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내용으로 건더뛰기

KDI 경제교육·정보센터

ENG
  • 경제배움
  • Economic

    Information

    and Education

    Center

칼럼
정여울의 나란히 한 걸음취리히의 루브르, 쿤스트하우스
정여울 『여행의 쓸모』, 『데미안 프로젝트』 저자 2025년 11월호



예술과 문화의 중심, 취리히에 가다

“세상은 한 권의 책이며,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한 페이지만 읽는다.” 성 아우구스티누스의 명언이다. 이 말을 생각하면 갑자기 마음이 다급해진다. 내가 세상이라는 책의 첫 장만 계속 반복해서 읽고 있는 사람일까 봐. 물론 하루하루가 소중하고 찬란하다고 느끼는 순간에는 이런 생각이 들지 않는다. 지금 내 일상이 좋고 다음 날 아침이 기대된다면 굳이 여행을 떠나지 않아도 좋다. 하지만 가끔 길을 잃었을 때, 때로는 많이 지쳤을 때, ‘여행만이 줄 수 있는 위로’가 있다. 매일 출근해야 한다는 압박이 없고 다음 날 누군가를 꼭 만나야 한다는 스트레스가 없는, 내 마음대로 내 시간을 창조해도 좋은 자유를 얻었을 때의 기쁨. 일로부터의 휴식뿐 아니라 복잡한 인간관계로부터의 휴식, 익숙한 감정으로부터의 휴식이 필요할 때. 나는 여행을 계획한다. 계획하는 순간부터 시작되는 설렘을 사랑하기에. 그런 설렘은 아무리 반복해도 지겨워지지 않는다. 세상이라는 책의 다음 장을 넘길 준비를 하며 어쩌면 지금 이 순간의 고통을 견뎌낼 힘이 생기는 것인지도 모른다.



느림을 기획하고, 느림을 예찬하는 도시

취리히는 수많은 관광지로 가득한 아름다운 도시이지만, 내게는 ‘걷기 좋은 도시’로 다가왔다. 기차에서 내려 취리히 중앙역 근처를 걷기만 해도 도시의 매력을 흠뻑 느낄 수 있다. 오래 걸어도 클랙슨 소리 한 번 들리지 않을 정도로 거리는 평화롭고 잔잔하다. 시민들의 주요 교통수단이 트램이기 때문에 교통 체증이 거의 일어나지 않고, 또 많은 사람이 자전거 타는 걸 선호하며 빠른 속도를 원하지도 않는다. 높은 인구 밀도에 비해서 ‘붐빈다’는 느낌이 적은 이유는 잘 정돈된 도시 곳곳의 건축과 느슨한 교통 상황 때문일 것이다. 이 도시는 느림을 기획하고, 느림을 예찬하는 도시가 아닐까. 리마트강을 따라 걷거나 뛰는 사람들의 표정도 하나같이 여유로웠다. 

십여 년 전 나에게 밀맥주 ‘바이스비어’의 맛을 알게 해준 도시도 바로 취리히다. 그때는 라거맥주와 흑맥주 이외의 다른 맥주를 몰랐는데, 우연히 들어간 취리히의 한 바에서 너무나 맛있게 맥주를 마시고 있는 손님을 보고 그가 마시는 맥주 색깔에 반했다. 그때부터 바이스비어의 상큼하고 달콤한 맛에 푹 빠지게 됐다. 

이번 취리히 여행에서는 큰맘 먹고 ‘쿤스트하우스’를 중심으로 예술 기행을 하고 싶었다. 쿤스트하우스는 ‘스위스의 루브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만큼 많은 소장품을 지닌 데다 시대별로 다채로운 작품들이 관객을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또 루브르박물관과 달리 관람객이 그리 많지 않기 때문에 더 매력적이다. 모나리자를 한 번 보기 위해 ‘기나긴 줄’부터 서야 하는 루브르박물관과 달리, 거대한 모네의 수련 연작이 있는 방에 들어가도 관람객이 2~3명밖에 없을 때가 많다. 취리히 여행자들이 쿤스트하우스 같은 미술관보다는 ‘알프스 투어’를 많이 계획하기 때문인 것 같다. 그러나 내가 본 쿤스트하우스는 하루만으로는 시간이 모자라 이틀에 나눠 관람해야 할 정도로 방대한 작품 수를 자랑하고 있었다. 아직 관광객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이곳을 소개하고 싶은 마음에 더욱 열심히, 한 작품도 빠짐없이 꼼꼼히 감상하며 미술관 곳곳에서 위대한 작품들을 만났다.

