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금에 고여 있는 자금의 높은 비중을 일부 축소하는 대신 생애주기펀드(TDF)나 코스피·S&P 지수 추종 상품으로 강제 배분하고, 장기 복리의 혜택을 가입자가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디폴트옵션 제도를 보완해야 한다. 전부를 개인의 판단에 맡기자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분산이 전제된 안전한 범위 안에서만큼은 개인이 자신의 노후 자산 운용에 직접 기여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번듯한 아파트 한 채를 가진 ‘자산가’임에도 병원비와 세금을 걱정하는 은퇴자를 주변에서 어렵지 않게 본다. ‘2025년 가계금융복지조사’에 따르면, 가구주가 은퇴하지 않은 가구(83%) 중에서 노후 준비가 ‘잘 되어 있다’라고 응답한 가구는 9.6%에 불과했고, ‘잘 되어 있지 않다’는 가구는 51.9%에 달했다. 이미 은퇴한 가구(17%)에서는 생활비가 ‘여유 있다’라는 응답이 11.5%에 그친 반면, ‘부족하다’라고 응답한 비중은 55.6%였다.
유독 60세 이상 고령층에서 생활비 여유가 없는 이유는 한국 가구 자산의 약 71%가 부동산을 포함한 실물자산에 묶여 있기 때문이다. 반면 금융자산은 18.7%에 그친다.
미국의 풍경은 다르다. 미국 연방준비제도(Fed)가 발표한 「Survey of Consumer Finances」에 따르면, 65~74세 미국 가구는 자산의 56%를 주식·채권·펀드 등 금융자산으로 보유한다. 부동산 비중은 32%에 불과하다. 이 연령대 평균 순자산은 약 178만 달러(한화 약 23억 원)이며, 그 절반 이상이 배당과 이자를 창출하는 ‘살아 있는 자산’으로 구성돼 있다. 미국 은퇴자 상당수는 배당, 이자, 연금계좌 인출 등 금융소득으로 생활비를 마련한다.
퇴직연금 총적립금 2024년 431조 원에 달해…
2015~2024년 연평균 수익률은 2.4%에 그쳐
한국의 구조적 불균형을 바로잡을 기회가 있긴 하다. 바로 퇴직연금이다. 국가데이터처의 2024년 퇴직연금통계에 따르면 대한민국 퇴직연금 총적립금은 431조 원에 달한다. 확정급여형(DB) 214조 원, 확정기여형(DC) 116조 원, 개인형 퇴직연금(IRP) 99조 원으로 구성돼 있다. 그러나 이 숫자 뒤에는 ‘저수익의 늪’이라는 어두운 현실이 도사리고 있다. 참고로 퇴직연금은 계좌의 수익이 고스란히 내 노후 소득이 된다. 사실 진정한 노후 자산의 승부처는 퇴직연금이며, 그 성패는 오롯이 수익률에 달려 있다.
금융감독원 자료에 따르면 2015년부터 2024년까지 10년간 한국 퇴직연금의 연평균 수익률은 2.4%다.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확정급여형은 2.2%를 기록했다. 같은 기간 국민연금의 연평균 수익률은 6.56%였고, 2025년 한 해만 따지면 예상 수익률이 18.8%에 달한다. 퇴직연금과 국민연금의 수익률 차이는 왜 발생할까? 답은 운용 방식의 차이에 있다. 사람들이 금융자산 투자 시 선호하는 운용 방법을 보면 안전자산인 ‘예금’을 꼽은 비율이 87.3%로 압도적이며, 퇴직연금 적립금의 85.4%가 여전히 원리금 보장 상품에 머물러 있다. 한국은 디폴트옵션 제도를 도입했음에도 여전히 원금보장형 예금이 큰 비중을 차지한다.
사람들은 국민연금 수익률이 높다는 소식에 안도하기도 한다. 그러나 국민연금의 운용 성과는 국가 재정 부담을 낮추는 데 주로 기여할 뿐 가입자 개인의 수령액을 직접 끌어올리지는 않는다. 퇴직연금의 제도적 공백 역시 문제다. 2024년 기준 전체 사업장의 퇴직연금 도입률은 26.5%에 불과하며, 근로자 가입률도 53.3%에 머문다. 근로자 두 명 중 한 명은 이 최소한의 노후 안전망 바깥에 놓여 있다. 안전을 추구하는 심리가 결과적으로 노후를 더 불안하게 만들고, 제도 바깥에 놓인 절반의 근로자는 아예 이 논의 테두리의 밖에 있다.
