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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
독서의 문장들존재와 돌봄
김혼비 에세이스트 『우아하고 호쾌한 여자 축구』, 『다정소감』 저자 2024년 10월호

경남 진주에서 ‘보틀북스’라는, 그 지역의 책을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든든한 등대 같은 서점을 운영하며 그 경험을 바탕으로 두 권의 에세이를 출간한 작가 채도운이 이번에는 두 편의 소설이 들어 있는 『강낭콩』을 펴냈다. 첫 번째 단편 <강낭콩>은 임신중절에 관한 이야기고, 두 번째 단편 <식물뿌리>는 식물인간인 아버지를 부양하는 모녀의 이야기다.

그러니까 인간의 생명성, 과연 어디까지를 ‘살아 있는 상태’로 볼 것인가에 관한 문제와 몇 년간 해온 돌봄노동 때문에 완전히 사라졌거나(<식물뿌리>) 몇 년간 해야 할 돌봄노동 때문에 완전히 사라질(<강낭콩>) 돌봄노동자들의 미래와 삶의 문제가 이 두 단편을 관통하는 주제다. 이 첨예한 전쟁터인 돌봄노동 문제에서 성인 남성들은 철저히 빠져 있고, 한국의 대표 돌봄노동자 3인방인 아내, 딸, 엄마의 이야기들이 조명된다는 점에서부터 매우 뼈아프게 현실적이다.

사실 이 책을 열기 전, 워낙 이 시대의 논쟁적인 주제이기에 뻔하게 흘러가지 않을까 살짝 걱정했다는 걸 고백한다. 하지만 식물인간으로 누워 있는 진석의 몸을 이마에서부터 세밀하게 훑으며 마치 ‘시간의 엑스선’을 투과한 듯 그 몸에 켜켜이 깃든 진석의 역사를 담담히 서술하고, 지구 최초의 식물인 고대 이끼류가 진화하면서 갖게 된 관다발과 진석의 몸에 꽂힌 튜브와 관들을 한데 포개는 상상력으로 포문을 여는 도입부를 읽고, 이것은 하나의 새로운 이야기, 꼭 읽어둬야 할 이야기가 될 것임을 확신했다.

어찌 보면 뻔한 주제, 예상과 다르게 흘러가기 힘든 주제를 갖고 독창적인 서사를 만들고 새로운 문제의식을 이끌어내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인데, 채도운은 그만의 관찰력, 표현력, 상상력을 문학적 기교에 담백하게 얹어 그걸 해낸다. 특히 그가 소설 곳곳에 베란다에 방치된 죽은 식물, 지영의 손에 생채기를 낸 몬스테라, 장미꽃다발, 스투키, 냉이 같은 식물들을 절묘하게 배치해서 식물인간인 진석의 상황과 지영의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붕괴와 재생의 과정을 한데 포개고 겹치며 보여주는 방식은 아름다우면서도 가차 없다. 그리고 그것은 ‘기억이 곧 존재’라는 철학적인 통찰, 한 존재와 관련해서 새롭게 유입되는 경험이 없다면 기억은 점멸하고 존재도 점점 사라진다는 차가운 사실까지 깊이 고민하게 만든다.

한 사람과의 추억은 돌봄의 대가가 된다. 추억이 소진되고 고갈되면 돌봄도 끝난다. 지영은 더 이상 간병을 지속할 수 없었다. 진석이 식물인간이 된 이후로 지영과 진석 사이의 추억은 유한한 한계량이 있었기 때문이다. -p.63

하지만 나는 이 책을 다 읽고 나서 설령 ‘존재하기 위해 기억되는 것’이 진실일지라도, 그 반대인 ‘기억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정답이 될 수 있는 순간들을 저절로 생각하게 됐다. 그가 소설을 통해 전해준 여성들의 이야기, 이토록 생생하고 가장 사적이어서 가장 정치적이기도 한 이야기들을 똑똑히 기억하는 것이 훨씬 더 가치 있게 살 수 있는 존재의 사명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이제 나는 식물이 된 가족을 돌보느라 사회생활에서 “길마다 발에 걸리는 돌”이 된 사람을 보면 소설 속 지영을 떠올리며 전보다는 훨씬 구체적으로 그를 이해하고, 필요한 순간에 지연이 솔아에게 건네는 바닐라라떼 같은 어떤 것 혹은 그 이상의 것을 기꺼이 건넬 수 있을 것 같다. ‘돌봄’까지는 불가능하더라도 ‘살핌’은 언제나 가능하니까. 살핌이 쌓이면 연대가 되니까.

그리고 불행이 괴로운 이유는 “불행을 외면하려고만 해서”이기에, 불행을 받아들이고 “불행을 벗 삼아 살자”라던 지영의 말을 아주 오래 기억하게 될 것 같다. 언젠가 아주 힘든 시간을 통과할 때 저 말이 나를 가만히 일으킬 거라고 믿는다. 늘 마음속으로 다져왔던 다짐들에 구체성과 다른 각도의 시선과 어떤 믿음을 더해준 채도운에게 고맙다. 그의 다음 소설을 열렬히 기다리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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