쿤스트하우스에서 가장 놀라운 전시실은 모네의 방, 고흐의 방 그리고 자코메티의 방이다. 이 외에도 파블로 피카소, 프랜시스 베이컨, 앤디 워홀, 마크 로스코 등 수많은 위대한 작가들의 컬렉션이 한데 모여 있다. 쿤스트하우스에는 유독 자코메티의 작품이 많은데, 그건 당연히 스위스가 ‘자코메티의 나라’이기 때문이다. 스위스를 대표하는 화가이자 조각가인 자코메티는 젊은 시절 파블로 피카소, 호안 미로, 막스 에른스트 등의 걸출한 작가들과 함께 공부했다. 

파리나 런던에서는 이름만 적혀 있어도 인파가 붐벼 작품을 감상하는 것 자체가 어려웠던 작가들이 스위스에서는 이토록 ‘한적하게’ 감상할 수 있는 대상이라는 것이 너무도 놀라웠다. 쿤스트하우스에서는 수많은 예술 작품이 마침내 자신들이 편안히 머물러 쉴 곳을 찾은 느낌이었다. 그래서 쿤스트하우스(Kunsthaus)라는 이름 자체가 더욱 가슴에 와닿았다. 독일어로 쿤스트는 ‘예술’, 하우스는 ‘집’이라는 뜻이다. 루브르박물관이나 오르세미술관의 인파에 놀란 사람들은 꼭 쿤스트하우스에 와 보면 좋겠다. 여유 있게 작품을 즐기면서 작품들 사이의 ‘여백’ 또한 훨씬 크고 넓다는 사실에 감탄하고, 자코메티의 작품 하나만 덩그러니 있는 방에서 무한한 감동을 받으면 좋겠다. 단 한 작품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면서 비로소 마음이 편안해진다. ‘우린 그동안 너무 빽빽한 밀도의 세상을 살아왔구나’ 하는 깨달음. 물건과 사람으로 꽉 찬 세상 속에서 숨 막히게 사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는 것을 알게 된다. 이곳에서는 그야말로 작품도, 사람도 ‘숨통’이 트이는 느낌이다.

자코메티의 작품을 보고 있으면 그가 단지 작품이 아니라 공간을 조각하는 예술가였음을 깨닫는다. 몸통도 한없이 앙상하고 부러질 것같이 가느다란 팔다리를 지닌 자코메티 작품의 주인공들은 ‘원래 이 공간이 어땠더라, 이렇게 넓었던가’라는 생각을 절로 하게 만든다. 앙상한 나뭇가지처럼 메마른 자코메티의 조각들은 더 많은 피와 살로 당연히 더 채웠어야 했던 공간을 더 넓고 크게 만들면서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을 비로소 낯설게 한다. 이목구비가 뚜렷한 로댕의 조각상과 달리 자코메티의 조각상에는 얼굴 생김새가 거의 지워져 있거나 눈·코·입의 형상이 문드러져 있다. 마치 중요한 것은 생김새가 아니라고 선언하는 듯. 옷을 입은 경우도 거의 없다. 옷도 사라지고, 살집도 사라지고, 생김새도 사라진 자리에 남은 것은 뼈대와 최소한의 근육이다.