숫자로 들여다보면 문제의 심각성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 초임 월급이 400만 원인 근로자가 연 3%의 임금 상승률을 적용받으며 매월 급여의 10%를 30년간 적립하고, 25년간 연금을 수령한다고 가정하자. 퇴직연금 수익률 2.3%를 적용해 시뮬레이션해 보면, 은퇴 시 월 수령액은 약 150만 원에 그친다. 2024년 기준 4인 가구 최저생계비인 약 183만 원에도 미치지 못하는 수준이다.
반면 운용 수익률을 7%로 끌어올리면, 월 수령액은 약 380만 원으로 2.5배 이상 늘어난다. 4.7%포인트의 수익률 차이가 노후를 ‘최소 생계’와 ‘풍요로운 은퇴’로 갈라놓는다. 이는 단순한 가상 시나리오가 아니다. 미국 퇴직연금 401k의 지난 20년간 연평균 수익률은 8.6%였다. 이것이 가능한 것은 원금 손실에 대한 공포보다 시간과 복리의 힘을 신뢰하고 주가지수에 연동되는 펀드의 분산이라는 제도 설계가 뒷받침됐기 때문이다.
한국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원금 손실에 대한 공포가 노후 빈곤이라는 더 큰 어려움을 불러들이고 있다. 참고로 S&P500 지수는 지난 수십 년간 연평균 약 10%의 수익률을 기록해 왔다. 물론 과거 수익률 통계가 앞으로의 수익률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한편 코스피200 지수 역시 장기 추세로 보면 물가상승률을 크게 웃돈다. 예금에 묶인 퇴직연금이 이러한 복리의 과실을 포기하고 있는 동안, 가입자들의 노후는 인플레이션에도 못 미치는 수익률에 조용히 잠식되고 있다.
실질적인 노후 소득되려면?…세제 유인 대폭 강화하고
원리금 보장 상품 일변도에서 벗어나도록 제도 개편해야
퇴직연금이 실질적인 노후 소득의 원천이 되기 위해서는 구조적 전환이 불가피하다. 다음 세 가지 방향을 제안한다. 첫째, 개별 가입자에게 운용 책임을 온전히 넘기지 말아야 한다. 오히려 국민연금공단에 위탁해 수익률을 국민연금 수준에 맞추거나 이에 연동하는 상품을 설계해 가입자에게 상품을 선택하게 하는 것이 현실적 대안이다. 여기서 국민연금의 운용 수익이 가입자 개인의 수령액을 직접 올리지 않는 구조적 한계를 퇴직연금이 보완할 수 있다.
둘째, 디폴트옵션의 실질적 재편이다. 개인이 상품 운용을 직접 선택하는 경우에도 원리금 보장 상품 일변도의 구조에서 벗어나야 한다. 예금에 고여 있는 자금의 높은 비중을 일부 축소하는 대신 생애주기펀드(TDF; Target Date Fund)나 코스피·S&P 지수 추종 상품으로 강제 배분하고, 장기 복리의 혜택을 가입자가 실질적으로 누릴 수 있도록 제도를 보완하는 것이다. 전부를 개인의 판단에 맡기자는 것이 아니다. 적어도 분산이 전제된 안전한 범위 안에서만큼은 개인이 자신의 노후 자산 운용에 직접 기여하게 해야 한다는 뜻이다. 퇴직연금 내에서 안전자산의 비중인 30%의 축소와 함께 코스피200, S&P500 등 지수 추종 펀드의 의무 비중 확대를 병행하는 방안도 고려할 만하다. 사실 지수 추종 투자는 개별 종목 선택의 위험을 제거하면서도 장기 복리 성장의 과실을 누릴 수 있는 검증된 방식이다.
셋째, 세제 유인의 대폭 강화와 중도 인출 억제다. 한국의 IRP 세액공제 한도는 연간 900만 원이며, 13.2~16.5%의 세액공제율을 적용하면 실질 혜택은 120만~150만 원 수준에 그친다. 반면 미국 개인퇴직계좌(IRA)는 연간 납입 한도 7천 달러 전액이 소득공제 대상이다. 납입액 전액을 과세소득에서 제외해 주는 구조로 전환할 때 개인이 느끼는 장기 투자 유인은 매우 강력할 것이다.
국민연금이 국가 재정의 안정성을 담보한다면, 퇴직연금은 개인의 삶의 질을 직접 결정하는 ‘나의 계좌’다. 원금 손실의 공포보다 노후 빈곤이라는 더 큰 위험을 직시해야 한다. 대한민국 노후 대책의 시작과 끝은 결국 퇴직연금의 혁신에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