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통주’라는 말을 좋아하지 않는다. 경험해 본 유명 전통주 중 역사와 명성만큼 납득되지 않는 완성도가 많아서다. ‘우리술’이라는 말도 좋아하지 않는다. 맹목적인 애국심을 호환하는 말인 ‘국뽕’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한국술’이라는 말이 좋다. 질척거리지 않고 간결하게 잘 표현된 말이라고 생각한다. 동시에 기존에 전통주라 불렸던 한국산 술의 현재 새로운 정체성을 잘 드러낸 말이라고 생각한다.
2021년의 푸드 트렌드로는 단연 한국술과 디저트가 주요 키워드로 빠지지 않는다. 둘 중 더 크게 산업을 움직이게 될 거로 내다보는 트렌드가 한국술이다. 우리의 주류 소비생활 풍경 자체가 변화하게 되리라 기대할 수 있을 정도다. 지금 내추럴 와인이 외식 업계의 풍경을 바꿔놓은 것과 동일한 변화가 감지된다.
민트, 팔각 등을 넣은 개성 있는 맛,
이제까지 이런 막걸리는 세상에 없었다
공교롭게도 나 역시 종종 막걸리를 마시기 시작했다. 네 캔에 1만 원 라거 맥주의 찬 온도도 여름밤을 즐기기 좋겠으나, 기왕 같은 찬 온도라면 막걸리가 맛도 풍부하고 배도 두둑해서 한결 마음에 든다. 이만하면 때 놓친 늦은 저녁 식사 대용으로 적절하다. 여름철 주방에 서서 불 쓰기가 두렵다 보니 에어컨 한기 아래 막걸리 한두 잔이면 뒤척이지 않고 꿀잠 자기에 안성맞춤이다.
김치냉장고에 시원하게 식혀둔 막걸리는 참 맛있다. 어떤 것은 바나나와 참외 향 물씬한달곰함이 좋고, 또 어떤 것은 상큼한 과일을 즙 낸 것처럼 새콤한 맛이 짜릿해 좋다. 잘 만든 막걸리는 재료가 그저 쌀인 것이 신기할 정도로 화려하고 다양한 맛과 향을 낸다.
속이 뒤집히고 머리가 깨지는 그 옛날 막걸리만 생각한다면 이해하기 힘든 이야기일 수도 있겠다. 들큼한 단맛 외에 별다른 개성을 느낄 수 없는 시시한 맛이었으니.
내 김치냉장고의 막걸리는 새로운 세대의 양조장에서 소규모로 양조하는 것들이다. 이른바 ‘프리미엄 막걸리’라고 부르는 부류. 기존의 막걸리와 구분 짓는 새로운 이름이 붙은 데엔 다 이유가 있다. 대량생산이 아니라 적은 양을 통제하다 보니 들어가는 재료도 양조 과정도 단순할 수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흐름 자체가 본의 아니게 전통을 복원하고 있다. 현대적 양조 기술이 없던 시절의 전통 방식 말이다. 안정적인 양조와 보존을 위해 식품 첨가제 등도 사용할 필요가 없어져서다. 가격 저항선에 대해 자유로운 상품군으로 포지셔닝되다 보니 재료도 좋은 것을 선별할 수 있다. 어디까지나 이들 양조장이 가양주보다 고작 조금 더 큰 규모다 보니 나올 수 있는 완성도다.
바나나와 참외 향이 좋았던 막걸리는 한아양조의 ‘아홉쌀’ 막걸리다. 서울 서초구 방배동 오래된 떡집 자리에 차린 양조장으로, 규모는 정말 작다. 전문기관에서 양조를 배운 젊은 대표가 가내수공업처럼 만든다. 아홉쌀은 막걸리 도수를 9도에 맞추다 보니 겸사겸사 붙인 이름이라는데, 이 양조장의 또 다른 막걸리는 7도짜리 ‘일곱쌀’이다. 양조장 대표가 일곱 살 적에 찍은 사진이 라벨로 붙어 있다. 아홉쌀은 같은 사진을 흔들린 것처럼 합성해 더 높은 도수를 위트 있게 드러냈다. 감미료는 전혀 사용하지 않는다. 감미료 등 첨가제를 사용하지 않는 것은 한아양조뿐 아니라 대다수 프리미엄 막걸리의 중요한 특색이다. 쌀도 각별히 골라 쓴다. 찰기 좋기로 이름난 백진주 품종을 사용한다. 녹색 플라스틱병 대신에 매끈한 유리병을 사용해 패키지 디자인도 말끔하다.
한마디로 이제까지 이런 막걸리는 세상에 없었다. 요즘 MZ세대에 대한 정의를 내리는 것이 기성세대 사이에서 유행이 됐는데, 나는 이 막걸리들이 MZ세대의 소비취향을 무척 잘 드러낸다고 생각한다. 양조 과정에 거추장스러운 것이 없이 정직하고 투명하다. 그러나 재료 선택과 양조에 기울이는 노력 등 과정에서는 더할 데 없이 충실하다.
아니나 다를까 새 소비코드의 한국술에 가장 발 빠른 호응을 보이고 있는 것도 MZ세대다. 한아양조뿐이 아니다. 스파클링 와인을 연상시키는 두툼한 유리병에 컬러풀한 일러스트를 라벨로 입힌 ‘날씨양조’(서울 영등포구 문래동), 민트와 팔각, 유자, 참외 등 독특한 부재료로 개성 있는 맛을 시도 중인 ‘같이’ 양조장(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안동 종갓집의 전통을 세련된 디자인과 현대적인 양조로 잇는 ‘농암종택’(경북 안동 도산면)의 일엽편주 등은 인스타그램 등 SNS를 통해 열풍을 일으키고 있다. 특히 일엽편주는 쉽게 구하기 어려울 정도로 큰 인기다.