미술관에서는 마음껏 길을 잃고 방황하는 존재가 된다

자코메티는 어쩌면 중요한 것은 옷이나 생김새 같은 외모가 아닌, 우리의 가느다란 실존 그 자체라고 선언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살아 있음을 대변하는 가장 소중한 진실, 그것은 뼈와 근육이 있는 인간이라는 사실이니까. 아주 가녀린 부피만으로도 충분히 존재할 수 있는 것이 인간이라는 생각이 드는 순간, 우리를 이루고 있는 공간과 나의 관계를 다시 생각하게 된다. 너무 많은 것을 소유하려 하고, 너무 많은 공간을 차지하려 하고, 너무 많은 존재들과 관계 맺으려 한 것이 아닐까. 부러질 것 같은 앙상한 팔과 다리로, 그럼에도 꼿꼿하고 당당하게 걸어가는 자코메티의 인물들을 보면 못내 안쓰러우면서도 힘차게 응원하고 싶은 마음이 든다. 오직 홀로 걷는 것만으로도 우리는 오늘을 살아낼 수 있다고. 많은 것을 가지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책하지 말라고. 너무 많은 짐을 들기 위해 노력하지 말라고. 너무 많은 부담으로 당신의 인생을 고되게 하지 말라고. 그렇게 우리 현대인의 영혼을 향해 조용히 속삭이는 듯한 자코메티의 주인공들이 눈물겨운 진솔함으로 말을 걸어온다.

놀라운 특별전이 또 하나 있었다. 바로 고흐와 ‘21세기의 고흐’라 불린 작가 매튜 웡의 작품들을 비교하는 전시였다.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웡 또한 고흐처럼 극도의 우울감과 고통스러운 방황의 시간을 겪었으면서도 인생의 고비마다 아름다운 작품을 남겼음을 증언하는 방대한 컬렉션이 펼쳐지고 있었다. 

고흐의 작품들 앞에서 다정하게 손 잡고 있는 커플을 보니 더욱 애잔한 마음이 됐다. 고흐를 비롯한 수많은 예술가들은 외로웠지만 그 작품들을 바라보는 우리는 신기하게도 외로움을 다독이고, 고통을 위로받고, 다시 살아낼 수 있는 용기를 얻게 된다. 사이프러스와 제비꽃으로 가득한 고흐의 컬렉션을 보고 있으니 ‘식물의 위로’야말로 고흐의 외로운 24시간을 지켜준 영혼의 파수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극히 내성적인 성격 때문에 모델을 잘 구하지 못했던 고흐는 다른 화가들의 작품을 모작하거나 주변의 식물들, 골목길과 농장을 그렸다. 그때 꼭 빠지지 않는 대상이 바로 식물이었다. 귀를 자르고 요양원에서 치료를 받고 있을 때도 그는 한없이 펼쳐진 들판 위에서 자라나는 꽃을 그렸다. 그 꽃들과 나무들이 있었기에 고흐는 견딜 수 있었을 것이다. 어떤 황폐한 땅에서도 끝내 뿌리를 내리고 아름다운 꽃잎을 피워내는 식물의 강인함에서 분명 반짝이는 무언가를 발견했을 것이다. 그것은 고통을 이겨내는 생명력, 어지러운 방황의 시간조차 눈부신 창조의 시간으로 만드는 의지와 열정이 아니었을까.



나는 미술관에서 마음껏 길을 잃고 방황하는 존재가 된다. 그 방황, 서성거림, 헤맴이 못 견디게 좋다. 작가 아나톨 프랑스는 『에피쿠로스의 정원』에서 이렇게 말했다. “방황은 한때 인간과 우주 사이에 존재했던 본래의 조화를 되찾게 해준다.” ‘인간’과 ‘우주’가 동떨어진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이 바로 ‘방황’이라니, 멋지지 않은가. 우리가 방황할 때마다 우주는 우리 자신과 가까워지는 셈이다. 여행은 그런 ‘존재의 아름다운 방황’을 되찾아 주는 낭만적 모험이다. 늘 정해진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사람들은 방황의 아름다움을 알지 못한다. 방황을 쓸데없는 시간 낭비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위대한 예술가들, 작가들 그리고 삶의 묘미를 아는 아름다운 사람들은 하나같이 방황을 예찬했다. 깊어지는 가을, 당신이 올해의 목표를 채우지 못했다고 자책하지 말았으면 좋겠다. 부디 방황하면서 깊어질 자유, 헤매면서 더욱 풍부해질 여유를 스스로에게 선물하는 가을이 됐으면 좋겠다. 이 아름다운 취리히 쿤스트하우스를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당신의 삶에는 여유와 여백, 눈부신 방황의 아름다움이 깃들 것이다. 

사진·이승원 『공방예찬』, 『학교의 탄생』 저자
보기 과월호 보기
나라경제 인기 콘텐츠 많이 본 자료
확대이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