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석 등받이를 세우고 바르게 앉아 챙겨두었던 책을 펼쳤다. 김형경의 『사람 풍경』. 이번 여행에 가지고 가야겠다는 생각에 전날 밤 책장에서 뽑아 두었다. 표지가 슬쩍 바래고 책등이 조금 틀어진 오래된 책. 군데군데 오래전의 내가 그어놓은 밑줄을 중년이 돼 다시 읽는 일은 멋쩍으면서도 애틋하다. 그땐 이런 문장에 마음이 걸렸구나. 지금 긋게 되는 밑줄과는 사뭇 결이 다르다. 책 한 권을 면대하며 떠나는 시간 여행. 비행기 안은 어둠이 낮게 깔려 대부분의 승객은 담요를 두른 채 잠들어 있고 창밖엔 검푸른 구름 위로 별이 가득하다. 그리고 일정하게 웅웅대는 엔진 소리. 카자흐스탄 알마티로 향하는 6시간의 비행 동안 부지런히 읽으면 다 읽을 수도 있겠다 싶다.
정신분석을 받은 경험을 여행 위에 포개 쓴 책
『사람 풍경』은 소설가 김형경이 혼자 떠난 긴 여행의 기록이다. 다만 여느 여행기와 다른 점은, 저자가 정신분석을 받은 경험을 여행 위에 포개어 썼다는 것이다. 그녀는 여행지에서 만난 타인의 얼굴과 몸짓을 통해 자기 내면에 새겨진 상처의 무늬를 하나씩 더듬는다. 낯선 도시의 노인에게서 아버지를 보고, 낯선 아이의 눈빛에서 어린 날의 자기 자신을 본다. 그리고 담담하게 털어놓는다.
살면서 가장 잘한 일을 꼽으라면 주저 없이 정신분석을 받은 일과 혼자 여행한 일, 두 가지를 꼽는다. 그 기간 동안 집약적이고 폭발적인 변화가 일어나는 강렬한 내적 경험을 했다. 그렇다고 해서 대단한 통찰을 얻었거나 훌륭한 사람이 되었다는 뜻은 아니고, 단지 예전보다 편안하고 배짱 있게 살게 되었다.
책날개에 실린 저자의 소개글이다. 마지막 한마디가 너무 좋다. “편안하고 배짱 있게 살게 되었다.” 마음 치유가 필요한 가장 중요한 이유 아닐까?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는 그 말이 품은 무게를 다 알지 못했던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은 꽤 안다. 사람은 나이 들수록 자기 안에 고인 상처를 자주 들여다봐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상처가 엉뚱한 곳으로 새어 나간다. 동료에게 짜증으로, 연인에게 퉁명스러움으로, 가족에게 날 선 말로. 정작 상처의 근원은 다른 곳에 있는데 우리는 죄 없는 가까운 사람들에게 그 불똥을 튀긴다.
김형경이 정신분석을 받은 뒤 가장 크게 달라진 점도 바로 그것이라고 한다. 자기 상처의 진짜 주소를 알게 돼 엉뚱한 사람에게 화내지 않게 됐다는 것. 그리고 정신분석만큼이야 못하겠지만 여행 또한 번지수가 틀린 불똥을 잠재워 준다. 자기가 속한 사회에서 한발 물러나, 낯선 사람들 사이에 끼어 앉아, 아무도 나를 이름으로 부르지 않는 시간을 보내는 여행. 그 시간 속에서 사람은 비로소 자기를 들여다본다. 이때의 ‘자기’는 사회 속의 자기가 아니라 허울을 다 벗은 벌거벗은 자기다. 김형경이 여행을 통해 만난 것이 바로 그 자기였고, 나도 오래도록 여행에서 자기를 만나왔다.
티베트의 카일라스산을 순례하고 돌아오던 길, 대중교통이 다니지 않는 곳이라 지나가는 픽업트럭을 얻어 타야 했다. 트럭에 먼저 타고 있던 너댓 명의 일행 중 아주머니 한 분이 나더러 어깨를 주물러 달라고 했다. 차 안엔 다들 나이가 지긋하신 분들이었으니 힘 좋아 보이는 젊은이가 얼마나 반가웠을까. 그리고 얼마나 어깨가 아팠으면 생면부지의 사람에게 이런 요청을 할까. 열심히 주물러 드렸다. 얼마 안 가 트럭은 길을 벗어나더니 황무지 한가운데에 섰다. 그늘 하나 없고 풀 한 포기 없는 허허벌판에다 매캐한 유황 냄새가 진동하는 곳이었다. 무슨 일인가 했더니 다들 내려서 땅에서 퐁퐁 솟는 온천수를 구경했다. 잠시 쉬어가나 보다 하고 말았는데, 어깨가 아프다던 아주머니가 윗옷을 걷고 맨땅에 엎드리는 것이었다. 그러자 누군가 온천수를 컵에 받아 그녀의 아픈 어깨에 조금씩 끼얹었다. 아주머니는 눈을 감고 있었는데, 물이 어깨를 타고 흐를 때마다 얼굴에 옅은 주름이 펴졌다가 다시 접혔다. 아, 어깨를 주물러 달라던 게 괜한 요청이 아니었구나. 유황 온천이 신경통에 좋다 해서 이 먼 곳까지 찾아온 거였구나. 믿음이었고 민간요법이었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 앓아온 몸의 기도였다. 그 순간 어머니를 떠올렸다. 당시 내 어머니도 중증의 관절염을 앓을 때였다. 어깨에 온천수를 끼얹는 티베트 아주머니가 어머니와 하나로 겹쳤다. 유황 냄새 가득한 황무지에 선 채로, 어머니에게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나는 이런저런 이유로 어머니에게 무심하고 죄 많은 아들이었으니까. 신은 모든 곳에 있을 수 없기에 어머니를 만들었다고 했던가. 너무 오래 집을 떠나 여행 중인 내게 하늘이 어머니를 보내주신 것만 같았다.
