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해 6월 칠레 수도 산티아고로부터 약 2시간 거리에 있는 도시 발파라이소에서 한 주민이 폐렴 증세를 보이는 생후 3개월 아이를 병원에 데려갔다. 하지만 병원 대기자 명단이 너무 길어 아이는 결국 치료 받지 못하고 사망했고 이 소식을 들은 칠레 국민들은 큰 슬픔에 빠졌다. 칠레 하원에 제출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1월부터 4월까지 이 비극적 사례처럼 병원 대기자 명단에 올라가 있는 동안 사망한 환자가 무려 1만477명에 달한다. 상황의 심각성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칠레의 보건의료 상황은 그리 좋지 않다. 칠레는 중남미 국가 중 1인당 GDP가 가장 높지만 남북으로 길고 가늘게 뻗어 있는 지리적 특성, 부족한 의료 인력과 인프라 때문에 의료접근성이 낮은 편에 속한다. 예를 들어 지난해 기준 칠레의 인구 1천 명당 의사 수는 2.6명으로 OECD 평균인 3.6명에 비해 부족하다. 인구 1천 명당 병상 수 또한 2.0개로 OECD 평균인 4.5개에 훨씬 못 미친다. 그렇기 때문에 많은 칠레 국민이 즉각적인 의료서비스를 받지 못하고 있다.
만성적인 공공과 민간 보건의료서비스 격차, 병상과 전문 의료인력 부족 상황에서 코로나19 이후 호흡기 질환자 수가 급증했다. 외과 및 일반 진료 역시 늘어나는 의료 수요를 감당하지 못해 대기자 수가 누적됐고, 특히 수술과 전문 진료가 필요한 환자들이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이에 병원 수요 급증으로 발생하는 대기 환자 적체 현상을 해소하고 낮은 의료접근성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칠레 정부의 주요 과제가 됐다.
보건의료체계 미비, 관련 인프라 및 경험 부족으로
한국의 경험과 지식 공유 요청
칠레 정부는 현재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보건부를 중심으로 보건의료 부문 디지털화를 추진하며 데이터 보호 및 사이버 보안 정책을 수립하고 있다. 그러나 보건 및 의료 체계에서 중심 역할을 할 시스템이 부족하고, 디지털 헬스케어에 대한 수요는 있지만 관련 인프라와 경험이 부족해 세밀한 정책 설계가 어려운 상황이었다. 칠레 정부는 경제발전경험 공유사업(KSP)을 통해 한국의 관련 경험과 지식을 공유받기를 원했다.
한국 정부는 칠레의 요청에 응답해 ‘2023~2024년 칠레 KSP’ 사업을 시작했다. 우선, 칠레의 구체적인 요구를 반영하기 위해 한국의 보건의료 전문가들과 면담을 진행하며 대주제와 세부 주제를 선정했고, 사업 착수 전 칠레 정부와 함께 구체적인 분야를 논의했다. 공공의료서비스 개선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 칠레 정부의 의견을 반영해 디지털 기술을 활용한 공공의료서비스 개선을 대주제로 정했다. 아울러 ‘질병 예방을 위한 디지털 헬스케어 프로그램 도입’, ‘IT 기술을 활용한 1차 의료기관 만성질환 환자 관리의 질적 향상’, ‘1~3차 의료기관 협업 시스템 효율화를 통한 대기 환자 감축 및 의료접근성 개선’이라는 세 가지 세부 주제에 대한 정책 자문이 시작됐다. 지난해 8월 공개 입찰을 통해 강북삼성병원 미래헬스케어추진본부가 수행기관으로 선정됐고 본격적인 사업에 착수했다.
