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도 어김없이 노벨상 시즌이 왔다. 특히 10월 6일 노벨 생리 의학상을 받은 사카구치 시몬(74), 프레드 램즈델(65), 메리 브랑코(64) 세 과학자의 업적은 일반 시민도 관심을 가질 법하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 숫자가 늘어나는 자가 면역 질환 치료에 돌파구가 될만한 기초 연구를 수행한 이들이기 때문이다.
주변에 류머티즘 관절염을 앓고 있는 지인이 있을 수도 있겠다. 이 병은 우리 몸속 면역 세포가 멀쩡한 관절의 활막을 공격해 염증을 유발하는, 뾰족한 치료법이 없는 지독한 자가 면역 질환이다. 면역 세포가 대장, 소장 등 소화기관을 공격하면 만성 설사, 복통, 혈변 등을 견뎌야 하는 궤양성 대장염, 크론병 같은 염증성 장 질환이 나타난다.
자가 면역 질환에 관심을 기울여 보면 겁이 날 정도로 질환 리스트가 늘어난다. 췌장은 혈당 조절 호르몬인 인슐린을 분비하는데, 면역 세포가 췌장을 공격하면 제1형 당뇨병이 생긴다. 뇌, 척수 같은 중추신경계를 공격하면 시력, 근력이 떨어지고 감각 이상이 발생하는 다발성 경화증이 생긴다. 드물지만 면역 세포가 폐나 심장을 공격해서 생명을 위협할 수도 있다.
만성이든 급성이든 자가 면역 질환은 환자와 그 가족에게 심각한 고통을 안긴다. 하지만 현재로서는 면역 세포가 ‘보호해야 할’ 자기 몸의 조직을 위험한 것으로 오해해서 공격하는 질환이라는 것 외에는 알려진 것이 제한적이다. 자가 면역 질환 환자가 증상을 완화하는 치료법 외에는 기댈 곳이 없는 사정도 이 때문이다.
당연히 지금 전 세계 곳곳에서 수많은 의사, 과학자가 자가 면역 질환 치료의 돌파구를 마련하고자 밤낮 없이 애를 쓰고 있다. 이번 노벨 생리 의학상은 그런 시도에 실마리를 제공한 과학자 세 사람에게 돌아갔다. 이들은 면역 세포 가운데서도 중요한 ‘T 세포’에 관심을 가졌다. 가장 먼저 시도한 과학자는 일본의 사카구치 시몬이었다.
면역계 경찰관을 발견하다
사카구치 시몬이 아직 40대였던 1990년대만 하더라도 우리가 면역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주 제한적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가진 면역인 ‘내재 면역’과 살아가면서 세균이나 바이러스 등 다양한 항원에 노출될 때마다 그것을 이겨내고 기억해서 학습하는 ‘후천 면역’ 두 종류가 있다는 것, 후천 면역을 활용한 백신 접종으로 세균이나 바이러스 예방이 가능하다는 것 등.
특히 흉선(가슴샘)에서 만들어지는 T 세포가 후천 면역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다는 사실도 알려졌다. 당시만 하더라도 과학자 대다수는 T 세포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세포나 암세포 등을 찾아내 킬러처럼 제거하는 역할을 한다고 파악했다(killer T cell, cytotoxic T cell). 하지만 사카구치는 T 세포에 다른 중요한 기능이 또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특정한 T 세포를 제거한 쥐들은 치명적인 자가 면역 질환을 앓았다. 이들에게 온전한 구성의 T 세포를 넣어주자 자가 면역 질환 증상이 완화됐다. 사카구치는 T 세포 중에는 킬러 역할을 하는 것뿐만 아니라 면역 활동을 통제하는 경찰관 역할을 하는 세포도 있음을 알아챘다. 이렇게 1995년 ‘조절 T 세포(regulatory T cell)’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졌다.
이번에 사카구치와 노벨상을 함께 받은 메리 브랑코와 프레드 램즈델은 2001년 조절 T 세포의 생성과 기능에 관여하는 핵심 유전자(Foxp3)를 찾았다. 자가 면역 질환을 앓는 돌연변이 쥐와 면역계가 통제 불능 상태에 빠져 면역 세포가 온몸의 조직을 공격해 생명을 잃게 만드는 심각한 선천성 희귀병인 IPEX 증후군 환자 모두 이 유전자에 문제가 있었다.