또 한 번은 인도의 바라나시, 갠지스강에서였다. 새벽안개가 수면 위에 낮게 깔려 있고, 사람들이 강물에 몸을 담그며 의례를 했다. 나는 강가의 계단에 앉아 그 풍경을 보고 있었다. 한 노인이 중년의 아들에게 부축받으며 천천히 강물 쪽으로 걸어 내려왔다. 아들이 노인의 팔꿈치를 받치고, 노인은 한 걸음씩 조심스레 디뎠다. 거동이 힘들어서인지 노인은 시종일관 불편한 표정이었다. 하지만 강물에 발이 닿자 얼굴이 풀어졌다. 아들은 옆에 가만히 서 있었다. 부축하는 손을 거두지 않은 채.
티베트에선 어머니를, 인도에선 아버지를 떠올리다…
평소에 미뤄둔 감정들을 한꺼번에 마주하는 여행의 시간
나는 알 것 같았다. 저 두 사람이 여기 함께 온 것은 노인의 숙원 때문이라는 것을. 죽음이 가까운 사람을 갠지스강에 데리고 오는 것은 일종의 도리이자 의례라는 것을. 아버지를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아버지에게 무심하기 또한 마찬가지라 일 년에 한 번 겨우 뵐까 말까 하는데, 그때마다 아버지가 늙어가는 게 확연하게 보인다. 갠지스 강가에서 아들이 아버지를 보필하는 몸가짐 하나하나가 내가 평생 풀지 못한 숙제의 해답을 보여주는 것만 같았다.
티베트의 어머니, 인도의 아버지. 낯선 사람의 몸짓 속에서 내 가족을 보고, 그 시간을 통해 평소에 미뤄둔 감정들을 한꺼번에 마주하는 시간. 김형경이 정신분석 치료실의 소파에서 자기 내면을 들여다봤다면, 나는 길 위에서 낯선 타인의 얼굴을 통해 나를 들여다봤다. 여행은 아주 느린 방식의 자기 치유였다.
마음이 멍든 현대인들을 위한 처방, 정신분석과 여행…
멀리, 오래 떠나지 않더라도 혼자서 갈 것
현대의 삶은 마음을 많이도 긁는다. 뉴스는 사납고, 관계는 미세하게 어긋나며, 성취는 금세 낡는다. 누구나 크든 작든 마음의 병을 안고 살아간다. 병이라는 말이 무겁다면 멍이라고 불러도 좋다. 어떤 멍은 시간이 지나면 저절로 사라지고, 어떤 멍은 평생 푸르게 남는다. 그렇게 남은 푸른색은 결국 주변 사람들에게 번지기 마련이니 혼자 끙끙 앓지 말아야 한다. 김형경은 우리에게 두 가지를 넌지시 권한다. 정신분석을 받아보라는 것과 혼자 여행을 떠나보라는 것. 그녀의 첫 번째 권유에 깊이 동의한다. 정신분석이 부담스럽다면 심리 상담이라도 받아볼 일이다. 비용과 시간이 들긴 하지만, 마음의 병을 방치하다 치르게 될 대가에 비하면 저렴하다. 전문가 앞에서 자기 안의 이야기를 꺼내는 일은 혼자서는 평생 닿지 못할 이해에 다가서게 해준다. 상처를 혼자 들여다보면 커지기 쉽지만, 믿을 만한 사람 앞에서 들여다보면 조금씩 아문다. 주변에도 조용히 상담을 받는 친구들이 있다. 그들의 마음이 부드러워지고 용기로 가득해지기를 진심으로 응원한다.
그리고 두 번째 권유인 여행에 대해서는 두 손 번쩍 들어 동의한다. 멀리 가지 않아도 되고 오래 가지 않아도 된다. 다만 혼자 가야 한다. 혼자여야만 낯선 사람이 보이고, 낯선 사람이 보여야만 그 속에 자기가 투영된다. 동행이 있으면 자꾸 동행의 얼굴을 보게 된다. 언뜻 여행은 이국의 풍경을 만나러 가는 일 같지만, 가만히 들여다보면 결국 사람을 만나러 가는 일이다. 그리고 그 사람들 속에서 자기 자신을 비춰보고 감각하며 독대하는 일이다. 여든 개 넘는 나라를 다니며 몸으로 깨달은 것이다. 정신분석과 여행. 마음의 병을 끌어안은 채 꾸역꾸역 살아가는 우리 모두가 한번쯤 시도해 볼 만한 선택지다.
비행기가 밤의 대륙 위를 날고 있다. 기내의 조명은 여전히 어둑하다. 담요를 고쳐 덮는 옆자리 승객이 깰까 다 읽은 책을 조심스럽게 챙겨 넣는다. 창밖을 내려다보니 땅에 박힌 도시의 불빛들이 가득하다. 저 불빛 어딘가에 마음 아파 잠 못 이루는 사람이 있겠지. 또 어떤 집에서는 큰일을 치르느라 함께 밤을 새는 가족도 있을 것이고. 이번 여행에서도 나는 누군가를 만나 내 자신의 민낯을 보게 되겠지. 또 한 번 목이 메어 눈물을 훔치고, 또 한 번 부모님께 오래 미뤄둔 전화를 걸게 될지 모른다. 그런 일이 일어나든 일어나지 않든, 여행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멈추면 마음이 금세 탁해지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