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딥테크는 10년을 참고 기다려야 하는데 우리 모험자본이 과연 그렇게 기다려 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민간이 기다리지 못한다면 정부 자본이라도 인내자본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주문이다.
지난 6월 8일 저녁 서울 신라호텔 영빈관. 방한 마지막 일정으로 엔비디아 코리아 AI 에코시스템 리셉션에 참석한 젠슨 황 엔비디아 최고경영자(CEO)는 삼성, 현대차 같은 대기업뿐만 아니라 국내 AI 스타트업들을 한자리에 불러 모았다. “피지컬 AI 생태계를 함께 만들자”는 그의 독려에 스타트업 대표들이 호응하고 열광했다. 그 자리에 엔닷라이트도 있었다. 젠슨 황은 왜 한국 스타트업에 주목했을까. 어떤 가능성을 봤을까. 그 답을 찾기 위해 이번에는 엔비디아가 선택한 스타트업 중 하나인 엔닷라이트의 박진영 대표를 만났다.
가상환경에서 로봇 훈련시킬 3D 데이터 만드는 회사…
시제품 공개 두 달 만에 5억 원대 납품
“엔닷라이트는 피지컬 AI 시대에 로봇이 가상환경에서 먼저 배우고 그 경험을 현실로 옮겨오도록 돕는 3D 데이터를 만드는 회사입니다.” 창업 6년 차에 피지컬 AI에서 빠른 성장 가능성을 찾은 박 대표의 말이다. 피지컬 AI를 활용하려면 로봇에게 현실에서 움직이는 법을 학습시켜야 한다. 그러나 실제 공장이나 가정에서 로봇을 굴려 데이터를 모으는 일은 느리고, 비싸고, 때론 위험하다. 그래서 로봇은 가상의 시뮬레이션 안에서 먼저 학습한 뒤 이를 현실로 옮겨온다. 이른바 ‘심투리얼(sim-to-real)’이다. 학습 무대는 대부분 엔비디아의 시뮬레이션 플랫폼 옴니버스다. 문제는 그 무대에 올릴 3차원 데이터가 부족하다는 점이다. 모델도 시뮬레이터도 준비됐는데 정작 로봇에게 학습시킬 3D 데이터가 없어 모든 것이 막혀 있었다.
겉모양만 있는 메쉬 데이터(mesh data)로는 안 된다. 로봇이 냉장고 문을 여는 법을 배우려면 경첩이 어떤 구조로 연결됐고 어느 정도의 힘을 줘야 열리는지 무게와 마찰 같은 물리 정보가 살아 있어야 한다. 이렇게 시뮬레이션에 바로 쓸 수 있는 데이터를 ‘심레디(Sim-Ready)’ 데이터라 부른다. “게임에 쓰는 메쉬 데이터는 형상만 알아요. 우리는 캐드(CAD) 데이터라서 물리적 힘의 크기까지 압니다.” 박 대표의 설명이다. 대부분의 3D 기술이 형상만 빚는 메쉬에 머무는 사이 엔닷라이트는 정밀한 수치를 담은 설계 데이터를 만든다.
엔닷라이트의 무기는 자체 개발한 3D 엔진 ‘트리닉스(TRINIX)’다. 문장이나 이미지를 입력하면 수십 초 만에 캐드 데이터를 만들고 기업이 가진 낡은 설계 파일에서 빠진 물리·관절 정보를 AI가 추론해 채워 넣는다. 가상에서 학습한 결과와 현실의 오차를 측정해 데이터를 거듭 다시 만드는 보정 과정까지 자동화했다. “심레디 데이터의 경우 다들 여전히 사람을 혹사시켜 만들지만 우리는 빠르고 싸게 만듭니다.” 전 세계에서 캐드 엔진을 가진 회사는 손에 꼽고 그마저도 거대 기업이라 이러한 새로운 시장으로 빠르게 움직이지 못한다는 것이 박 대표의 판단이었다.
박 대표가 심레디 데이터 시장의 크기를 자신하는 근거는 단순하다. 학습에 쓸 3D 데이터가 세상에 거의 없다는 것이다. “실물 제품의 3D 데이터는 하나도 없어요. 눈에 보이는 저 캔부터 다 다시 만들어야 합니다.” 책상 위의 사이다 캔을 가리키며 하는 말이다. 텍스트와 이미지를 다루는 AI 학습 데이터 공급 시장이 이미 수십조 원 규모로 커진 점을 떠올리면 빈 채로 남은 3D 데이터 시장의 잠재력은 가늠하기 어렵다.
이 대표는 3D 데이터 시장이 얼마나 폭발할지는 결국 휴머노이드 로봇이 어디까지 가느냐에 달려 있다고 본다. 시장은 빠르게 반응했다. 지난해 4월 AI와 캐드 엔진이 결합된 시제품을 내놓자 두 달 만에 한 대기업에 5억 원대로 납품됐다. 휴대전화부터 냉장고, 세탁기까지 제품 설계 자동화가 시작됐다. 지금은 현대·LG·삼성의 여러 팀과 동시에 과제를 진행한다. 엔비디아와 대기업, 엔닷라이트가 한 자리에 모여 “어떤 데이터를 만들어 넣어야 로봇이 잘 배우는가”를 함께 찾는 방식이다. 이 과정에서 시뮬레이션 환경 구축의 표준이 정해질 것이고 그 표준을 쥐겠다는 것이 박 대표의 전략이다.
