상은 지독하게 고요하고 맑아서 눈이 시렸다. 걸으면서 얼마나 자주 되뇌었는지 모른다. 여기 오길 잘했다고.
애초의 목적지는 산악인들이 머무는 에베레스트 베이스 캠프였다. 하지만 방향을 틀어 예정에 없던 ‘고쿄’로 향했다. 소설로 읽었던 ‘촐라체’ 고개를 조망할 수 있다는 말에 홀린 탓이었다. 기한을 두지 않은 여행이었으니 에둘러 가도 상관없었다. 다만 나의 변덕처럼 날씨도 변덕을 부렸으니, 한차례 폭설이 내린 후의 궂은 날씨를 뚫고서야 겨우 고쿄에 닿을 수 있었다.
눈으로 뒤덮인 길을 헤치고 고도 5천m 언저리의 고쿄 마을에 들어섰을 때 나는 거의 탈진 상태였다. 마을이라 해봐야 드문드문 들어선 집 몇 채가 다였다. 고도가 높아 하늘은 아주 가까웠고, 가만히 서 있기만 해도 숨이 턱턱 막혔다. 게다가 춥고 바람은 강하게 불었으니, 이런 데 사람이 살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경이로웠다. 여기서도 사람들은 저 아래 세상과 마찬가지로 밥을 짓고 잠을 자고 노동하며, 아웅다웅 살아가겠지.
주변이 어둠에 물들기 직전이라 다급했다. 걸음도 생각도 멈출 새 없이 꾸역꾸역 나아가 간신히 롯지(lodge)에 들어섰다. 폭설이 내린 뒷날이라 누군가 들어설 것이라고 예상치 못했는지 여주인이 놀라서 뛰쳐나왔다. 뒤이어 롯지에 머물던 손님들도 구경거리를 좇아 따라 나왔다. 무안할 정도로 환대가 쏟아졌는데, 그도 그럴 것이 내 몰골은 조난을 연상하기에 충분했다. 온몸이 눈과 땀에 젖어 지친 행색이 역력했고, 얼굴은 볕에 그을린 데다 얼어 있지, 콧수염에는 고드름 같은 얼음이 가득 달려 있었다. 아무리 떼어내도 다시 생겨나길래 그냥 둔 것이었다. 수염을 훔칠 기력도 시간도 아껴야 했으니까.
여주인은 부리나케 방을 하나 정리해 주었고, 웰컴 주스라며 멸균팩에 든 망고주스를 데워 주었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주스를 홀짝이며 비로소 숨을 돌렸다. 그러는 중에 주인 아들이 방에 들어왔다. 이십 대 초반쯤 돼 보이는 청년이었다. 그는 특별한 말 없이 나를 살피며 서 있었다. 무언의 격려를 가득 담은 눈길이었다. 깊은 산에 사는 청년은 내가 오늘 얼마나 험한 하루를 겪었을지 잘 아는 듯했다. 그를 보며 조금은 이상한 감정에 사로잡혔다. 왠지 청년이 나와 닮은 것 같았다. 혈통적으로 체형적으로도 엇비슷해 보였으니 마치 먼 친척을 만난 것 같기도, 다른 생애의 내 과거를 만난 것 같기도 한.
여행은 내가 가진 것과 갖지 못한 것,
타인이 가진 것과 갖지 못한 것의 간극을 바라보는 일
고쿄에서 사흘을 더 머물렀다. 마을 주변의 산에 다니며 등산을 마저 했고, 2달러짜리 사치를 부려 따뜻한 샤워를 하며 회복했다. 보름간의 여정에서 유일한 샤워였다. 좋은 곳에서 보내는 좋은 시간이었다. 그러는 동안 청년과 보내는 시간도 많았다. 그는 늘 싱글생글 표정이 밝았다. 손님에게 밥을 내어줄 때도, 창밖의 산을 가리키며 이것저것 알려줄 때도 얼굴에 그늘이라고는 없었다. 하루하루를 성실하게 살아가는 사람의 고요한 단단함이 몸에 배 있었다. 마치 히말라야를, 걷기를 체화한 듯이.
청년은 자유롭게 세계 이곳저곳을 여행하는 내가 부럽다고 했다. 그는 이 고산 마을에 묶여 있었다. 가난했고, 어머니를 도와야 했으니 운신의 폭이 좁았으리라. 그러나 나는 자유롭다면서도 늘 무언가에 쫓기는 얼굴을 하고 살아가니, 정작 마음의 자유를 누리는 사람은 청년일지도 몰랐다. 그는 산을 닮아 심성이 고요하고, 표정은 맑고 밝았다. 큰 산은 사람을 겸손하게 만든다지. 나를 더욱 겸손하게 만드는 건 청년이었다.
여행은 내가 가진 것과 갖지 못한 것, 그리고 타인이 가진 것과 갖지 못한 것의 간극을 바라보는 일이다. 그래서 자아를 만나는 시간임과 동시에 타자를 만나고 품는 시간이기도 하다. 브라이슨도 애팔래치아 숲길을 걸으며 진정한 자신을 만나고, 길 위에서 수많은 이들을 만나며 성찰을 얻는다. 트레일의 하이커들, 작은 마을의 주민들, 그가 길 위에서 만난 사람들을 묘사하는 방식은 언제나 따뜻하다. 브라이슨은 그들을 풍경의 일부로 소비하지 않는다. 한 사람 한 사람의 이야기를 듣고 기억한 뒤 유머로 잘 다듬어 독자에게 건넨다. 그러니 『나를 부르는 숲』은 길 위의 우연한 만남들을 모아 이룩한 하나의 세계이며, 사람에 대한 책이기도 하다.
그나저나 브라이슨은 과연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종주하는 데 성공했을까? 『나를 부르는 숲』의 진정한 미덕은 성공하지 못한 여행기라는 데 있다. 브라이슨과 캐츠는 반 년을 넘게 걸었지만 결국 트레일의 반도 못 갔다. 하지만 완주를 못 했기에 작가가 얻은 교훈이 더욱 진실되게 와닿는다. 여행은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라는 것, 얼마나 많이 걸었나보다 길 위에서 무엇을 보았는가가 더 중요하다는 것 말이다.
살면서 문득문득 떠오르곤 한다. 까닭 없이 나와 닮았다고 느껴지던 고쿄의 청년. 그는 이제 여행할 당시의 내 나이쯤 됐겠지. 그가 여전히 고쿄에 있는지, 아니면 산을 내려가 다른 삶을 찾았는지 알 수 없다. 여전히 행복한 얼굴을 하고 있는지 아닌지도 모른다. 브라이슨은 말한다. 길이 끝나도 걸었던 시간은 남는다고. 만났던 사람들의 얼굴이 남는다고. 나는 그 말을 히말라야에서 몸으로 배웠다. 고쿄의 롯지에 처음 도착하던 날, 방을 비추는 희미한 불빛 아래서 말없이 나의 안위를 살펴주던 청년. 벗어놓은 내 등산화에 아무렇지 않게 손을 쑥 집어넣으며 많이 젖었으니 말려주겠다던 청년의 밝은 얼굴이 여태 기억에 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