파인 다이닝보다 스몰 플레이트 콘셉트···막걸리, 증류주 등 다양하게 맛볼 수 있어
입맛을 사로잡고 마음도 빼앗는 완성도 높은 한국술이 빠른 속도로 속속 등장하고 있다. 막걸리부터 청주와 약주, 과실주와 증류주, 거기에 와인과 사이다(사과를 발효한 탄산주)까지 다양한 술 종류마다 깜짝 반할 만한 퀄리티를 지닌 한국술을 만날 수 있다.
앞서 내추럴 와인 트렌드와 한국술 붐이 닮았다고 했는데, 일단 술맛이 좋다는 점이 첫 번째 공통점이다. 두 번째는 왕성한 소비력을 갖춘 20대부터 40대까지의 소비층이 열광한다는 점. 그리고 세 번째 공통점은 그로 인해 외식업에서 한국술을 받아들이는 속도가 엄청나게 빠르다는 점이다.
대량생산 시대 이전의 재래식 농법과 양조 기술로 인위를 최대한 뺀 와인인 내추럴 와인은 2017년 한국에서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2017, 2018년까지는 유별난 괴짜 취향 정도로 취급되던 장르였지만, 고작 4년 만에 강산이 변한 모습이다. 현재는 수많은 내추럴 와인 전문 소매점이 생겨나 대중화된 내추럴 와인 소비층의 홈술을 지탱하고 있고, 새로 생기는 와인바나 레스토랑에서도 내추럴 와인을 빼놓지 않고 취급하고 있다. 오로지 내추럴 와인만 내세운 전문 바가 지역마다 치열하게 경쟁 중인데, 대개 격식 있는 다이닝이 아닌 스몰 플레이트 위주의 3~4인이 즐기기 좋은 캐주얼 다이닝 형식을 취한 곳들이다. 한마디로 현재 외식업의 가장 주요한 수익구조이자 트렌드 키워드가 내추럴 와인이다.
딱 이 형태를 차용한 한국술 전문점이 속속 생겨나고 있다. 한국술 소매점은 소규모로 곳곳에 생겨나고 있고, 준비하는 곳도 부지기수다. 멋진 한국술 전문 바는 이미 많이 생겼다. 요즘 커리어를 시작하는 20, 30대 요리사들의 특징이 파인 다이닝을 지향하지 않고 최대한 빠르게, 작게 자신의 업장을 스몰 플레이트 콘셉트로 시작하는 것인데, 재능 있는 요리사들이 스스로 차린 한국술 바가 만원사례를 빚고 있는 것이다. 20세기 말 한때 유행했던 ‘민속주점’의 토속적인 모습과 아예 딴판인 모던한 공간들이다.
이를테면 서울 성동구 금호동의 ‘금남정’도 힘들게 예약해서 갔던 곳이다. 오래된 재래시장인 금남시장 뒤 작은 골목에 자리한 이 한국술 바는 10평 조금 넘는 공간의 절반을 주방이 차지한, 젊은 셰프의 바다. 한국적 미를 동시대적으로 차용한 인테리어와 외관부터 이목을 끈다. 주메뉴는 청어알과 두부쌈, 머릿고기 수육과 제철 나물무침, 갈치속젓 파스타 등 한식에 기반을 둔 요리. 부지런한 테이스팅을 통해 전국에서 찾아낸 맛 좋은 한국술과 거기 어울리는 창작 요리를 포진시켰다.
요즘 인기 있는 한국술을 무척 다양하게 갖추고 있어 막걸리부터 맑은 술, 증류주까지 다양하게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잔술로 맛본 증류주까지 열댓 가지 중 단연 발군이었던 것은 양조학당의 탁주와 약주 그리고 ‘서’ 고구마 소주, 쓰리소사이어티스의 ‘정원’ 진, 토끼소주의 ‘선비’ 진. 마치 색다른 내추럴 와인을 탐색하듯 각각 높은 완성도에 개성까지 겸비한 한국술을 맛보는 일은 무척 보람찬 일이었다. 말로 강제하지 않아도 본심으로 한국의 전통이 사랑스러워지고, 이 좋은 맛이 진정 ‘우리 것’이라는 자부심이 샘솟을 수 있었다. 게다가 와인과 달리 한국술은 양조장을 방문해 볼 수 있고, 양조자의 마음가짐을 소통할 수 있다. 실로 살갗에 와닿는 맛있음이다.
산업화 과정에서 우리가 경험한 한국술은 공장에서 대량으로 생산하는 저가 막걸리나 희석식 소주, 아니면 180도 반대편의 무형문화재, 식품명인 위주의 희소했던 명맥 극단 중 하나였다. 그 양극 사이에서 일정 부분 우리 모두는 한국술의 가치를 잊고 살아왔다고 생각한다. 이제 이 작은 양조장들의 작은 움직임들 덕분에 재래의 양조 전통을 복원하고, 한국의 술맛 또한 맥주와 와인과 양주 못지않은 기호가 될 수 있음을 배우고 있다. 금남정의 밤이 흐르는 동안 문득 생각했다. 우리 전통의 술도 참 맛이 좋았는데 여태 모르고 살았구나. 비로소 전통주, 우리술, 한국술 모두 듣기 좋은 말이 됐다.