2003년, 50대가 된 사카구치는 이 핵심 유전자를 보통의 T 세포에 집어넣어서 작동하도록 하면 그것이 면역 억제까지 하는 조절 T 세포로 바뀐다는 사실을 실험으로 보였다. 이로써 유전자부터 조절 T 세포까지의 그림이 이 세 과학자의 노력으로 완벽하게 맞춰졌다. 이번에 이들이 공동으로 노벨상을 받은 이유다.
자가 면역 질환 치료부터 항암제까지
조절 T 세포 연구가 자가 면역 질환 치료에 어떻게 돌파구를 마련할 수 있을까? 앞에서 사카구치가 했던 돌연변이 쥐 실험을 기억해 보자. 자가 면역 질환을 일으킨 돌연변이 쥐, 즉 T 세포가 자기 조직을 공격하는 상태에서 조절 T 세포를 넣어주자 자가 면역 질환 증상이 완화됐다.
면역학에 특별한 지식이 없는 독자도 바로 감을 잡았을 테다. 류머티즘 관절염, 제1형 당뇨병, 염증성 장질환, 다발성 경화증 등 면역 세포의 폭주로 발생하는 질환을 놓고서 몸속 조절 T 세포의 수를 늘리거나 그 면역 억제 기능을 강화하는 방식의 치료제를 찾는다면 자가 면역 질환을 통제할 가능성이 커진다.
이뿐만이 아니다. 역발상도 가능하다. 암세포를 의인화해 보자. 암세포 입장에서는 조절 T 세포의 면역 억제 기능을 강화하는 게 좋을까, 약화하는 게 좋을까? 맞다. 조절 T 세포가 킬러 T 세포의 활동을 방해하도록, 그래서 암세포의 횡포를 방치할수록 좋다. 실제로 암세포는 몸속에서 조절 T 세포를 포섭해 몸속 면역 세포를 무력화한다.
이 대목에서 조절 T 세포를 활용한 항암제를 개발할 수 있다. 암세포 주변에서 조절 T 세포를 제거하거나 제 역할을 못 하게 하면 어떻게 될까? 예를 들어 앞에서 언급한 핵심 유전자 Foxp3의 기능을 억제하면 그 결과가 어떨까? 일시적으로 브레이크가 풀린 킬러 T 세포 같은 면역 세포가 특정 부위 암세포를 공격해서 무력화할 수 있다.
조절 T 세포 연구 덕분에 혜택을 받을 수 있는 또 다른 집단도 있다. 바로 간, 심장, 신장 등 다양한 장기를 이식받은 이들이다. 이들은 장기 이식이 성공하고 나서도 면역 거부 반응 때문에 평생 면역 억제제를 복용해야 한다. 이번에는 조절 T 세포가 제 역할을 하도록, 즉 면역 억제 기능을 수행하도록 유도한다면 장기 이식의 부작용을 줄일 수 있다.
이렇게 설명을 듣고 보니 세 과학자 모두 충분히 노벨상을 받을 만하지 않은가! 여기서 반전이 있다. 이제 70대가 된 사카구치나 60대의 브랑코와 램즈델 모두 평생 학계에서 주목받는 슈퍼스타 과학자인 적이 없었다. 셋 다 묵묵히 자신의 분야에서 기초 과학 연구를 수행했던 평범한 과학자였을 뿐이다.
매해 10월 첫째 주 노벨상 발표 시즌이 될 때마다(수상 소식을 전하는 전화를 받지 못할까 봐) 휴대전화를 품에 안고 자는 슈퍼스타 과학자 몇몇이 있다는 농담 같은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브랑코는 노벨상 수상자 선정 소식을 알리는 전화를 스팸 전화로 의심해 휴대전화를 꺼놓았고, 램즈델은 이 시기에 전화를 꺼놓고 오지에서 배낭여행 중이었다.
한국 과학자 가운데도 2020년대나 2030년대 어느 시점에 20~30년 전, 즉 2000년대의 어떤 연구 성과로 노벨상을 받는 사람이 나올 수 있다. 그 주인공은 슈퍼스타가 아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