첫 번째 세부 주제인 질병 예방을 위한 디지털 헬스케어 프로그램 도입은 칠레에 만성질환 관련 사망자가 많고 만성질환 환자 수 역시 늘고 있다는 점에 착안한 것이다. 칠레는 지역사회 생활 현장에서 만성질환 관리군 및 고위험군을 대상으로 건강관리 프로그램을 도입하고자 했다. 이를 위해 현지 학교와 직장의 건강증진 정책과 프로그램을 분석했고, 한국의 보건소 모바일 헬스케어 사업과 강북삼성병원의 직장인 건강관리 프로그램(EAP) 사업 추진 경험을 공유했다. 현지 환경에 적합한 전략을 도출하고자 산티아고에 있는 루이스 바르가스 살세도(Luis Vargas Salcedo) 공립학교 등 학교와 직장을 방문해 관계자 면담을 진행했고, 그 결과 지역사회 건강증진제도 강화를 위한 정책제언과 학교와 직장에 모바일 헬스케어 시범사업을 도입하는 계획을 도출했다.
두 번째 세부 주제는 대기 환자가 크게 늘고 3차 의료기관으로 환자 쏠림이 심화하는 현상이 공공 의료접근성을 저하한다는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IT 기술을 활용해 1차 의료기관의 만성질환 환자 관리를 질적으로 향상하는 것이었다. 산티아고 의료 취약 지역의 공공 1차 의료기관인 세스팜(CESFAM)에 방문해 의료 환경을 조사했고 관계자들과 여러 차례 토의해 만성질환자 관리 모델을 설계했으며 시범사업을 단계적으로 도입하는 체계적인 전략을 도출했다. 또 환자, 상병 분류에 많은 인력과 시간이 소요되는 문제는 칠레의 80가지 중증질환에 대한 무상 의료서비스인 국가 필수의료 보장 프로그램(AUGE-GES) 적용 의뢰서의 용어 표준화·전산화를 통해 해소하는 한편, 3차 의료기관 쏠림은 1차 의료기관 중심으로 질환을 관리하는 프로그램을 구축하고 의료 공급 모형을 다변화해 완화하는 방안을 제안했다.
마지막으로, 1~3차 의료기관 협업 시스템 효율화로 대기 환자를 감축하고 의료접근성을 개선하는 내용의 세부 주제는 특히 한국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재 칠레 보건부에서 추진하고 있는 건강정보 상호운용성 강화 사업과 디지털 헬스케어 사업, 관련 법제화 활동이 효율적으로 잘 이뤄질 수 있도록 돕고자 했다. 구체적으로 한국보건의료정보원에서 추진하고 있는 보건의료 정보 국가 표준 및 인증 사례, 한국 의료기관의 환자 예약 시스템, 의료 용어 및 데이터 표준화, 보건복지부의 건강정보 고속도로 사업 등을 소개해 의료전달 체계 개선을 위한 시사점을 도출했다.
이 내용들은 지난 6월 최종 정책제언으로 칠레 정부에 전달됐다. 칠레 보건부 오스발도 살가도(Osvaldo Salgado) 차관 등 고위급 인사들은 이번 KSP 사업에 관심이 크며 후속 KSP 사업 신청도 고려하고 있다고 밝히기도 했다.
공공의료서비스의 질적 향상 위해 디지털 헬스케어에
인프라 개선, 인력 충원, 법·제도 개선 동반돼야
디지털 헬스케어는 의료의 질, 비용, 접근성 등 세 가지 요소가 자원의 제약으로 동시에 충족되지 못하는 ‘보건의료 철의 삼각’ 문제를 해결할 유망 기술로 주목받고 있다. 칠레 정부도 이 기술을 의료접근성을 높이는 유용한 도구로 보고 있다. 하지만 디지털 헬스케어가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의료 비용 문제를 고려하고, 의료의 질을 높이기 위해 보건의료 인프라를 개선하며, 전문 의료 인력을 충원하는 것도 중요하다. 또한 디지털 헬스케어 기술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려면 관련 법과 제도도 함께 보완돼야 한다.
따라서 이번 칠레 KSP 사업에서는 단순히 한국의 디지털 기술을 전달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한국의 경험과 지식을 바탕으로 칠레의 보건 및 의료 서비스를 디지털화할 수 있는 실질적인 정책과 제도개선 방안을 종합적으로 제언했다. 이러한 노력이 앞으로도 계속돼 칠레 국민이 병원에서 대기하다 죽음을 맞이하는 대신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이 있는 일상으로 복귀하는 해피엔딩을 맞이할 수 있길 희망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