엔비디아와 협력하되 데이터와 표준은 주도권 쥘 것…
올해 매출 10배, 조직 5배, 일본 현지 법인 설립이 목표
이처럼 엔닷라이트가 밀접하게 함께 일하고 있는 엔비디아와의 인연은 우연에서 시작됐다. 박 대표와 절친한 실리콘밸리의 한 대학 교수가 다니는 요가원에 엔비디아의 고위직 부부가 있어 소개를 받았다. 알고 보니 이들 부부는 엔비디아 코리아의 스타트업 협업 프로그램인 인셉션 담당 임원이 한 전시회에서 엔닷라이트를 발견하고 박 대표와 연결해 주려던 관계자였다. 이를 기점으로 2023년 엔비디아 인셉션에 들어간 데 이어 엔비디아와 중소벤처기업부의 협력 프로그램에도 합류했다. 덕분에 올해 실리콘밸리에서 열린 엔비디아의 GTC 콘퍼런스에서는 엔닷라이트를 알아보는 사람들이 줄을 이었다.
“엔비디아에 종속되는 것 아니냐”는 질문에 박 대표는 “엔비디아라는 우군을 얻되 데이터와 표준은 한국이 쥐면 된다”고 답했다. “한국은 제조업 강국입니다. 이 좁은 땅에서 김치 공장부터 반도체까지 만드는 나라는 우리뿐이라고 해요. 공장도 데이터센터도 다 비슷하니 우리가 엔비디아와 함께 먼저 만들어 표준으로 깔면 모델도 데이터도 로봇도 팔 수 있습니다.”
여기까지 오는 길은 길었다. 박 대표는 대학 시절 싸이월드 미니홈피 스킨을 팔아 도토리를 벌며 창작자에게 돈을 주는 생태계에 눈떴다. 대학 졸업 후 2009년 삼성전자에 입사해 갤럭시S팀에서 일했다. 그때 3D 엔진을 개발하던 입사 동기와 결혼했다. 이후 창업 아이템을 고민하던 박 대표에게 남편은 “나랑 창업하려면 무조건 캐드를 하자”고 못 박았다. 수십억 원짜리 외산 캐드 엔진을 살 수 없어 직접 만들기로 한 부부는 낮에는 직장을 다니고 밤에는 캐드 엔진 개발에 매달리는 생활을 5~6년 한 끝에 2020년 1월 엔닷라이트를 창업했다. 3D 프린터 교육용에서 시작해 메타버스로, 다시 피지컬 AI로 타깃 시장을 옮겨갔지만 “누구나 쉽게 쓰는 캐드 툴을 만들겠다”는 가치는 변하지 않았다.
엔닷라이트의 경쟁자는 만만치 않다. 특히 엔비디아 출신이 세운 실리콘밸리 스타트업 라이트휠은 올해 1분기에만 1억 달러(약 1,500억 원) 규모의 수주를 했다고 한다. 박 대표는 “그만큼 시장이 폭발적으로 성장하고 있다는 뜻”이라며 “기술적인 측면에서는 우리가 충분히 우위에 있다”고 자신감을 보였다. 다만 엔닷라이트가 실리콘밸리 경쟁사에 비해 미국시장에 덜 알려져 있는 것이 문제라고 했다. 박 대표는 이번에 새로 투자받는 자금의 상당 부분을 미국시장에서 회사를 알리는 데 쓸 계획이다.
정부 정책을 향한 진단은 날카롭다. 자본의 크기가 아니라 속성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딥테크는 10년을 참고 기다려야 하는데 우리 모험자본이 과연 그렇게 기다려 줄까요? 저는 아니라고 봅니다.” 민간이 기다리지 못한다면 정부 자본이라도 인내자본의 성격을 가져야 한다는 주문이다. 다만 그는 정부가 실증 기회를 넓혀 대기업이 부담 없이 스타트업 기술을 도입하도록 돕는 최근의 흐름엔 후한 점수를 줬다. 과학기술정보통신부가 추진하는 국가 AI 파운데이션 모델 컨소시엄에 엔닷라이트도 3D 데이터 공급자로 참여하고 있다.
올해 목표는 매출 10배, 조직 규모 5배다. 지난해 문의가 쏟아졌는데 인력 부족으로 놓친 기회가 많았다는 것이다. 일본에서도 문의가 이어져 올해 하반기에 현지 법인을 세울 계획이다.
피지컬 AI를 새 성장동력으로 삼은 엔비디아는 데이터 부족이라는 병목을 제조업 강국 한국의 스타트업과 함께 풀려고 한다. 엔닷라이트가 비집고 들어가려는 자리가 바로 그 빈틈이다. 10년을 잠도 못 자며 기술을 벼려온 부부는 이제야 제 시장을 만났다. 그 끈기가 한국 제조업을 타고 피지컬 AI의 새로운 표준으로 이어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